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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둥이 사라져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게 된 석탑의 입구.
그야말론 닭 쫓던 개 꼴이 되어버린 4명의 대리자들은 대번에 시선을 돌려 이강호를 노려봤다.
석탑의 내부를 확인하기 전 크라베스가 내뱉은 발언도 그렇고.
여태껏 보여준 이강호의 행동도 그렇고.
그들은 어떠한 연유로 기둥이 감쪽같이 사라지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강호가 이렇게 일을 만든 범인이란 것만큼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크라베스가 나머지 세 명을 향해 중얼거렸다.
“대충 느끼고 있겠지만 놈에게 협박 같은 건 소용없다. 놈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버리는 놈이니.”
“그렇다면 반 죽여버리는 수밖엔 없겠군. 아무리 그래도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을 테니까.”
리네리아가 주먹 관절을 뚜둑 꺾으며 답했다.
키쿨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후우, 이렇게 되면 임시 동맹인가. 달갑진 않다만...”
“어쩔 수 없군.”
마지막으로 카그네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럼...”
“가자고.”
타닷-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 명의 인물들이 동시에 4갈래로 갈라져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이강호를 향해 쇄도했다.
슈우우욱-
각 종족의 수장인 최상위 대리자 네 명의 합공!
그것은 아무리 이강호라 할지언정 부담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허나.
‘흐음.’
이강호는 무섭게 다가오는 그들을 보면서도 안색하나 바뀌지 않았다.
여기까지도...
‘예상대로군.’
그의 계획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이강호가 몸을 뒤로 빼며 손가락을 툭 튕겼다.
휘이이잉-
슈슈슈슉-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선 거센 폭풍과 함께 적들을 향해 화살비가 쏟아졌다.
크라베스를 포함한 이들이 사라진 기둥에 놀라는 동안 재차 자리를 잡은 채 줄곧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카시우스와 실피리오의 지원이었다.
“흥!”
크라베스가 콧방귀를 뀌며 화살을 쳐내기 위해 건틀릿을 휘둘렀다.
그의 입장에서 이런 단순한 화살 따위로 자신을 막으려는 것은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뚫고...
팅!
그렇게 건틀릿으로 화살을 쳐낸 순간이었다.
‘무슨...’
크라베스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분명 단순한 마력 화살이건만 위력이 예상치를 훨씬 웃돈다.
‘빌어먹을... 이래서 카시우스, 그놈이 바람의 정령왕에 그토록 목숨을 걸었던 건가.’
크라베스는 카시우스에게 바람의 정령왕을 안겨준 것이 후회 됐으나 이미 끝난 일이었다.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
‘후우, 어쩔 수 없군. 지금은 집중해서 일점 돌파해야겠어.’
파앗-
콰아아앙!
크라베스가 어쩔 수 없이 마력을 사용하여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다른 이강호의 곁에는 강력한 체술로 화살비를 뚫고 먼저 도달한 리네리아가 있었다.
“하아압! 건방진 인간놈! 아주 작살을 내주마!”
파바밧-
뒤 따윈 생각하지 않는 듯 화염을 뚫으며 이강호를 향해 격렬하게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리네리아.
크라베스는 얼른 끝내기 위해서라도 바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강호는 곧바로 내뿜는 불꽃의 화력을 높였다.
강하고, 더 강하게.
그 무엇조차도 감히 함부로 자신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시간은 나름 끌었으니 이젠...’
벗어날 나름의 채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쿠구구구구-
청염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크윽...!”
크라베스와 리네리아는 그 청염의 어마무시한 열기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아아압!”
그러자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함성과 함께 이강호의 눈동자가 순간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특수특성, 염화(炎火)]
스스스-
청염에 주홍빛이 덧씌워져 간다.
크라베스와 카그네프는 주홍빛의 불꽃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빌어먹을!!”
“저건!!”
크라베스가 외쳤다.
“키쿨! 리네리아! 저 불꽃을 조금이라도 빠져나가게 둬서는 안 된다! 놈은 저 불꽃으로 이동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막아라!!”
그 말에.
리네리아, 키쿨의 눈빛이 희번득 돌변했다.
‘불꽃으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에반에게선 듣지 못했던 정보인데.’
하지만 그들은 크라베스의 말을 구태여 의심하지 않았다.
저 표정과 행동.
지금 상태에서 놈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알았다.”
트드득-
리네리아와 키쿨이 순간적으로 알베타스화하며 막을 준비를 했다.
이에 이강호는.
‘호오 곧바로 알베타스화 한 건가. 판단력이 좋군. 하지만...’
그가 창대를 꽉 움켜잡았다.
