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3 이부 일장 - 출두, 만남 (13)
* * *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관계, 즉 연인이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삶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다.
목리원 또한 그랬다.
“묵룡! 승!”
“와아아아아!!!”
청룡비무회가 한창 이어지는 중이다.
오늘 역시 목리원의 경기였고, 결과는 당연한 승리.
그렇게 함성에 손을 흔들어주며 퇴장한 목리원을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당화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당화서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그녀는 이렇게 매 순간을 목리원과 함께하고 있었다.
단순히 생활을 함께하는 게 아니다.
개막전이 끝난 그날 이후 목리원의 거처는 당문의 장원이 되었고, 그가 가는 길은 곧 당화서가 가는 길이 되었다.
물론 잠자리를 함께하는 정도는 아니나, 정말 그 외에 아침 식사부터 잠들기 전까지 모든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니,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소문은 나날이 깊어지기만 했다.
좋긴 하나 부끄럽다.
그것이 목리원의 생각이었다.
목리원은 아직 남들의 염장을 질러대는 일엔 면역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화서의 생각은 달랐다.
‘확실히 못 박아 둬야지.’
이렇게 목리원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당화서에게도 있었다.
‘불여우 같은 것들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원.’
7년 전부터 그랬다.
목리원에겐 그 무재만큼이나 대단한 재주가 하나 더 있지 않던가.
‘이렇게까지 잘 생길 건 또 뭔지.’
얼굴이었다.
목리원은 잘생겼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본인은 크게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 얼굴로 헤프게 웃고 다니면 휘청거리는 여인들이 거리에서 심심지 않게 보일 정도다.
그 정도 얼굴에 무재까지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로 뛰어나니 명가의 여식들은 아직도 목리원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얼마 전 모용 가에서 주최한 연회에 들렀다, 우연찮게 들은 말이 있지 않던가.
-아직도 묵룡 대협을 노리니?
-그럼, 내 수준에 맞으면서도 데릴 사위로 들일 수 있는 사내가 또 어디 있어? 목숨 걸고 꼬셔야지.
-하지만 묵룡 대협은 당문주님이랑….
-얘가 뭘 모르네.
그래, 팽가의 여식이었다.
올해로 스물 둘이 된 한창 때의 아이.
기억하기로는 7년 전 용봉지회 때도 마수를 뻗쳐 왔었지.
당화서는 아직도 그 불여우가 비릿하게 웃으며 내뱉은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뺏어먹는 게 제일 맛있는 법이거든.
‘먹긴 뭘 먹어?’
뿌드득, 당화서의 이가 갈렸다.
대관절 주제도 모르는 계집이었다.
하북팽가에서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도 꽤 괴로운 꼴을 보게 해줄 수가 있었는데, 안타깝기도 했다.
‘것보다 데릴사위는 무슨.’
팽가의 데릴사위가 되면 팽리원이다. 그게 어디 사람 이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당리원이 낫고, 그것보단 역시 목리원이 제일 나았다.
목리원의 성씨는 목선오의 성씨다.
당화서는 목리원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성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었다.
사고방식부터가 다르단 말이다.
목리원과 목리원의 삶을 존중할 줄 아는 너그러움이 중요한 것을.
“소, 소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아닙니다.”
“…알겠소.”
표정이 너무 험악했던 걸까, 목리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섞으려고 끙끙대는 모습까지 보니 그 어여쁜 행동에 화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잠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 그랬소?”
“이제 되었으니 가지요. 오늘도 모임이 있지 않습니까.”
당화서는 목리원의 팔을 휘감았다.
목리원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어서 갑시다.”
전 용봉단 단원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다.
위치는 용봉단의 전각이었고, 오늘은 단이 해체되며 당문의 숙수로 이직한 전 용봉단의 숙수가 직접 요리를 해주러 오는 날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구려. 내 사실 폐관 중에도 그분이 해주신 밥이 참 그리웠다오.”
“그러실 것 같아서 모셔 왔었지요.”
사내를 잡으려면 입맛을 사로잡아야 한다지 않덥니까.
요리에 재능이 없는지라 재능있는 이를 돈으로 매수했습니다.
뒷말은 삼켰다.
당화서는 그저 웃는 낯으로 목리원이 맘껏 기뻐할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그렇게 전각에 도착했다.
“목 대협, 오랜만이오.”
나이 지긋한 숙수는 반갑게 목리원을 맞이했다.
그 곁엔 제 주먹만 한 만두를 꼭 움켜쥔 채 우물우물 뺨을 움직이는 남궁영이 있었다.
“삼촌이다!”
“인석아, 먹으면서 말하면 안 된다.”
껄껄 숙수가 웃자 남궁영이 배시시 따라 웃었다.
밥 주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고 애교를 부리다니, 역시 눈치 없는 남궁진천과는 다른 면모가 보였다.
남궁영은 서예를 더 닮은 게 확실했다.
“자, 마침 요리가 끝나가던 참이오. 어서 들어가시구려.”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로, 나야 옛날 일 생각나서 좋기만 하다오. 가주님께 감사하오.”
