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02화 (202/334)

EP.203 이십장 - 충돌, 격류 (9)

* * *

콰아아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힌다.

그 위를 두른 강기와 강기가 드잡이질을 한다.

남궁혁은 헛숨을 들이켰다.

‘잠력(潛力)을 폭발시킨 건가.’

남궁혁은 이런 현상을 알고 있었다.

심장을 손끝으로 꿰뚫어 마기를 폭발시키는 이것은 이미 18년 전, 혈천교와의 전쟁에서 겪은 바가 있는 까닭이다.

‘역천혈기공(逆天血氣功)…!’

저것은 혈천교의 주구들이 최후의 순간에 동귀어진을 위해 사용하던 수법이다.

이것을 왜 천마신교의 장로인 그가 알고 있는 것인가.

의문은 순간이었고 생명의 위협은 길었다.

생존을 위해 남겨뒀어야 할 모든 기운을 검에 담아낸 귀명검은 실로 강력했다.

“신교에 영광을!”

꺄아아아아악―!

귀신의 울음소리가 협곡 전체를 울린다.

귀명검의 오른팔을 감싼 마기가 전신을 뒤덮는다.

직후, 짧은 순간 귀명검의 신형이 흔들렸다.

서걱!

남궁혁의 왼팔에 긴 자상(刺傷)이 남았다.

자상 정도로 끝난 것은 그 순간 남궁혁이 본능적으로 검을 방어한 까닭이었다.

휘릭, 귀명검이 남궁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간 전체를 뒤덮은 귀신의 울음에 녹아들어 사방에서 짓쳐 들기 시작했다.

콰과광!

남궁혁의 강기를 모두 깎아내겠다는 듯 공세는 거칠었다.

남궁혁의 이가 꽉 물렸다.

“더러운…!”

마교의 주구 따위가, 감히.

남궁혁이 검을 가로로 길게 그었다.

쿵!

공력에 공간을 휩쓸던 울음소리가 순간 잠들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남궁혁은 내내 흐릿하던 귀명검의 신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 남궁혁이 발을 내디뎠다.

짙푸른 강기에 휘감긴 검 끝이 귀명검을 향해 쏘아졌다.

귀명검의 마기가 그것을 막는다.

다시 한번, 남궁혁은 발을 내디디며 올려베기를 시전했다.

이 역시, 귀명검이 마기를 흩뿌려 막아냈다.

“왜 그러는가.”

귀명검이 조소한다.

“제왕은 걷지 않는다더니, 벌써 두 걸음이나 옮겼구나.”

남궁혁의 이마 위로 핏대가 솟았다.

도발이다. 이따위 것에 넘어가 줄 정도로 남궁혁의 경험이 적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떠올리는 것은 ‘이길 방도’에 관한 것이다.

남궁혁은 겸허히 인정했다.

생명을 불태우는 저 사내를,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후우….”

남궁혁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이다.

남궁혁도 알았다. 방법이 없진 않았다.

“아느냐.”

입을 열었다.

“나는 검무(劍舞)가 싫다. 그 방정맞은 움직임이 싫고 쓸데없는 허수가 싫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무리가 싫다. 위엄이 없기 때문이다.”

길게 이어지는 말과 함께 남궁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도 싫어하는 검무로 자신을 넘어섰던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걷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선 자리에서 군림한다. 하나….”

그런 자존심을 내려두어야만 하는 상황이란 것이 있음을, 남궁혁은 알았다.

“…나의 자존심보다 중요한 대의가 세상에 존재함을 안다.”

“대의라.”

“중원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을 앞두고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안다. 그것이 협의(俠義)임을 안다.”

군림하는 자는 곧 울타리가 되어 주는 이다.

거대한 힘은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

그렇기에, 남궁혁의 협의는 힘에 있었다.

남궁혁이 검을 고쳐 쥐었다.

귀명검의 눈이 좁아졌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네놈이.”

귀명검의 신형이 또 흐려졌다.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욱 께름칙해진 귀신의 울음소리와 함께.

남궁혁은 언제 짓쳐들지 모르는 그를 예의주시하며 진각을 밟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리도 싫어했고, 아직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검무(劍舞).”

남궁혁의 몸이 한 바퀴 돌았다.

키이이이이잉―!

순간 짙푸른 강기가 검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며 어떤 궤적을 그렸다.

투둥, 하고 귀명검이 흩뿌린 검풍이 튕겨져 나갔다.

남궁혁은 기뻐하지 않았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무학인 까닭이다.

‘쫓고자 했다.’

언젠가, 목선오가 강호를 떠난 후 홀로 그를 이길 방법을 고심하며 일탈했던 일이 있었다.

암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그를 쫓기 위해, 그를 흉내 내려 한 일이 있었다.

제왕으로의 자존심도, 검으로 이뤄내자 한 이상도, 그리고 쌓아온 무학도 모두 벗어던진 채 기억 속 검로를 쫓으며 그린,

‘꺼내지 않으려 했건만.’

