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40화 (40/458)

< 제 40화. >

연일 화제가 되었다고 해도 한계는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시절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뉴스나 신문을 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쉽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11월 21일.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라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제동을 걸 뉴스가 방송되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IMF에 손을 내밀기로 결정했고, 그 뉴스가 TV를 통해 송출될 때.

“우진이 네 말이 맞았구나.”

“예, 정부는 결국 IMF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쯧쯧, 간곡한 부탁도 아니고 거드름이나 부리니··· 어디 도움을 주고 싶을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간 정부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내놓으라 거의 반협박에 가깝게 얘기했었다. 나라가 부실해지는 과정에서도 제 놈들의 자존심을 추켜세우는 일이었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기존 개인 외화보유 상한 1만 달러 규제에서 50만 달러까지는 묻지 않겠다며 국민들에게 사재를 융통하게 했지만 그랬음에도 300억 달러 수준의 외환보유고는 쉽게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 내일이라고?”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11월 22일.

채권은행단, 정부, 삼현, 그리고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다.

카이그룹은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현금 할인을 듬뿍 얹어 주며 재고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해 애썼지만 현 시국에 현금이 많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적자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공식적인 만남이니 별 내용은 없을 게다. 그냥 서로 간이나 보겠지.”

피식 웃으며 할아버지의 말에 공감했다.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고, 할아버지 나름대로 내게 조언을 해주고 싶으셨던 모양.

“예, 그런데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채권은행단입니다. ‘달러’의 가치가 폭등할 테니까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그렇지, 환율이 미친 듯이 오를 게다. 환율 방어가 불가능할 테니까··· 우진이 네가 말한 2천 원까지 오를지도 모르겠구나.”

“있어도 못 구합니다. 원화는 휴지가 될 테니까요.”

“드디어 이 할애비도 달러를 쓸 때가 된 것 같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할아버지가 달러를 쓸 타이밍이 왔다.

“뭘 사실 생각이세요?”

“중소기업들 위주로 ‘환전’을 해줄 생각이다. 물론 환율은 다 받아야겠지.”

속으로 꽤 놀랐다.

할아버지가 ‘이미지’라는 것에 제법 맛이 들린 것 같았다. 굳이 중소기업들을 살려주고자 하기에 더 그렇다.

“그렇군요.”

“그다음에 쏟아지는 부동산들을 좀 주워볼까 한다. 역시 늘그막에는 부동산이 좋지.”

어쩐지 요즘 경매 나오는 부동산들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투자 방법이 나쁘다고 볼 수 없었다. 확실한 수익실현이 가능한 것들이니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익과 이미지를 동시에 챙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시네요?”

“할애비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네 놈 일이나 잘 챙기거라 이건 그놈을 항상 경계해야 할 터.”

“예, 걱정하지 마세요.”

“오냐.”

***

카이그룹은 삼현, 대현, RG그룹과는 달리 특정 단체나 개인이 소유한 주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범국민적 기업 또는 국민들에겐 애착이 있는 기업이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법정 관리에 들어간 카이그룹의 우선협상 대상기업은 본래 대현이었어야 하나, 현재는 삼현과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카이그룹 인수합병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고, 지금 처음으로 협상이 이루어지는 자리에는 기자들이 동석하고 있었다.

어떻게 카이그룹을 운영할 것인가,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 따위의 쓸데없는 내용이 오갔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 내용이 가장 ‘주’가 될 수도 있으나 적어도 기업사냥꾼 ‘찰리 박’에게는 아니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IMF에 통화지원을 요청한바, 달러의 가치가 높게 치솟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해서, 우리는 카이그룹 인수대금을 전액 달러로 지불할 것임을 밝힙니다.”

정부의 관계자는 물론, 채권은행단의 인사들도 눈을 빛내며 찰리 박을 바라보았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카이그룹의 인수 비용은 최대 5조 원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5조 원 이상을 달러로 지급하겠다는 얘깁니까?”

“그렇습니다.”

잠시나마 찰리 박의 발언에 의해 장내가 웅성거렸다. 자연스럽게 삼현 이건 회장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언론사들만 아니었다면, 카이그룹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그가 먼저 얼굴을 비추는 일 따위는 없었을 터.

인수합병 책임자들을 따로 보내면 되었을 일에 굳이 참석한 이유는 정부 인사와 채권은행단 인사들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였다.

“또한 카이그룹의 부채를 성실하게 갚아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폭탄 발언이었다.

카이그룹의 부채 규모. 그것은 어떤 기업이 지고 가기에는 덩치가 과도했다.

범국민적인 기업을 삼현과 스카이인베스트먼트 외에는 누구도 인수하려는 의사를 내비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부채 규모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을 타이밍, 그러니 저 부채와 적자는 자연스럽게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부채를 모두 상환하는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10년, 10년을 약속합니다.”

