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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하아...]
김주희와 떨어진 디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점점 무너져가는 태초의 나무처럼 육신이 당장 부서질 듯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버텼다.
‘어떻게든 들키지 않고 가야 돼.’
그녀는 그것만이 김주희와 이강호 등등 노력 해준 수많은 동료들에게 은혜를 갚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 보.
또 한 보.
‘앞으로 조금...’
이제 고지는 거의 눈앞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디네는 성소로 진입하기 무섭게 이프리트가 해준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디네. 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곧바로 내부 깊숙이 있는 금지된 구역으로 가. 너도 정령이니 어디가 금지된 구역인지는 느낌상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머릿속에서 경고문구가 울려 퍼지게 되고 거대한 문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왼쪽 벽, 지면으로부터 2m 정도 되는 부분을 손으로 쓸면서 앞으로 전진해. 그럼 어느 특정 부분이 눌리면서 숨겨져 있던 비밀공간이 드러날 텐데 그곳에...]
나무를 심는다.
디네는 머릿속에 경고가 울려 퍼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일단 이프리트가 말한 대로 느낌이 가장 좋지 않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이프리트가 말했던 대로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려 퍼지며 순간 섬뜩한 오한이 디네의 전신을 덮쳤다.
[흡...!]
그것은 오직 정령이기에 느낄 수 있는 오한이었다.
그녀의 육신이, 영혼이 본능적으로 이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까짓 거...!’
하지만 디네는 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겪어 왔는데 이따위 본능 따위에, 감각 따위에 밀릴 쏘냐!
그런데 그때였다.
스스스스-
갑자기 눈앞이 난데없이 흐릿해지더니 알 수 없는 영상이 그녀의 시야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환각? 환영? 이,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혹시나 적이 있는 것일까.
디네는 저항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려 곧바로 환각에 대항하는 정령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이런 안 되잖아?! 대체 뭐야? 아무리 봐도 주위에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스르륵-
디네는 마치 기계가 정지하듯 그대로 자리에 멈춰 환각에 빠져들었다.
* * *
휘이이이잉-
요동치는 거센 바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눈을 깜빡이기 위해 디네가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그곳은 그녀가 있던 장소가 아니었다.
‘...뭐, 뭐야? 여긴...’
푸른 하늘, 드넓은 초원 그리고 그 너머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뛰놀고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들.
‘어...’
생명체들이 디네를 보며 웃었다.
아주 즐거운 듯이.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무슨...’
디네는 순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휘이이잉-
바람소리가 재차 세차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광경은 또 바뀌어져 있었다.
쿠구궁-
어둡게 물들어 벼락이 내리치는 하늘.
메마른 바다.
황폐해진 초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타고 있는 문명.
‘......’
디네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휘이이이잉-
또다시 바람이 세차게 분다.
이번에 눈을 뜬 그녀에게 비친 것은 네 명의 작고 귀여운 정령들이었다.
[아, 그만 좀 하라고 했지! 이프리트!]
[아, 장난이잖아~ 장난~]
[그래도 싫다는 건 하지 마라. 이프리트.]
[보레아스 말이 맞아. 싫다는 건 하지 마 이프리트.]
실피리오, 이프리트, 보레아스, 아쿠리네.
그들 네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디네를 쳐다봤다.
디네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휘이이이잉-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땐.
[아... 아파요...]
환경에 적응을 못해 죽어가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디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디네는 구태여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몸을 강제로 움직이며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자의 정체, 이 자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으니까.
하늘은 아직까지도 까맣기 그지없었다.
디네, 아니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괜찮다.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그것이 끝이었다.
곧 몸에서 빛이 뻗어나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육신은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 단단히 뿌리 박혔다.
디네는 다시금 눈을 깜빡였다.
* * *
‘...돌아온 건가?’
디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을 반복해 깜빡였다.
익숙한 구조물들이 눈에 비친다.
어깨에는 여전히 태초의 나무가 들려있었다.
‘후... 무사히 돌아왔구나. 대체 뭐였던 건지...’
왜 창조자의 기억이 하필 지금 자신에게 보인 것일까.
자신이 태초의 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있어서?
그녀는 많은 의문이 들었으나 그것을 뒤로한 채 걷기 시작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무의 완수.
그렇게 걸어 나가던 그녀는 곧 이전보다 몸이 많이 괜찮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물러나라고 울려 퍼지던 소리도 이젠 안 들리네.’
