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33화 (233/334)

EP.234 이부 이장 - 후기지수 (1)

* * *

휴식기였다.

16강을 앞두고 일주일, 본격적인 무대를 앞둔 무림맹은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일말의 여유 기간을 선포했다.

그에 목리원은 당문의 장원에서 가주로서 업무에 한창인 당화서를 보조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보조라 해서 별달리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 좀 마시고 하시오.”

“고맙습니다.”

당화서의 찻잔이 비면 새로 차를 따라준다거나 다과가 다 떨어져가면 채워준다. 새로 문서를 가져달라 말하면 정리해 가져다주거나 처리한 문서를 소향에게 전해달라 하면 대신 정해주는 정도.

잡일을 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소향에게 보고서를 넘기고 다시 복귀하고자 몸을 돌리는 순간, 목리원의 눈에 책상 위로 놓인 문서의 제목이 보였다.

“용봉지회…?”

“아, 그것 말입니까.”

문서의 제목은 [용봉지회 수상자 명단]이었다.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라 괜히 시선이 가니 소향이 설명했다.

“용봉지회도 한동안 열리지 않았었습니다. 작년을 기점으로 다시 열리기 시작했는데, 전 용봉들이 죄다 실종되거나 더 이상 용봉으로 부를 수 없는 지위에 올라버린 터라 새로 인물들을 뽑아야 했지요. 그 명단입니다.”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화서와 제갈산은 이제 가주의 직위에 오른 만큼 용이나 봉 따위로 불릴 수가 없게 됐다.

일운은 듣기론 소림에 새로운 배분이 들어오며 더 높은 직위로 올라버렸고, 혜운과 남궁진천, 그리고 목리원 본인은 7년 간 중원 강호를 떠나있었다.

“한 번 봐도 되는 것이오?”

“예, 어차피 목 대협이 보셔야 하는 정보입니다.”

“응?”

“일단 보시지요.”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호기심이었다.

부끄러운 속내를 조금 말해보자면 후배들이 아닌가.

나름 묵룡이라는 이름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졌던 만큼, 다음 대 용봉은 목리원에겐 후배 기수나 다름없단 말이다.

나이를 먹어도 좀처럼 철이 들지 않는 것이 사내라, 후배들 앞에서 에헴에헴 헛기침이나 할 생각에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 정확히 명단을 펼치기 전까지 이어졌다.

촤륵―

하나같이 살벌한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1위 : 광룡(狂龍) 백경오.

2위 : 잠룡(潛龍) 언혁.

3위 : 무봉(武鳳) 남궁소아.

4위 : 삭룡(削龍) 모용진.

5위 : 흑봉(黑鳳) 강서휘.』

“….”

“별호들이 살벌하지요?”

“익숙한 이름도 있구려.”

“예, 검룡의 누이가 있지요.”

“내 알기로는 나이가….”

“올해로 열다섯입니다. 그럼에도 3위인 것이 남궁가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지요.”

“열다섯이란 말이오?”

분명 7년 전에 봤을 때는 대여섯이 겨우 되어 보이는 덩치였다.

하여 나이도 그 정도에 머무를 줄로만 알았다.

한데 15세라니, 그렇다면 당시에는 8세였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하는 중 소향이 말했다.

“그 아이 앞에서 덩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키가 작은 것을 상당히 신경 쓰는 아이라.”

“만나본 적이 있나 보오.”

“그 작년 용봉지회가 사천에서 열렸으니까요.”

과연, 용봉지회는 해마다 개최지가 바뀌었었지.

“아무튼, 이걸 목 대협이 알아야한다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음?”

“그 아이들로 용봉단을 다시 꾸릴 겁니다.”

목리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 그게 정말이오? 어째서?”

“실적이 좋았으니까요. 물론 목 대협이 있는 기수가 워낙 특출났던 것도 있지만, 마교와의 냉전 상태에 흑도가 날뛰는 시기이니 상징으로 내밀 아이들이 필요했습니다. 다음 세대의 주역들. 꽤 좋은 이름이 아닙니까.”

이해는 되는 말이었다.

아무렴, 7년 전 최초의 용봉단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지 않던가.

“맹과 구파, 그리고 세가 간의 긴밀한 협력 체제를 위해 지어진 단이라 해도 할 말은 없지요. 중요한 건 유용하고, 그런 만큼 기수를 만들어 이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랬구려….”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중이었다.

돌연 소향이 말했다.

“그 새로운 용봉단, 한동안 목 대협이 이끌 아이들입니다.”

목리원의 고개가 기울었다.

“응?”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

곧장 당화서를 찾아가고 나서야 목리원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용봉단의 운영방식이나 임무 방식에 대해 깊이 아는 건 전대 용봉단원 밖에 없지 않습니까. 한데 다들 제 소속이 있으니 소거법으로 목 소협이 단장이 되는 것입니다.”

