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1화 (11/334)

〈 11화 〉 이장 ­ 강호초출, 그리고 요녀 (5)

* * *

경화루의 최상층.

화서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목리원을 바라봤다.

몰골이라 할 수 있었다.

건네줬던 푸른 비단옷은 곳곳에 양념 같은 것이 묻은 채 반쯤 벗겨져 있었고, 머리털을 이리저리 뻗쳐 새집을 연상케 했다.

그뿐 아니라 목덜미에는 손톱에 긁힌 듯한 흉까지 있었다.

그런 중에도 생김새가 이쁘장하니 가련해 보인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우습다고 해야 할까.

화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에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묻지요. 도망은 왜 치신 겁니까?”

“…그 소저께서 저를 겁탈하려 하였소.”

“소협의 무력이면 능히 막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어찌 양민에게 무공을 쓴단 말이오. 게다가 그 소저가 만취한 상태라 함부로 몸에 손댈 수는 없다고 생각했소.”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화서는 그것이 참 기가 막힌다는 생각에 이어 물었다.

“그리 양민을 생각하시면 당해주지 그러셨습니까.”

“그, 그게 무슨…! 어찌 사랑하지도 않는 이와 정을 나눈단 말이오! 나는 그런 불한당이 아니오!”

화서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럼 색공에 당하는 건 괜찮고?’

대체 색공에 당할 생각에 싱글벙글하는 것은 괜찮고 호감을 보이는 여인이랑 잠자리를 가지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화서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을 참아내느라 애를 써야 했다.

“예, 그런 걸로 합시다.”

굳이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플 테고, 애초에 그에게 기대한 것이 이런 쪽 일이 아니니만큼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목리원은 말을 줄이는 화서의 모습에 움찔 몸을 떨다 답했다.

“미안하오… 맡겨준 일인데 괜히 폐만 끼쳐서.”

“됐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나 가게에 타격이….”

“있을 리가요. 명가의 여식이나 되는 분이 기루에서 남자를 겁탈하려다 소박맞았다는 소문을 가만두겠습니까? 저희가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입단속을 시킬 것입니다.”

사실 화서가 오늘 일을 걱정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목리원에게 접대를 맡긴 것은 수양현의 이름난 명가의 여식이다.

즉, 혼인 시장에 팔려나갈 일종의 상품이란 말이다.

무릇 명가란 것들은 자신들의 상품에 괜한 허물이 더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니, 이 점에 대해선 화서로서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해서 아무런 벌도 주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요.”

“버, 벌 말이오?”

“루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으나, 다르게 생각하면 저희는 큰 손 하나를 잃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소협이라면 창피를 당한 장소에 두 번 다시 오고 싶겠습니까?”

목리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차…!”

“그 손님께선 부끄러워서라도 이쪽엔 들르지 않으시겠지요. 휴우… 들르실 때마다 하루 매상의 8할 이상을 책임져주시던 분이었건만.”

목리원의 전신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화서는 그 모습에 자신의 의도가 잘 먹혀들어 갔음을 확신했다.

‘빚은 많이 달아둘수록 좋지.’

이리 순진하니 이용해 먹기가 세상 쉬울 수 없었다.

“자, 각오는 되셨습니까?”

“그, 그으….”

화서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것에 목리원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큰일이 나버렸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목리원은 생각했다.

‘아, 아름답구나…!’

화서는 저리 삐뚜름 웃는 모습조차 참으로 아름답다고.

*

벌이라고 겁을 줬으나, 목리원이 실제로 한 일은 그로선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것으로 되겠소?”

“예, 됩니다.”

경화루의 최상층.

목리원은 이젠 넝마가 된 비단옷이 아닌, 원래 입고 있던 회색 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화서는 어느새 무인으로 돌아온 목리원을 흘긋 보곤, 다시금 읽고 있던 서책에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호위를 두고 있긴 하나 방책은 많은 수록 좋지요. 일륜회가 외부의 고수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을 대비해 제 곁을 지켜주십시오.”

“하나….”

“뭡니까?”

목리원을 우물쭈물하며 말을 곱씹었다.

‘벌이 아닌 듯한데….’

무인으로서 자신의 곁을 지키라는 저 말이 벌 보단 상으로 느껴지니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목리원이 양심의 가책 탓에 괜히 불편함을 떠올리는 와중.

화서는 끙끙대는 목리원의 모습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호위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

“저를 보고자 난동을 피우는 이들이 곧장 나옵니다. 일륜회가 고수를 초빙했다면 그들 사이에 그를 숨겨 이곳에 올리겠지요. 요란한 중에 무인을 판별해야 하는 일이니 긴장하셔야 할 터입니다.”

“난동을 부리는 이들이라 하면….”

“많지요. 제가 요녀라는 말에 혹해서 얼굴을 보러 오는 외부인들이나, 저 저잣거리의 상인들이나 기루의 대접에 만족하지 못하는 손님들까지.”

목리원은 화서의 얼굴을 재차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렇긴 하겠구려.”

아직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 됐지만, 목리원은 그녀가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미인은 맞으리란 것을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리 보고만 있어도 머릿속을 멍하게 만드는 사람이 강호 천지에 깔려 있다면, 세상에는 협객이 아닌 바보들만 가득하지 않겠는가.

목리원이 아는 세상에는 바보보단 협객이 훨씬 많았으니, 그 나름의 근거에 따르면 화서는 미녀가 확실한 것이다.

“잘 알겠소.”

목리원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일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겠소?”

“난동을 부리는 손님이 오면.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목리원이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알겠소.”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화서는 괜히 불안함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찮나?’

