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0화 (10/334)

〈 10화 〉 이장 ­ 강호초출, 그리고 요녀 (4)

* * *

인과를 깨달은 목리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오!”

바로 진심 어린 사과.

목리원은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팍 숙이며 큰 소리로 화서에게 그리 외쳤다.

속엔 참담함이 가득 들어차있는 상태였다.

‘이런 건 협이 아니다!’

어찌 서투른 판단으로 아녀자를 요녀로 몰아간 것인가.

또 어찌 죄 짓지 않은 아녀자를 납치하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것인가.

이래선 스승님을 볼 면목이 없다는 생각에 몸까지 부르르 떨리는 와중.

화서는 눈을 끔뻑거리며 목리원을 바라봤다.

‘…뭔데?’

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

잠시 후, 점혈이 풀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 상태를 점검하던 화서는 시선을 옮겨 아직 무릎 꿇고 있는 목리원을 바라봤다.

‘이를 어찌 한다….’

행동양식이 이해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논리로 자신을 납치한 것은 아니꼽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무력만큼은 탐이 났다.

화서는 고민했다.

목리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처는 무엇인지를.

‘지껄이는 말로 미뤄보면 강호 촌놈.’

협이니 양민이니 요녀니 하는 꼴을 보면 나름 불의에 맞서고자 하는 우스운 열정을 지닌 사내다.

거기에 색공에 대한 기이한 집착은 그가 정말 젊은 청년이라는 확신을 더하고 있었고, 지금 보이는 사과하는 태도는 이 사내가 자존심보단 양심을 우선시 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하나씩 드러나는 그의 특성.

화서는 그 속에서 꽤나 쓸 만 한 수 하나를 떠올렸다.

‘이런 촌놈들 특징이 하나있지.’

화서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다 표정을 가다듬어 무표정한 인상을 만든 후, 입을 열었다.

“일어나시지요. 실수인 것을 서로가 알게 됐으니 더 질책하진 않겠습니다.”

어느새 존댓말로 돌아온 말투.

그것에 목리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이오?!”

“그럼요. 다만….”

“다만?”

“당신 탓에 제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버려서 말입니다.”

화서는 그리 말하며 의도적으로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자 목리원의 얼굴 위로 죄책감이 짙게 묻어났다.

어딘가 울상으로도 보이는 얼굴.

그것에 화서는 순간적으로 ‘꽤나 괴롭혀주고 싶은 얼굴’이라는 생각을 떠올려버리곤 흠칫 놀랐다.

‘무슨….’

마음을 다잡았다.

“직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곳 수양현에 자리를 튼 흑도, 일륜회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들이 제 기루를 노리는 탓이지요. 하여 언제나 주위에 일류의 호위들을 두고 있는 것이었고, 루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그렇소.”

“한데 당신의 실수 탓에 제가 이곳까지 와버렸지요. 그리 큰 소란이었으니, 제가 의문의 사내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소문이 일륜회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터입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요.”

목리원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 나 때문에…!’

죄 없는 여인이 생업을 잃게 생겼다.

목리원은 위장이 베베 꼬이는 기분을 느꼈다.

참으로 스스로를 숨길 줄 모르는 모습이라, 화서는 그것에 자신의 수가 잘 통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안도할 수 있었다.

“책임을 져 주십시오.”

화서는 말했다.

“저도 일류의 무인입니다. 짧은 공방이었으나, 그 속에서 저는 당신이 저보다 완숙한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협을 아는 무인이라면, 그 무력으로 스스로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져 일륜회의 소탕을 도와주십시오.”

드디어 내뱉는 목적.

물론 화서의 목적은 단순히 그것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일륜회 정도는 자신의 무력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었으나 굳이 하지 않은 것.

소란을 일으키면 냄새를 맡을 가문이 있으니 침묵을 지킨 것이라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이제까지는 그랬지만 이것은 꽤나 그림이 좋지 않은가.

납치당한 경화루의 루주, 그녀가 멀쩡히 돌아오고 그 곁엔 납치를 자행했던 무인이 있다.