그렇기에 내놓을 수 없는 자식이었던 남궁혁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 존재했다.

“가거라.”

휘릭 검이 움직인 궤적을 따라 자리에 남은 강기의 파편들이 이윽고 비산한다.

그것은 공간을 점하여 자리하는 모든 것들과 얽혀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귀명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끄윽…!”

강기의 파편이 그를 휘감는다.

움직임을 봉하고 공력을 봉하며 끈덕지게 들러붙는다.

마치 놀아달라 칭얼대는 아이 같은 움직임으로.

하여 결국,

푸확―!

강기의 파편이 귀명검의 전신을 감싸 으스러뜨렸다.

털썩하고 귀명검이 쓰러졌다.

남궁혁은 쯧 혀를 찼다.

‘이래서 싫다.’

어찌 제왕의 검이 칭얼댈 수 있단 말인가.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 같은 검이라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무학에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검이었다.

“꽤 봐줄 만했다.”

남궁혁은 그리 말하며 귀명검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은 흐릿하게 풀리며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남궁혁은 이런 눈이 낯설지 않았다.

무인으로 평생을 살아 수많은 죽음을 마주했기에 알 수 있었다.

“주제에 좋은 꿈을 꾸나보구나.”

주마등을 바라보는 이의 눈빛이라.

마인 주제에 참 감상적이기 이를 데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남궁혁은 몸을 돌렸다.

굳이 목을 치진 않았다.

이미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숨이 끊어졌기에.

‘다음은 어디냐.’

남궁혁이 전장으로 돌아섰다.

*

원명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은 이미 성한 데 하나 없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고, 맑은 울림을 토해내던 공력은 삐걱삐걱 잡음을 내기 시작했다.

“꼴이 말이 아니시구려.”

마교의 2장로 백야흠이 말했다.

원명은 답했다.

“그러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씨익 웃으며 내뱉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원명과 마찬가지로, 백야흠 역시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백중지세.

그리 표현해야 할 상황이다.

원명으로선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강하다.’

어찌 맹인이 되어 저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마기를 다루는 이가 이리도 이성적인 검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원명이 아는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속에 무거운 책임감을 떠오르게 만드는 적이었다.

‘안 된다.’

이 사내가 전장으로 향하게 두어선 안 된다.

이곳에서, 설령 목숨을 다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서야만 했다.

원명이 합장했다.

공력은 다시 한번 본래의 울림을 찾으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계속 하실 생각이오?”

백야흠이 씨익 웃었다.

“여기서 적당히 빠지는 것 어떻소. 나는 오래 살고 싶은지라.”

“그리 둘 수 없겠소.”

“이유는?”

“살계를 열어버린 까닭이오.”

“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호오, 이 늙은이가 무라는 말로 들리오만.”

“내 생애 본 것중 가장 큰 무라오.”

“크허허!”

백야흠이 크게 웃었다.

“영광으로 알아야겠구먼.”

백야흠이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눴다.

“혹 부처께 여쭤볼 수 있소?”

“무엇을?”

“스님을 죽여도 부처가 될 수 있는지를 말이오.”

원명이 합장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황금빛의 공력이 전방으로 쏘아진다.

그것은 꼭 손바닥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백야흠이 빙글 돌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손바닥과 마기가 부딪히며 시야가 가려졌으나, 두 사람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여래신장(釋迦神掌)!”

백야흠이 껄껄 웃었다.

원명은 또 한번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공력이 뻗어나간다.

백야흠이 정면으로 부딪혀 온다.

“내 소림의 절기를 견식하게 되는구려!”

쾅쾅쾅 폭음이 인다.

쭉쭉 빠져나가는 공력에 원명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다행인 일이라면 백야흠 또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정도.

하나 백야흠의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는 듯 한발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눈이 안보이면 더욱 잘 느껴지는 게 있소!”

쾅! 하고 공력을 쳐내며 다가온다.

“다른 오감이 아닌 기감!”

또 한 걸음, 백야흠이 다가온다.

“느껴지오. 당신의 공력 속에서 번뇌가 느껴지오! 불안감이 있군! 처절함이 있어! 당신은 두려운 것이오! 내가 당신을 넘어 저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

옳은 말이었다.

부동심과 무욕.

“더러운…!”

그 두 가지를 본으로 삼아야 하는 불자임에도 원명은 아직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백야흠이 전장으로 향해 앗아갈 수많은 생에 불안감이 차올라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백야흠이 검을 휘두른다.

“무엇을 불안해하는 것이오!”

또 한 번 검을 휘두르며 다가온다.

그렇게 이윽고,

푸욱―!

검이 옆구리를 찌른다.

“결국 다 같이 스러질 생 아니오. 뭐 그리 애지중지하는 것이오?”

뜨인 백야흠의 눈꺼풀 아래, 텅 빈 눈구멍이 원명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음화 보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