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00화 (200/334)

EP.200 이십장 - 충돌, 격류 (6)

* * *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다.

사백운은 마련된 안채의 마루에 앉아 허벅지 위로 창을 얹은 채로 달을 바라봤다.

언젠가부터 큰 전투에 들어갈 때면 꼭 해내는 일이었다.

‘18년 만이구나.’

마지막으로 피가 튀기는 전투를 한 것이 그때였다.

혈사의 마지막 날, 혈마 단천화의 목이 떨어지고 검성 목선오가 강호를 떠난 날 말이다.

사백운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생사결을 한 일이 없었다.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떠올렸다.

‘내가 이리하고도 무인이란 말을 입에 담았구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이라.

맹주로서 자리를 지키고 중원 무림을 지키는 일은 물론 중요하나, 막상 전쟁의 순간이 되니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백운아, 싸울 수 있겠느냐.’

죽음이 두렵진 않다.

다만 적들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일이 두려울 뿐이다.

그간 꾸준히 수련을 해왔다곤 하나, 실전에서 결국 믿을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부디 허무하게 패배하지만은 않기를.

그는 그런 소망을 안은 채로 명상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중원의 전력 대부분이 신강의 경계로 몰렸다.

물경 수만에 달하는 대군이었고, 그것은 상대쪽도 마찬가지였다.

“정면돌파를 택했나 보구려.”

사백운이 말하자 내각주 견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참으로 마인다운 선택입니다.”

“무슨 의미요?”

“이지조차 상실해 사지로 파고든다는 의미지요.”

사백운은 피식 웃었다.

스스로의 무명조차 포기하고 백도 무림의 평온에 생을 바치는 사내.

그렇기에 마인을 용서치 못하는 사내.

그가 성정 그대로의 판단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내뱉으니 속에 자리한 불안감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내가 연설을 해야겠소?”

“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나, 오늘 맹주께선 무인으로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단상에 올라 목놓아 부르짖는 것보다 더 훌륭한 방편이 맹주께는 있으십니다.”

“선두에 서라는 말이로군.”

“예.”

“나를 사지로 몰아넣으실 생각인가 보오.”

“맹주께서 이런 곳에서 쓰러지실 분이 아님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각주께서는 어떻소.”

“무엇이 말입니까?”

“오늘 살아나올 수 있으시오?”

진중한 기색을 더한 질문이었다.

사백운은 알았다.

전쟁의 참혹함은 도통 사람을 가려가며 닥치는 법이 없다.

어떤 고강한 무인이라 한들, 또한 어떤 노련한 무인이라 한들 눈 먼 칼에 나자빠져 죽는 게 바로 전쟁인 것이다.

조금의 걱정, 그리고 신뢰에서 비롯된 도발이 바로 먹혀들어 갔다.

“맹주께선 저를 너무 얕보시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견궐은 특유의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또한 대가에 이른 무인입니다.”

“걱정말라는 말로 듣겠소.”

“걱정한 일에 사죄해주셔야 할 듯합니다.”

“그래, 내 내각주를 너무 쉽게 본 듯하오.”

사백운은 창을 어깨 위로 걸치며 앞으로 나섰다.

“돌아와 술잔이라도 함께 기울이지.”

그리 말하자 견궐이 뒤따랐다.

사백운은 걸음을 옮김에 따라 양옆으로 갈라지는 무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들 모두가 등을 맡길 동료고, 지켜야할 자식들이다.

백도 무림맹의 주인, 무림맹주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 직함이었다.

말없이 그저 무인들과 눈을 마주치며 나서다 보니 어느새 선두다.

그제야 사백운은 신강 너머를 바라봤다.

초월에 다다른 육신은 노쇠한 몸에 여전한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렇기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마귀들이 가득하구려.”

저 경계 너머 마찬가지로 만 단위의 전력이 몰려 있는 마교의 진영, 그 선두에 서 있는 소천마가.

“이제야 수모를 갚을 때가 되었소.”

후웅―!

창이 크게 휘둘러지며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청룡 비무회를 엉망으로 만든 마교의 주구를 보니 피가 끓는 기분이 인다.

“다른 말은 필요 없겠지.”

사백운은 그 말을 끝으로 외쳤다.

“돌격―!”

쾅!

사백운이 진각을 밟자 땅이 울렸다.

*

“원아, 너는 최대한 무인들을 지키는데 힘쓰거라.”

마일석이 말했다.

목리원은 황망한 얼굴을 만들었다.

“저도 선두에 서겠습니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움찔, 목리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일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깨달은 까닭이다.

천살성을 이르는 것이다.

이런 큰 규모의 전쟁에서라면 천살성은 이제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날뛸 것이다.