빈말이 아님은 숙수의 미소로 바로 알 수 있었다.
당화서는 쿡쿡 웃으며 남궁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꾸나.”
“웅!”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감각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이 작은 크기가 보호욕을 자극하는 건지, 저 해맑은 미소가 그리하는 것인지 당화서로선 잘 모를 일이었다.
다만 깊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외면하려는 본능일지도 몰랐다.
“왔구먼.”
제갈산이 가장 먼저 반겼다.
그 옆으로 남궁진천과 서예가, 일운와 혜운이 있었다.
다들 밝은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16강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옛저녁에 탈락한 당화서와 아예 참가하지 않은 제갈산을 제외한 용봉단 전원이, 청룡비무회의 16강에 들어갔다.
*
이변이라면 이변이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다음 세대의 주인으로 묶여 분류된 게 용과 봉이다.
개중 용봉단은 마교의 첩자였던, 이젠 마룡(魔龍)으로 불리게된 사마공을 제외한 전원이 몰려 있던 집단이다.
시대 또한 좀 풍파가 많았던가.
마교와의 전쟁, 그 선봉에 서서 목숨이 오가는 생사결을 통해 경험을 쌓았으니, 평범한 무인들과는 성장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가장 나이가 많은 남궁진천조차 20대에 머물러 있는 최연소 초절정의 집단이 된 것이다.
물론, 그리 생각해도 역시 전원 16강은 고무적인 성과다.
당화서가 생각하기엔 특히 혜운이 의외였다.
“끄어어… 취한다!”
눈처럼 새하얗던 혜운은 벌써 술에 만취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행동 또한 7년 전과는 다르게 내숭이 배어 있지 않았다.
도왕 진건의 밑에서 7년 간 수련을 받았다던가.
그 시절을 겪으며 인 변화였다.
“생각하니까 또 화나네.”
혜운이 축 늘어졌다.
본새를 보니 진건과 관련된 불만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욕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 인간이 얼마나 지독한 줄 알아요? 수련은 개뿔이, 맨날 노름에 계집질이나 하면서 돈을 다 탕진해요. 그렇게 빚 때문에 여기저기서 쫓아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내가 상대하게 한단 말이야.”
“그, 그랬구려….”
“말이 좋아 비무행이지 그냥 생사결이었어요! 흑도의 초절정 고수까지 왔었다니까? 아니, 흑사련주도 있었네!”
쾅!
혜운의 눈 위로 핏발이 섰다.
“흑사련주! 그 미친놈이 돈 받겠다고 직접 나와서…!”
“애 앞이다. 말을 가려라.”
“미찌노미!”
“딸, 그런 거 배우는 거 아니다.”
“웅!”
빠드득, 혜운의 이가 갈렸다.
차마 남궁진천을 쏘아붙이지 못하는 것은 품에 안긴 남궁영 때문이었다.
아이는 위대했다.
저 혜운조차 말을 조심하게 만드니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일운은 겉으로 보면 전과 다르지 않았다.
7년 전 그날처럼, 날뛰는 단원들을 옆에서 달래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 중이었다.
“16강이 무슨 대수인가.”
남궁진천이 말했다.
술잔을 가만 들고 휘휘 젓다가, 다시 상 위로 내려놓은 남궁진천은 목리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내게 중요한 것은 결승뿐이다.”
그 시선에 담긴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 시작이네.”
혜운은 투덜거리며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리원은 남궁진천의 시선을 유유히 받아넘기며 말했다.
“이번에도 결승에서나 만나겠구려.”
“좋은 무대지.”
기이하다면 참 기이한 연이다.
처음 두 사람이 맞붙은 자리는 용봉지회의 결승, 두 번째 청룡비무회는 무산으로 돌아갔고, 이번 역시 어찌하다보니 대진표가 결승에서 만나는 것으로 잡혀버렸다.
“올라와라.”
남궁진천은 그리 말하며 술을 들이켰다.
시리도록 냉막한 벽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눈동자에 깃든 것은 활화산 같은 투기였다.
목리원은 지그시 웃었다.
그의 투기가 못내 기껍다는 듯한 미소였다.
“말을 잘못하셨소. 검룡 형.”
“….”
“‘올라와라’가 아니라 ‘올라가겠다’라고 말하셔야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하나, 그 뜻은 명백한 자신감이었다.
“이젠 내가 더 높은 경지에 있지 않소.”
남궁진천의 입매가 비틀렸다.
“도발인가?”
“도발이오.”
“그거 안 됐군.”
뿌득, 남궁진천이 쥐고 있던 술잔이 으깨졌다.
“나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짝!
서예가 남궁진천의 등짝을 쳤다.
“잔을 깨면 어떡해요?!”
“어떠케!”
남궁영이 꺄르르 웃으며 서예의 말을 따라했다.
남궁진천의 눈에서 투기가 사라졌다.
목리원은 생각했다.
‘잡혀 사시는구려.’
남궁진천은 아직도 잡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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