그 무인은 루주의 수발을 자처하며 일륜회의 소탕에 앞장선다.

요녀가 또 사람을 홀렸다.

그런 식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화서는 개의치 않았다.

화서는 외부의 평가보단 스스로의 안전이 중요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함께 도망쳐 나온 수족들의 목숨 줄이 중요했다.

즉, 요녀가 무공을 안다는 사실이 퍼지는 것보다야 목리원을 홀려 이용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지인 것이다.

목리원은 눈을 끔뻑이며 화서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하다 그 속뜻을 이해하곤 얼굴을 환하게 만들며 외쳤다.

“너그러이 봐주어 고맙소! 내 꼭 소저의 기루를 지켜드리겠소!”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 안도를 속에 떠올린 목리원의 외침에 화서가 답했다.

“고맙기는요. 저야 말로 감사하지요.”

이리 쉽게 속아 넘어가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화서가 고개를 숙였다.

움직임과 함께 흘러내리는 머리칼은 꼭 흘러내리는 비단결 같았다.

목리원은 그것에 심장이 콩콩 뛰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한 번 소개드립니다. 경화루의 루주 연화입니다.”

가명으로 내뱉은 이름.

목리원은 그 ‘연화’라는 이름을 계속 되뇌며 벌떡 일어나 포권지례를 한 채 답했다.

“목리원이오! 아직 별호는 없소!”

싱글벙글 웃는 낯은 어딘가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화서는 생각했다.

‘멍청한 놈.’

이 사내는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고.

*

각자 다른 속내를 가진 남녀가 수양현으로 돌아왔다.

대로를 지나 환락가로, 그곳에서 다시 경화루로.

길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숙덕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요녀다!

­저 옆에 있는 남자는? 소문의 납치범이 아니오?

­홀린 게지! 저기 저리 딱 붙어서 헤실대는 모습을 보면 모르오? 저리 잘난 사람도 요녀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군…!

주로 화서를 헐뜯는 말들.

그것들을 모두 듣고 있던 목리원은 시선을 옮겨 화서를 바라봤다.

‘듣고 있을 텐데.’

그녀도 일류의 무인이다.

일류 쯤 되는 무인의 기감이라면 들려오는 이 말들을 모두 듣고 있을진대, 그녀는 조금의 거리낌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고고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걸을 뿐이었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인가.’

그녀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목리원이 아는 화서는 이 속닥거림과는 거리가 먼 이였다.

그녀는 죄를 짓는 이도 아니었으며 자신의 사람을 중히 여기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단 말이다.

“소저….”

“그냥 따라오시지요. 이야기는 루에 돌아가서 하는 것으로 하고.”

목리원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내뱉는 답.

목리원은 ‘끄응’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다, 이내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

경화루의 최상층.

그곳에서 목리원은 머쓱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곳에 돌아오자마자 제게 꽂히는 호위들이 시선이 너무 따가웠던 까닭이다.

“그, 미안하게 됐소….”

오해로 해를 입혔으니 응당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뱉은 말.

하나, 그것에 답한 이는 호위들이 아닌 화서였다.

“되었습니다. 오해는 모두 풀렸고, 이리 함께 일을 도모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서로에게 괜한 사감은 가지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싱긋 웃으며 말을 내뱉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가식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목리원 만큼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소저…!”

목리원의 안면 가득 뭉클한 심정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동경의 기색이 드러났다.

‘어찌 마음씨가 이리 고울 수가!’

또 심장이 말을 안 듣는 것 같은 기분.

목리원은 그만 멍하게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겨우 꾹 눌러내곤 벌떡 일어나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겠소! 자, 그럼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지금 당장 저 일륜회라는 악적들에게 가 협의를 일러주면 되는 것이오?”

“앉으시지요.”

“알겠소!”

목리원이 다시 앉았다.

화서는 무심하게 그 모습을 보다, 말을 이었다.

“저희가 먼저 움직이진 않을 것입니다. 저쪽에서 먼저 들어올 테니까요.”