비단 그뿐이겠는가? 상대가 마인인 만큼 마기에 극마지체가 반응하여 조금만 칼을 잘못 휘둘렀다간 이지가 다 상실될 수도 있었다.

“…걸왕님.”

“패기는 좋다. 또한 정도를 위해 검을 휘두르겠다는 마음도 좋다. 하나 현실을 봐야 한다. 그것이 무인이다.”

마일석이 봉을 꽉 쥐었다.

“너를 돌봐줄 수 없다. 그 정도로 호락호락한 전장이 아니니.”

목리원이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 마일석은 전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리원은 이를 악 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또한 마냥 구경만 하라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목선오는 말했다.

전장은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완성되는 하나의 생물체와도 같다고.

다만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닌 아군을 보호하는 것 또한,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당장은…!’

참아내야만 했다.

*

콰아아아앙―!

폭음과 동시에 전쟁이 시작됐다.

양측의 병력이 크게 펼쳐지며 전장이 어지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만 단위의 병력이 펼치는 전쟁이니 난전의 양상이었다.

하지만, 역시 전장의 핵심이 되는 각 방위가 존재하긴 했다.

바로 초월지경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그들은 단지 초월지경의 무인들이 싸우는 장소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추풍낙엽처럼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그 정도로, 초월의 기운은 강렬했다.

“네놈이구나!”

도왕 진건은 핏발 선 눈으로 대도를 든 노인과 도를 맞대었다.

“5장로! 첩보로 들었다!”

“마교에 중원의 끄나풀이 있었나. 후일 책임을 물어야겠군.”

5장로, 무당을 전멸시킨 노인이 중얼거렸다.

진건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와 그가 행한 악업에 깊은 분노를 토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그리 여유로울 수 있을지 보지.”

끼기긱!

맞닿은 도가 뒤틀리며 께름칙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진건의 녹색 기파가 도 위로 결정화 되었다.

강기였다.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구나.”

5장로 또한 도 위로 검붉은 강기를 덧씌웠다.

“놀아보자꾸나.”

5장로가 입매를 비틀었다.

*

남궁혁은 원명과 함께 전장에 섰다.

“저쪽이다.”

“아미타불, 지독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려.”

“먼저 가겠나?”

“예의상 묻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원명은 지그시 웃었다.

검왕 남궁혁이 어떤 사내인지는 지난 세월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는 그였기에, 답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가십시오. 7장로라고 하덥니까. 그자가 저곳에 있을 터입니다.”

“쾌검수라 들었다.”

“구미가 당기시는 게지요.”

“잽싼 놈이니 자네에겐 힘드리라 생각했을 뿐일세.”

“굳이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보도록 하지.”

“예.”

“자네는….”

남궁혁이 말꼬리를 흐렸다.

원명은 합장하며 답했다.

“오늘만큼은 살계를 열어야겠지요.”

“굳이 걱정하진 않겠다.”

남궁혁은 검을 빼들며 숨막힐 정도로 마기가 흘러나오는 방향을 향했다.

“나중에 보지.”

쾅!

남궁혁의 신형이 순식간에 점이 됐다.

원명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운아.”

“예, 방장님.”

“너도 가거라. 명심해야 할 것은….”

“부동심이겠지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일운의 기운이 멀어졌다.

그제서야 원명은 얼굴 위로 웃음기를 지워냈다.

온통 비명소리가 들려옴에 전쟁터의 참혹함이 피부 위로 닿는 까닭이었다.

‘결국 이리 되었구나.’

부처께선 이 늙은 몸을 난세에나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인지, 못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원명은 고개를 들었다.

남궁혁이 떠나간 곳과 정반대 방향.

역시 초월에 이른 마인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가보자꾸나.”

원명은 천천히 걸었다.

상대의 기운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 까닭이다.

그 또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 걷고 또 걸어 진영의 외곽으로.

향하는 모든 공격을 기막으로 튕겨내며 자리에 도착한 원명은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오셨는가.”

그는 두 눈구멍이 텅 비어있는 노인이었다.

머리칼은 봉두난발에 수염 또한 정리되지 않았다.

얼굴에 때가 가득한데, 그런 중에도 입고 있는 장포는 참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귀물처럼만 보였다.

“소림의 원명이오.”

“불성 원명, 내 그 이름을 알고 있다네.”

노인이 탁탁, 쥐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신교의 2장로 백야흠이라네. 미안허이, 내 앞을 보지 못해 차마 이 전쟁통에 자네를 먼저 찾아갈 수는 없었네.”

“그리 불편함에도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오?”

“이 검이 피를 원하고 있다네. 참 곤란한 친구이지 않겠나?”

백야흠이 씨익 웃었다.

원명 또한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대로요.”

원명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참으로 곤란한 친우로구려.”

더 말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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