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1 이십장 - 충돌, 격류 (7)
* * *
앞을 볼 수 없는 적.
하나, 그것은 원명에게 어떤 이점도 주지 못했다.
그가 초월(超越)인 까닭이다.
모든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의 기감을 가지고 있으니, 도리어 백야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삿된 현혹에서 구해줄 뿐이었다.
콰아아앙!
주먹과 검이 맞닿는 순간 원명은 깨달았다.
“중검(重劒)이구려.”
“맞네, 내 앞이 보이지 않으니 현란한 기교는 부릴 수가 없네. 그저 일격에 최선을 다할 뿐.”
“무인으로서는 찬사를 보내오.”
“무인으로서라?”
“인간으로서는 용서치 못한다는 말이오.”
원명이 싱긋 웃으며 강기를 몸 위로 덧씌웠다.
우우웅―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백야흠은 찢어질 듯 긴 미소를 지었다.
“자네, 그것 아나?”
“말하시오.”
“신교는 강자존으로 굴러가는 땅일세.”
“알고 있소.”
“그것은 우리 장로들도 마찬가지라네. 몇 번째 장로이냐는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한 무인인지를 나타내는 척도라 할 수 있지. 아, 물론 스스로 가장 낮은 수를 원한 별종도 있긴 하지만 말일세.”
“2장로라 하였소. 그럼 당신이 두 번째로 강하다는 말을 하시는 게구려.”
“안타깝게도 세 번째라네. 말했듯 별종 하나가 있는지라.”
검붉은 강기가 백야흠의 검 위를 뒤덮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무릇 마기라 하면 통제되지 않는 포악함이 가장 큰 특징일 터인데 그에게서 나오는 기운은 한없이 침잠하기만 했다.
마치 심연 속에서 가만 먹잇감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신중한 사냥꾼 같았다.
“여하튼, 내가 이 신교에서 3번째로 강한 장로라는 말일세.”
백야흠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끄흡!”
막아내던 원명은 혈도가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맞부딪혀선 안 된다!’
저 마기에 닿는 순간 기맥이 뒤틀리게 될 터다.
강기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오, 기파를 쏘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의 내상(內傷)을 입게 될 것이 자명하다.
“자네는 몇 번째인가?”
백야흠이 껄껄 웃으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
남궁혁은 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까지 달렸다.
바위 산맥 사이에 자리한 좁은 협곡,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오는 비명만이 이곳 또한 전장임을 알려주는 고요한 땅.
자리에 멈춘 남궁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인가. 7장로.”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정좌하고 앉은 노인이 있었다.
냉막한 인상에 비쩍 마른 몸은 무인의 것이라기엔 너무 하잘 것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7장로라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귀명검이라 하오. 이름은 없소.”
스르르 뜨인 눈꺼풀 아래, 뱀같은 눈동자에 서린 살기가 너무나도 짙었던 까닭이다.
“대화가 필요한가?”
“적을 아는 일 정도는 필요할 듯하오.”
“남궁혁, 그리만 알라.”
“말투가 오만불손하오.”
7장로 귀명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주님의 수족이 되는 장로요. 마땅한 예를 표하시오.”
“예라….”
남궁혁은 귀를 후벼팠다.
“세상 참 말세로군. 창부의 개새끼가 예의범절을 논하다니.”
“…무어라 하였소?”
“산에 처박혀 골목 대장 노릇이나 하는 창부 놈의 개새끼가 예의범절을 논하는 세태가 참 개탄스러….”
휘릭,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일었다.
남궁혁은 몸 위로 기막을 둘렀다.
푸른 기파가 몸 주변을 회전하며 쏘아진 검풍을 모두 쳐냈다.
채재재쟁!
“말을 들을 끈기조차 없나.”
남궁혁이 쯧 혀를 찼다.
귀명검의 눈이 부릅 뜨였다.
“감히.”
쿵!
그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감히, 감히, 감히! 중원의 버러지가! 위대한 신교의 뜻 앞에 공경을 표하지 않음이 옳은가!”
귀명검의 팔이 일순 남궁혁의 인지를 벗어난 속도로 움직였다.
이번엔 기막을 펼치지 못했다.
‘목!’
실전의 영역에서 쌓여온 경험이 부르짖음에 곧장 남궁혁은 검을 빼 들어 전방으로 휘둘렀다.
끼기긱―!
“흡!”
쏘아진 검풍엔 직전과는 다른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여 공력을 아꼈다면 곧장 목이 날아갔으리라.
남궁혁은 크게 뜨인 눈으로 귀명검을 바라봤다.
“무릎 꿇으시오.”
귀명검의 몸 위로 마기가 흘러나왔다.
검붉은 기운이 그의 오른팔을 감쌌다.
협곡에 불어오는 바람이 덧씌워진 마기를 스쳐 지나가며 소리가 인다.
끼아아아악…!
원통한 망령들의 울음소리와 한없이 닮은 소리였다.
남궁혁은 그제야 그의 별호가 귀명검(鬼鳴劒)인 이유를 깨달았다.
물론,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 살아오며 배운 게 있다.”
쿠구궁!
남궁혁의 공력이 협곡 전체를 내리눌렀다.
기경팔맥을 흐르며 언제나 남궁혁에게 초월적인 무리를 선사해주던 공력은 이번 역시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개새끼는 패야 말을 듣더군.”