“음? 어째서요? 납치를 당한 소저가 돌아왔으니 저들로서도 이곳을 점거할 명분이 없지 않소.”

“명분은 만들면 그만인 일입니다. 루의 가장 안전한 자리에 있던 주제에 납치나 당하는 이를 경화루의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들이대면 그만인 일 아니겠습니까?”

쿵!

목리원이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크게 기함했다.

“말도 안 되는! 어찌 명분이란 것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단 말이오!”

목리원으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에게 명분은 정당한 것이었다.

서로의 은원과 그 속에 갈등을 협과 실리 아래서 판별하는 것이 명분이란 말이다.

한데 어찌 그런 명분을 저리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이용하려 든단 말인가.

“강호는 그런 곳입니다.”

화서의 말에 목리원은 분노했다.

“그렇지 않소! 나는 장담하오!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들이미는 것은 저들이 흑도라 그런 것이라고!”

무릇 무인이란 정도 아래서 협과 의를 중요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으니 흑도요, 흑도는 그렇기에 소탕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낸 목리원이 말하자 화서는 골이 지끈 울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래서 촌놈은…!’

무슨 꿈속을 사는 것인지, 이를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려 하니 괜히 뒷골만 당겨 화서는 답을 포기했다.

“예, 그럼 그런 것으로 하지요.”

누구 좋으라고 이걸 다 설명해주나.

저 사내는 그저 자신의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저희는 침묵을 지킬 것입니다. 이제와 먼저 선제공격을 해봐야 좋은 소리는 안 나올 테니.”

“알겠소! 그럼 그때까지 난 뭘 하면 되겠소?!”

주먹을 불끈 쥔 목리원의 물음.

화서는 그런 그의 낯짝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고민하다, 이어 말했다.

“일단 기다려야지요. 정 심심하시면 기루 일이나 좀 돌봐주십시오.”

목리원의 고개가 기울었다.

*

기루의 일을 돌본다.

그 말의 의미를 목리원이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오?”

“옷이지요.”

경화루의 최상층, 목리원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옷가지를 바라봤다.

고운 비단으로 짠 푸른색의 옷.

온갖 화려한 수가 놓아져 있으며, 또한 그 어딘가에 빛나는 것은 화려한 금장식이었다.

그래, 옷이다.

한데 왜 이렇게 화려한 것인가.

자신이 이것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잔뜩 혼란스러운 마음에 목리원이 화서를 바라봤다.

화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기루 일을 돌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접대 좀 하시라는 말입니다.”

“접대?”

“기루에 꼭 기녀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무릇 최고를 노리려면 여러 종류의 고객들을 상대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저희 기루는 여성 고객들도 꽤나 있습니다.”

화서는 생각했다.

‘뽑아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뽑아먹어야지.’

무인으로서 그의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하나 그런 것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저 이쁘장하게 생긴 얼굴은 기루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꽤나 군침이 돌았다.

분명 이 수양현의 명가 여식들에게 좋은 상대가 되어줄 것이리라.

‘조신은 개뿔이.’

화서는 알았다.

돈 있는 집안 계집들만큼 방탕하게 노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저런 미모의 남성이라면 그 계집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먹을 수 있을 것임을.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손님의 잔에 술을 따르고 무언가 말을 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면 될 일이니.”

목리원은 수치심에 얼굴이 잔뜩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 싫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목리원이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그녀만 보면 심장이 떨려 거절의 말을 내뱉을 용기가 생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녀가 부탁하는 일은 왜인지 다 들어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자신도 모른 새에 샘솟아 버리는 것이다.

‘나, 나는…!’

의로운 협객.

강호의 악적이 두려워하는 무인.

부들부들­.

목리원의 몸이 떨렸다.

목리원은 사무치게 슬픈 마음을 꾹 눌러내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하나 억지로 참아내는 일은 결국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

“벗으란 말이야악­!”

“으아아악­!”

첫 접대의 순간.

목리원은 술에 가득 취해 자신을 겁탈하려는 여인을 뒤로한 채 도망치며, 계집아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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