장내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당장 영업적자를 메꾸기도 급급할 카이그룹의 부채를 10년 안에 갚겠다는 얼핏 믿기 힘든 말을 내뱉은 찰리 박.

자연스럽게 장내의 모든 시선이 삼현의 꼭대기, 이건 회장에게 쏠렸다. 과연 그가 제시할 청사진은 무엇인지 궁금한 모양.

이건은 평상시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 오늘은 서로가 얼마나 ‘인수합병’에 적극적인지를 보는 자리입니다. 우리 삼현은 총력을 기울여 카이그룹에게 더 나은 세상이 찾아오기를 희망합니다. 허니,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 하지요, 스카이인베스트먼트 측의 의지는 잘 알았습니다.”

에둘러 발언을 피하는 이건에게 찰리 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삼현이 제시한 청사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글쎄요, 우리는 누구와 다르게 쉽게 얘기하는 걸 지양하는 편이라 그렇습니다.”

“의도를 감추시겠다?”

쾅!

“발언을 삼가세요!”

이건의 옆에 앉아있던 삼현그룹 전략기획실장의 호통 소리에 자연스럽게 기자들은 셔터를 눌렀다.

“다음에 또 봅시다.”

이건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자연스럽게 상견례 자리는 막을 내렸다.

주변의 시선이 사라진 이건의 차량 안.

“하! 저 미친놈들이 도대체 카이그룹에서 무엇을 봤기에?”

옆자리에 동석한 전략기획실장 우희석이 말했다.

“회장님, 놈들이 제시한 조건이 진짜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국 놈들이야 워낙 허풍이 심하지 않습니까?”

“쯧, 채권은행단 놈들 눈을 반짝이는 걸 못 봤나? 달러라는 말에 군침을 줄줄 흘리던데? 정부의 개는 뭐 다르고?”

잠시 뜸을 들이던 우희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굳이 카이자동차를 탐내시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쯧, 네 놈도 아직 멀었어.”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이건의 대답을 기다리는 우희석.

“자동차는 규모의 경제효과가 크지, 또 앞으로 하이테크놀로지 산업들이 발전할거야, 그럼 이동수단은? 당연히 하이테크놀로지가 될 거라고, 당장의 부채나 적자규모가 중요한게 아니야 더 먼 미래에 어떤 놈이 되어 돌아오느냐가 중요한거야. 또한, 자동차 한대에 들어가는 부품이 한 둘이야?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삼현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내리는 작업에 꼭 자동차란 놈이 필요한거야, 이해했어?”

숨도 쉬지 않고 설파하는 이건.

전략기획실장은 존경스럽단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해했습니다.”

“쯧, 정확하게 기업가치 분석하고, 앞으로 성장 가능성 분석하고, 성장 방향 가져와.”

“예! 회장님.”

차량이 출발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고, 이건 회장은 물끄러미 우희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의중을 눈치챈 우희석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저는 바로 회사로 들어가겠습니다.”

“일 봐.”

“예, 회장님.”

차량에서 우희석이 내리고, 그 자리에 남종현이 올라탔다.

“아직도 못 찾았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하! 미친놈들이 내 돈을 고아원 따위에 뿌려? 노숙자들 목구멍에 내 피 같은 돈을 쑤셔 넣어?”

“······”

“그 망할 표식이 뭔지는 아직도 못 찾았어?”

“죄송합니다. 어디에도 그 표식을 사용하는 단체는 없었습니다. 또 금괴가 유통되는 일도 없어 놈들을 찾을 길이 요원합니다.”

“종현이 네 놈이 결국은··· 내 사재를 털게 만드는구나.”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후우··· 카이그룹 처분에 관해서 연관된 인사들 명단 뽑아 와.”

“예!”

***

오랜만에 천가키즈를 둘러보기 위해 파주에 나왔다. 과연, 김장원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의 아이들은 활발하고 쾌활해 보였으며 순수한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야, 건강해 보이네요 아이들이.”

“아따 기운덜이 장사 저리가라 합니다.”

확실히 꽤나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의 탈의를 한 채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몸은, 잘 훈련된 군인들 못지않았다.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은 없죠?”

“잉, 정호석 실장님이 아그들 정신까지 싹 다 조사해서 선별한 아그들이라 그런 일은 일절 없습니다. 알아서 다 해부는 놈들이 태반입니다.”

“좋네요.”

“아따 호랭이도 아니고, 마침 저기 오시네요잉?”

고개를 돌리니 정호석 실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건 회장이 채권은행단과 정부 인사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재를 털기 시작한 모양이네요.”