머리가 한층 맑아진 느낌이다.
디네는 거대한 문에 도착하자마자 이프리트가 말한 대로 곧장 왼쪽벽에 붙어 나아가며 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트득-
이내 손에 특정 부분이 걸리며 비밀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찾았다!’
디네는 얼른 그곳으로 들어간 뒤 통로를 다시 폐쇄하고 나무를 심었다.
스스스-
그러자 생명의 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디네는 그제야 한시름 놨다 생각하여 지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는 나름 감춰줘 있는 장소, 아무리 적이 대단하다고 하여도 이곳을 완벽하게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꽤나...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성소의 기둥과 천장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무, 무슨... 서, 설마?!’
이에 디네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경악한 순간.
콰과과과광!
재차 파공성이 울려 퍼지며 성소의 천장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 *
콰과과과광!
어마무시한 파공성이 울려 퍼지자 무사히 도망쳐 휴식하고 있던 이강호는 번뜩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충격파가 날아온 방향...
단번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작전이...
‘실패했다.’
[제기랄!]
마찬가지로 눈치챈 실피리오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잠깐! 실피리오! 멈춰라! 지금 마력이 거의 다했다! 지금 상태로는 가봤자...”
카시우스가 다급히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슈슉-
실피리오는 스킬까지 사용해가며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빌어먹을...”
그렇게 실피리오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자 카시우스는 이강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바로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그것을 추궁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강호가 차분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난... 가지 않을 거다.”
“그렇게 애쓰는 척하더니 보는 눈이 사라지니 이제와 포기하는 거냐?”
“아니, 내가 가면 더 위험해진다.”
이강호는 내부 신물 파편 1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여기 있는 카시우스를 포함하여 크라베스 등등이 알고 있다.
알베타스가 모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알고 있었더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까 그곳에서 그를 절대 놔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힘이 거의 다한 현재 따라가는 건 동료들을 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만드는 것일 뿐.
“가지 않는다면 지금 즉시 널 공격하겠다.”
카시우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강호는 이에 그를 비웃듯 실소를 흘렸다.
“카시우스. 난 네가 지금 나와 비슷하게 힘이 많이 빠진 상태란 걸 알고 있다. 지금 날 공격한다면 넌 나도 못 잡고 실피리오의 신뢰도 완전히 잃게 될 거다. 그래도 할 건가?”
“......”
카시우스가 눈가를 꿈틀거렸다.
그렇다.
체력과 마력이 무지막지하게 소비된 지금 그도 이강호를 잡을 자신 따윈 없었다.
그저 협박하여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던 것일 뿐.
“......”
슈슝-
계획이 실패한 카시우스는 말없이 등을 돌려 이강호의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강호는 카시우스가 앞에서 사라지자 쓰린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디네...’
말괄량이처럼 행동하는 디네의 얼굴과 슬퍼할 김주희, 유세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후...’
감정이 많이 죽었던 과거였다면, 이 정도로 착잡하게 느끼진 않았을 일이었다.
유세현과 다니고 회귀 전 잃었었던 사람들을 이번엔 생존시켜 나가며 감정이 많이 살아났고, 이제 그것은 그를 괴롭히는 아픔이 되었다.
하지만 감정을 일부 되찾은 것이 후회스럽냐 묻는다면 이강호는 아니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감정이 죽었던 당시, 자신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미안하다... 디네...’
꾹 감은 이강호의 눈가에서 아주 작은 물 한 방울이 그도 모르게 스르륵 흘러내렸다.
* * *
솨아아아-
차가운 냉기로 새하얗게 얼어버린 숲.
궤도를 틀어 날아온 에반의 검이 볼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김주희는 이를 악물고 거센 냉기를 발산했다.
“후우... 후우... 젠장...”
온 힘을 다해 에반과 맞붙기 시작한 지 고작 몇 분.
그녀는 고유특성 부조화, 빙백신공까지 모든 것을 쏟아가며 이프리트와 함께 합공을 취한 것이 무색하게 에반에게 밀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
어떻게 이런 검술이 존재하는 것인지.
‘그때 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
과거 에반의 검술을 목격한 적 있었던 김주희였지만 현재 에반의 검술은 그때와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순수 체술에선 밀릴지언정 무공의 힘까지 응용하여 싸운다면 어떻게든 그가 사용하는 무공을 파훼하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너무 강해. 사용하는 검법의 레벨이 내가 사용하는 창술과는 차원이 달라.’