전대 용봉단 중 이렇다 할 소속이 없는 것은 목리원이 유일했던 것이 이유였다.

목리원은 조심스레 물었다.

“…거부권은 있소?”

“음? 의외군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물론 후배들을 이끄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오. 한데 내가 실무능력이 좀 없잖소.”

25세의 목리원은 열정과 현실이 언제나 어울려주지 않음을 알았다.

단장직으로 후배들을 이끈다는 것은 참 구미가 당기긴 하나, 서류처리나 어려운 정치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으니 더 적합한 자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듯했다.

“거부권은 없습니다. 애초에 그 자리는 제가 추천한 것이니까요.”

의외의 말이 또 나왔다.

“으음?”

“마음 같아서야 목 소협을 당문에 데려가고 싶습니다. 평생 감그… 아니, 크흠! 매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무언가 들려선 안 될 말이 들린 것 같은데.

눈을 좁히는 중에도 당화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호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한 것이 현 강호고, 목 소협 같은 인력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게 무림맹인 만큼 이번은 제가 양보하는 것이지요.”

라고 말한 당화서는 이어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목 소협, 무명을 더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협객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이제 슬슬 성장을 증명해 별호를 갈아치울 때가 됐지요. 용의 칭호가 대단할 나이는 이미 지났답니다?”

“이런….”

피식, 목리원은 웃음을 흘렸다.

당화서의 의도를 알게 된 것이다.

“배려해주신 것이구려.”

용과 봉은 유망한 후기지수에게 붙는 별호였다.

즉, 더 이상 유망하지 않은 나이에도 그 별호가 붙어있는 것은 일종의 불명예와도 같은 것이다.

나이가 차올랐음에도 유망주의 별호를 쓴다는 것은 곧 성장하지 않았다거나, 눈에 띄는 수준의 업적이 없었다는 말이니 말이다.

“끄응… 열심히 해보겠소.”

서류처리는 여전히 자신 없지만 당화서가 준 기회를 허투루 날릴 생각은 없었다.

당화서의 말대로, 목리원은 더 이상 서투름이 용서되는 후기지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 비무회가 끝나고 나면 한동안 이별이겠구려.”

당화서는 당문으로 돌아가겠지.

그리 판단하고 말한 순간이었다.

“음? 누가 그럽니까?”

“응?”

“저도 여기 있습니다만.”

목리원은 눈을 끔뻑였다.

당화서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말했다.

“이 장원, 제가 제 돈으로 산 겁니다. 언제까지 있어도 상관없고, 업무는 볼 수 있지요. 급한 일이 생긴다면 사천으로 가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뭐.”

당화서가 목리원의 손을 감쌌다.

“제가 목 소협을 두고 어딜 갑니까.”

스르륵, 손등을 쓰는 움직임에 목리원은 등골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흐읏…!”

그저 손등이 닿은 것일 뿐인데 어째서?

목리원이 속으로 의문을 토하는 중, 당화서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목리원은 모를 터였다.

독라나찰 당화서의 성명절기나 다름없는 독은 상대가 당한 줄도 모르게 퍼져,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당화서는 그 독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과 몸이 닿을 때만 목리원의 감각이 예민해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길게 이어지면 다른 계집과의 접촉으로는 허전함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른바, 쾌락조교였다.

*

그날 오후 목리원은 제갈산을 만났다.

새로 용봉단에 입단할 후배들이 이 휴식기에 무림맹으로 온다는 말을 들은 까닭이다.

“다들 어떤 친구들이오?”

“음, 특이하지.”

전대 가주였던 제갈벽이 반신불수가 된 이후 내도록 가주직에 있던 제갈산이다.

즉, 후배 기수에 관한 걸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남궁 형 누이는 알 테고, 나머지를 말하자면 말일세.”

긁적긁적, 제갈산은 관자놀이를 긁다가 해맑은 얼굴로 그리 말했다.

“음, 별난 아이들이지. 남궁 형이 다섯 명이네.”

목리원은 귀를 의심했다.

“그게 대체 무슨 끔찍한 말이오?”

“남궁형만큼 별나고 자존심 쎈 아이들이 다섯이란 말일세.”

목리원은 상상했다.

다섯의 남궁진천이 한 자리에 모여 기 싸움을 하는 광경을.

-내가 제일 강하다.

-도발인가?

-네놈은 애미가 없는 겐가?

-닥쳐라 창녀야.

-연무장으로 따라 나와라.

흠칫,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 내가 도망가면 어떻게 되오?”

“글쎄, 모르긴 몰라도 누님이 가만히 있진 않겠지.”

“….”

“힘내시게.”

목리원은 자신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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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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