곧 죽어도 부채를 제 손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을 테다. 인수 금액은 우리와 비슷한 규모로 부르더라도, 7조가 넘어가는 그 부채는 어떻게든 제 돈이 아니라 나랏돈으로 채우고 싶었을 터.

“예상이 빗나가질 않네요.”

“슬슬, 찰리 박한테 내가 말했던 통신, 전자 사업들에 가지를 뻗으라고 하세요, IMF에서 들어오는 1차 기금을 시작으로 한 번에 인수 할 수 있도록.”

“예!”

이건은 알까?

스카이인베스트먼트는 애초에 카이그룹을 꿀꺽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말이다.

사실 현 시국의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은 모두가 부실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도하게 덩치만 키웠고 그 덩치를 지탱하는 코어 산업 하나가 핵심인 경우가 많았다.

코어가 약하면 밸런스가 무너져 넘어지는 저기 저 어린아이들처럼.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그랬다.

카이그룹의 ‘자동차’란 코어는 이미 쇠락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맛있는 먹잇감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 스카이인베스트먼트는 부채까지 탕감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당연히 카이그룹을 먹었을 때 돌아오는 리스크가 크다.

애석하게도 난 리스크를 다 받아들이는 호구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얻고, 필요 없는 것은 버릴 생각이다.

양복 재킷을 벗었더니 김장원이 그것을 받는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잉? 아따 대표님도 뛰실라고 그라십니까?”

“예, 축구를 좀 좋아해서요.”

“하하하, 아그들이 좋아하겄네요.”

“나중에 우릴 위해 힘쓸 인재들인데 친해지는 것도 좋잖아요?”

픽 웃은 김장원이 어딘가로 손짓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늑대 한 명이 다가왔다. 얼굴 가득한 칼자국이 꽤나 위협적이게 보이는 사내였다.

“아야, 우리 대표님 옷이랑 내 옷, 여그 정 실장님 옷까지 잘 챙겨 놔라잉. 그리고 운동화 몇 개 가져오니라, 암만혀도 구둣발로 뽈 차는 것은 아니제.”

***

12월 3일.

기다리던 날이 되었다.

정부와 IMF가 최종 협상을 끝냈고, 온 국민과 전 세계에 발표하는 날.

난 뉴스를 보며 바로 전화를 들어 올렸다.

“인수 진행하세요.”

전화를 받은 찰리 박이 말했다.

-이제 시작이군요.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공격적으로 인수하세요, 적정가치를 조금 웃돌아도 상관없습니다.”

-예!

“언론과 한 몸처럼 붙어 다니세요, 그래야 삼현도 똥줄이 탈 겁니다. 카이그룹은 확실히 모체 자동차 쪽으로 부채가 몰렸죠?”

-예, 그렇습니다.

“좋네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추운 겨울에도 굳이, 두꺼운 담요를 덮고 바깥에서 일광욕하는 할아버지.

“춥다더니 나왔느냐?”

“저도 볕 좀 쐬려고요.”

“얼마나 지원받는다더냐?”

“550억 달러입니다.”

“많구나··· 다 갚기까지 오래 걸리겠어.”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더 큰 도약이 기다리겠죠.”

“하하, 좋은 말이구나.”

“곧, 많은 금융사가 도산할 겁니다. 은행도 예외는 아니죠.”

“그렇겠지.”

“대한금고도 1금융으로 올라설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준비하고 있다.”

피식 웃으며 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 날아가느냐?”

“날갯짓의 시작이죠.”

“날갯짓이라··· 하하하, 그룹명은 무엇이냐?”

“SKY그룹입니다.”

“우리 천가가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에이~ 조선 시대에 벼슬도 했었잖아요?”

“쯧쯧 어떤 놈들은 이 대한민국에 하늘 천 자를 쓰는 ‘천’씨는 없다고들 말하지, 무식한 놈들같으니라고. 천방지축마골피란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우리를 심지어 천민처럼 대하기도 했단다.”

“천 씨가 얼마 안 돼서 그렇겠죠.”

“SKY그룹이라, 좋구나!”

품에서 쓱, 그림 하나를 꺼내어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종이 안에는 푸른 구름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SKY라고 적혀 있었다.

“음? 하하하하하. 이놈, 이건 그놈이 뒷목 좀 잡겠구나.”

한참을 웃던 할아버지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고는 말했다.

“헌데 굳이 벌써 모습을 드러내느냐?”

“분노는 때론 사리 판단을 좁게 만들죠.”

“오호라, 분노하길 원하는구나 뭔가를 감추고싶은게야··· 오냐 알아서 하거라, 네 놈 안전은 이 할애비가 책임 질테니.”

“네, 할아버지만 믿을게요.”

“이제 구름에 가려져 있던 잠룡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과연 기대하고 있으마.”

“예, 매일매일이 다를겁니다.”

< 제 40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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