그냥 교육을 더 시켜서 접대부로 보내는 게 맞는 것 아닌가.

뒤늦게 후회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사흘이 더 지났다.

그간 목리원은 잠을 자거나 수련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 화서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관찰했다.

그러던 중 내린 그녀에 대한 판단이 있는데, 바로 화서가 세간에 대인(大人)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연화 소저는 참으로 심성이 곱구나!’

그녀의 하루는 바빴다.

느지막한 오후부터 해가 뜨기 직전 시간까지 기루를 운영하며, 기루의 사용인들이 일을 마치기 전까지 절대 일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각종 어지러운 글자들이 적힌 서찰도 휙휙 넘기며 적재적소에 명령을 내리고, 그러면서도 아랫사람들이 힘들어할 것을 걱정해 고된 일은 직접 나서기까지 한다.

밥을 먹는 것조차 일하는 와중에 짬을 내서 하는 주제에 직원들에겐 식사 시간을 넉넉히 주니, 목리원은 그녀를 표할 말로 대인이라는 단어 외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목리원의 눈빛에 감탄의 빛이 감돌았다.

화서는 한창 일을 돌보던 중, 그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려 목리원을 바라봤다.

“뭡니까?”

“연화 소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해낸 반문에 목리원이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주로 그녀에 대한 찬양이었다.

어찌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고 있는 것인지, 화서는 그저 웃고 있는 목리원의 모습에 되려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저것을 아부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미 요 며칠 목리원과 함께하며 그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걸 깨달은 까닭이다.

“그만…!”

얼굴이 붉어진 화서가 그리 말하자, 목리원은 그제야 말을 멈췄다.

화서는 숨을 훅훅 불며 몸의 열기를 털어냈다.

‘뭐 이딴 인간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싶건만 쉽지 않았다.

물론, 얼굴 탓이었다.

하는 짓거리는 하나하나가 속 터져 죽을 정도로 답답하건만 얼굴이 저리 잘나니 보는 순간 욕이 턱 막히는 것이다.

근 사흘은 화서에게 잘난 얼굴이 화를 가라앉히는 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할 일 없으면 명상이라도 하십시오. 그것도 아니면 서책이라도 보시던지.”

시선이 부담스러워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에 건넨 말.

목리원은 ‘앗!’하고 말을 흘리더니 이어 그런 질문을 건넸다.

“서책을 읽어도 되는 것이오?”

“당장 급한 일이 없으면 하고 싶은 걸 하십시오. 자리만 지키면 됩니다.”

주제에 또 책은 좋아하는 건가.

화서는 그런 생각이나 하며 목리원을 관찰했다.

목리원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품속에서 서책을 꺼내들고 있었다.

“…강호협객전?”

“오! 소저께서도 알고 있는 것이오?”

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강호협객전’이라는 책이 무림에선 꽤나 유명했던 까닭이다.

“명가의 아이들 사이에선 꽤나 인기가 있지요.”

물론 어느 정도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턴 저 책의 허황됨을 깨닫고 멀리하기 시작하지만.

뒷말을 삼킨 대답.

목리원은 그 말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실로 인기 있을 만한 책이라 생각하오! 벌써 십 년이 넘게 재독하고 있지만 매번 새로운 감동을 주오!”

“…그 책을 말입니까?”

“내 인생에 유일무이한 서책이오!”

유일무이한 서책이란 것은 분명 말 그대로의 의미일 터.

화서는 뒤늦게 깨달음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책을 안 읽는 사람보다 무서운 게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구나.’

과연 목리원의 저 무지하고 답답한 성격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화서는 강호협객전을 펼치고 그것을 탐독하기 시작하는 목리원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오래 살 인간군상은 아니야.’

저리 멍청해서야 어디서 객사하는 건 아닌지.

괜히 그런 걱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화서는 몰랐다.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무지에 대해 비웃음이 아닌 걱정을 띄우기 시작한 것을.

*

또 이틀이 지난날, 드디어 목리원이 일을 할 순간이 왔다.

“루주를 데려오란 말이다아아­!”

5층짜리 전각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취객의 외침.

그것에 화서는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던 것이 온 것 같군요.”

“나가면 되겠소?”

“아직 기다리십시오.”

화서는 보고 있던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곁엔 어느새 나타난 측근 소향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리를 지어 왔습니다. 취객들이 7할이고, 그 혼란에 저잣거리의 상인들이 끼어 나머지 3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네들은 내가 동네 개새끼로 보이나 보구나. 어찌 이리하면 순순히 따라줄 것이라 생각 하는 건가?”

일륜회의 방식은 이미 눈치챘다.

보호비를 두 배로 늘려 상인들의 원망을 키우고 그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 입지를 좁히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무력을 동원하여 굴복시키는 것이 두 번째일 터.

‘가문만 끼이지 않으면 된다.’

이제까지 참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은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욕심 많은 기루의 루주여야 하기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악(小?)이어야 하기에.

하나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이제 자신에겐 썩 만족스러운 검 하나가 생겼으니.

화서는 목리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인을 찾으십시오. 아마 저네들이 초빙한 고수라 해봐야 일류 끝자락에 걸친 정도일 겁니다. 그 정도면 소협과 제 호위 몇 정도면 처리할 수 있겠지요.”

일륜회만 치워버리면 신분은 완전히 세탁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건넨 말에, 목리원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절정이오.”

멈칫­.

화서의 몸이 굳었다.

눈은 큼지막하게 커지고 있었다.

“…예?”

멍한 물음.

목리원은 이제까지 보인 적 없던 스산한 기색을 흩뿌리며 재차 읊조렸다.

“저 아래, 절정의 무인이 있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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