남궁혁의 검끝이 하늘을 향했다.
“친히 손을 써주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남궁혁의 검이 단죄하듯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쾅―!
협곡 전체를 참수(斬首)하는 검이었다.
*
“막았는가.”
남궁혁의 목소리에 귀명검은 고개를 들었다.
서릿발같이 얼어붙은 눈빛이 고요하게 타올라 그를 응시했다.
“끝이오?”
“설마.”
남궁혁이 재차 검을 들었다.
귀명검은 전처럼 당해주지 않았다.
팔을 휘둘렀다. 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으로.
콰과과과광―!
검풍에 마기를 실어 전방으로 다 쏘아냈다.
협곡이라는 지형은 귀명검에게 그 어떤 전장보다 유리한 지형이었다.
귀명폭쇄(鬼鳴爆碎).
그의 성명절기는 검풍을 원거리로 연달아 쏘아내는 만큼 각 공격의 위력이 약한 까닭이다.
그러니 모든 공격을 한 방향에 집중할 수 있는 일자 지형이 좋다.
양 벽이 모두 막혀있으니 적은 검풍을 피할 수 없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마.”
귀명검이 존대를 그만뒀다.
신교의 장로로써의 품위를 위해 언제나 품행에 신경 쓰는 그가 예를 떨쳐내는 경우는 하나였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 결심한 순간이다.
오른팔을 휘감은 마기가 더욱 세차게 회전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씹어 삼키며 귀신의 곡소리를 토해낸다.
그 순간, 회전하는 공력의 보조를 받으며 귀명검이 다시 한번 팔을 휘저었다.
콰과과과광―!
정확히 일백 하고 서른두 번의 참격.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귀명검이 바라보는 방향의 전체가 난도질 당했다.
그 한가운데 남궁혁이 같은 자리에 선 채로 검으로 몸을 막고 있었다.
검막(劍膜)이었다.
“버틸 생각인가? 움직이지 않고.”
귀명검은 조소하며 물었다.
방심은 아니었다.
방심하기엔 남궁혁의 기색이 너무나도 고요했던 까닭이다.
그는 처음 이 자리에 온 순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인가?”
남궁혁이 물었다.
“궁지에 몰린 개새끼다운 발악이었다. 하나, 스스로 그리 자신했으니 이 이상의 무리는 보여야 이치에 맞다. 거듭 묻겠다.”
남궁혁의 공력이 다시 한번 공간 전체를 찍어눌렀다.
“끝인가.”
섬찟, 귀명검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허장성세인가?’
아니다.
그렇다기엔 공력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다만 위협으로 이만한 기를 쏟아내는 우둔한 자는 초월(超越)에 달할 수 없다.
귀명검은 적어도 그 사실만큼은 알았다.
“…숨겨둔 수가 있는 것이겠지.”
“숨긴 일은 없다. 드러낼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을 뿐.”
“오만하구나.”
“오만이 아닌 확신이다. 그것이 군림하는 자의 덕목이니.”
“고작 초월 따위로 군림을 논하는 것이냐.”
순간 남궁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귀명검은 그 반응을 눈치챘다.
그의 역린인 듯하다.
“…허.”
남궁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개새끼라 그런지 참 주제를 모르는구나.”
순간, 귀명검은 단전의 모든 마기를 풀어헤쳤다.
‘온다!’
직전의 일격과는 궤가 다른 수가 튀어나올 것은 그의 일그러진 낯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기가 혈도를 내달린다. 기경팔맥을 모두 꿰뚫고 세맥까지 미친 마기에 일순 이성이 흐려졌으나, 귀명검은 그것을 억제했다.
마기를 완전한 통제 아래 두고 정복하는 것.
그것이 마인의 초월이었다.
“원한다면 전력을 다해주마.”
귀명검의 몸 전체를 감싸 안은 마기가 이윽고 형상을 빚어냈다.
그것은 검붉은색으로 일렁이는 수십의 귀신이었다.
그들이 곡소리를 낸다.
개중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의 형상이 귀명검의 오른팔과 검을 쥔 손을 감쌌다.
“요란하기만 하구나. 개 짖는 소리 마냥.”
한껏 턱을 치켜 세운 채 내려다보는 눈으로, 남궁혁이 검 위로 강기를 덧씌웠다.
공간을 모두 짓누르던 공력이 그의 검 안에 깃들었다.
순식간에 가벼워지는 숨, 몸, 무게감, 그런 것들에 귀명검이 눈을 빛낸 순간이었다.
멈칫, 검을 휘두르려던 그의 손이 멎었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푸른 강기에 덧씌워진 검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아득하다.
황망함까지 떠오를 정도로, 저 검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세상 모든 만물을 압도한다는 생각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 이르니.”
남궁혁이 말했다.
“제왕(帝王)은 걷지 않는다.”
키이이잉―!
강기가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타올랐다.
“능히 선 자리에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까닭이다.”
검이 내리 그어진다.
시선을 빼앗았던 존재감이 이제야 현실로 닥쳐 귀명검을 일깨웠다.
아니, 그를 일깨운 것은 생존본능이었다.
“이노오오오옴!!!”
귀명검은 달려들었다.
스스로가 판단키로도 불길 속을 달려드는 나방 같은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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