거기에 순수 무력을 끌어올려주는 대라무위신공.
빙공보다 안 좋은 무공이라고 줄곧 평가받던 그 무공은 이제와선 에반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후우, 강하시네요. 주희씨. 창술 연습... 정말 많이 하셨군요.”
에반이 말했다.
진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만 할 땐 아직도 사뭇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괴물 자식...’
김주희는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과거 에반이 알베타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강호가 내뱉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인류 최강자를 잃었군.]
그때는 죽은 동료를 애도하기 위해서 내뱉은 그냥 별 의미 없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거짓이 아니었단 거지...’
이제는 똑똑히 알 수 있다.
아니 똑똑히 체감된다.
과거 그 당시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에반 비텔스바흐가 얼마나 강했을지.
그리고 그런 그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도.
“에반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호오, 주희씨가 저에게? 뭐죠 주희씨?”
“당신도 기억... 돌아온 거죠?”
그 말에 에반이 잠깐 멈칫거렸다.
“......흠, 주희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구태여 억지로 시치미 떼려고 안 하셔도 돼요. 에반. 어차피 예전 당신 동료들 모두 돌아왔을 거라 보고 있거든요. 그리고 당신... 지금 표정에서 거짓말하고 있다는 게 엄청 티나요.”
“...음... 표정관리는 제법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납니까?”
“조금도 아니고 무척 많이요.”
“......하하, 좀 무안하군요. 전 나름 잘 숨기는 편이라 자신했는데... 동료들이 지금껏 그냥 알고도 넘어가준 거였군요. 그런데 그건 왜?”
“아니, 뭐 별거 아니에요. 지금 제가 어떻게든 당신을 쓰러트리면... 제가 과거 인류 최강이었던 사람을 이기는 건가 해서요. 확실히 해두고 싶었거든요.”
김주희가 에반의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그것은 의지가 꺾인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빙공보다도 더욱 차가운.
쓰러트려야 되는 적을 보는, 목숨을 건 눈빛.
‘...진심이군.’
에반은 검을 양손으로 쥠과 동시에 알베타스화했다.
그녀를 적으로서 인정하고 모든 것을 쏟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후우...”
차분하지만 착잡함이 담긴 심호흡이 에반의 입가에서 새어나간다.
인간을 베어야 되는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는 에반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을 그는 단 한 번도 스스로 막을 수 없었다.
김주희, 희귀 속성인 빙백신공의 정통 후계자이자 동료였었던 이강호가 튜토리얼부터 여기까지 직접 데려온 대리자.
그녀는 분명 과거 최후까지 함께 했던 동료들과 비교해 봐도 손에 꼽힐만한 엄청난 강자가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하다. 이강호.’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주희의 상대는 에반 비텔스바흐였다.
과거 구(舊)인류 최강의 대리자.
처적-
에반이 차분히 허리와 다리를 굽히며 자세를 낮췄다.
김주희는 그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주위가 한없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공기, 마력, 그 안에 섞여 있는 수분 등등 온갖 것이 한데 압축되는 느낌.
이건... 죽기 전의 감각인 것일까?
‘아니, 아니야. 세현 선배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이긴다.’
“이프리트씨!”
[알고 있다. 나도 여기에 모든 걸 걸도록 하지.]
화르륵-
이프리트도 전신을 불사르며 최후의 불꽃을 불태웠다.
스스스스-
승부가 결정 나는 것은 단 일순간.
뚝-
고대수의 얼어붙은 이파리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찰나 그들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눈보라보다도 더 차갑게, 지옥불보다도 더 뜨겁게 그리고 어떠한 날붙이보다도 더 날카롭게.
하지만 그들이 격돌하려는 순간.
쐐애애액-
어마무시한 굉음이 난데없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
“저건?!”
알베타스가 빠르게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였다.
향하는 방향은 당연히.
‘성소!’
화르륵-
도착지를 순식간에 예상해낸 이프리트가 곧바로 방향을 꺾어 알베타스의 뒤를 쫓았다.
반면 김주희와 에반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상황을 파악한 김주희가 뒤돌아 이프리트를 따라가려 하자 에반이 말했다.
“멈추세요. 주희씨. 지금 따라가면 100% 죽습니다.”
“......”
김주희가 쓱 고개를 돌려 에반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내디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에반은 그런 그녀의 등을 베지 않았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세계가 뒤흔들렸다.
왕중의 왕(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