적들은 무려 각 종족을 대표하는 수장, 네 명.
‘과연 뚫을 수 있을지.’
그는 사실 결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의 체력과 마력을 소모시켜 쉽게 뒤쫓지 못하도록 이런 절박한 척 쇼를 하는 것일 뿐, 사전작업은 아까 전투 시작 전 불꽃을 담은 램프를 실피리오에게 맡겨두는 것으로 진즉 끝내 두었으니까.
이목을 끌어 카시우스, 아니 실피리오만 어떻게든 빠져나가게 하며 계획은 성공.
‘그럼 시작해 볼...’
이강호가 그렇게 생각하며 막 움직이려 한 찰나였다.
“호오, 불꽃으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처음 듣는 재미있는 얘기구로나.”
이강호의 머리 바로 위.
세계의 천장을 뒤덮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 너머로 여성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이강호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알베타스인가.”
이강호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알베타스가 있었다.
마치 만상을 아우르는 왕처럼, 8쌍의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목소리와 같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카그네프와 크라베스가 알베타스를 확인하기 무섭게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젠장.’
그들의 입장에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그래서 터지기 전에 어떻게든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건인데.
‘이제는 이강호를 신경 쓸 여력 따윈 없다.’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 그들은 방금 전까지 죽이려 했던 이강호와 동맹을 맺어야 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후후,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강호. 엘프 사건 때 이후로 처음이던가? 유세현은 잘 지내고 있느냐?”
알베타스가 미소를 머금은 채 이강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강호는 이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흠, 너는 여전히 말 수가 적구나. 아니면 멀어서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건가?”
스르륵-
알베타스가 서서히 이강호의 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크라베스는 그사이 재빨리 이강호에게 마력으로 말은 건넸다.
[이강호. 들리느냐. 동맹을 맺고 싶다. 이대로면 우리는 여기서 전멸할지도 모른다.]
“......”
물론 이강호는 이에 답하지 않았다.
[이강호!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자칫...]
그는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며 그저 묵묵히 창을 치켜세웠다.
[이강호! 설마 생각 없이 불꽃을 날릴 생각이냐! 적이 주위에 몇이나 더 있을 줄 알...]
그 모습에 크라베스가 기겁을 하며 이강호에게 더 격렬히 말을 걸었지만 이강호는 그 대꾸조차도 하지 않았다.
휘익-
콰아앙!
그가 창을 뻗자 불꽃이 공간을 가르며 광활하게 뻗어나갔다.
* * *
콰아아아앙!
이강호가 조언을 듣지 않고 마구잡이로 불꽃을 날려버리자 크라베스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염병할!”
불꽃은 크라베스와 카그네프, 그들에게 있어서도 최후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알베타스의 수하인 키쿨과 리네리아는 그들의 도주보다도 이강호와 그 불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신경 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탈출을 못하면...
‘여기서 붙잡혀 죽는다!’
카그네프와 크라베스는 온 힘을 다해 질주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크라베스가 예상했던 것처럼 키쿨과 리네리아는 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역시나 그들에게 지금 중요한 건...
“조금도 놓치지 마라 키쿨. 만약 놓치면 내가 널 죽여 버릴 거다.”
“막을 특수한 마법도 없는 게 말은 잘하네. 너나 잘해. 리네리아.”
키쿨과 리네리아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량의 마력을 사용해 불꽃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중에서도 키쿨의 특수한 액체는 불꽃인 이강호의 능력을 봉쇄하기 무척 좋은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다 막을 수가 없다. 이게 대체 무슨 화력이냐...’
그런 키쿨의 바다 같은 액체로도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가는 이강호의 불꽃은 전부 커버할 수 없었다.
화르륵-
후웅!
그렇게 약간의 불꽃이 성공적으로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알베타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슥-
그러자 여태까지 모습을 숨긴 채 지켜만 보고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헤드리아와 캬쟉프, 그리고.
쿠구구구-
아무것도 없는 지면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며 불꽃 자체를 뒤덮듯 막아선다.
키쿨의 물이 아닌, 에우로네가 일으킨 해일이었다.
스스스-
얼마나 지났을까 거칠게 퍼져나가던 불꽃이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이내 불꽃이 완전히 다하자 가까이 다가온 알베타스가 웃으며 말했다.
“흠, 실패한 거 같다만 이강호? 이제 어쩔 셈이지?”
“......”
“여전히 묵묵부답인가... 흠...”
[이놈이! 대답 안 하느냐? 여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느냐!]
보다 못했는지 헤드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베타스는 손짓을 하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괜찮다 헤드리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느냐. 자신이 아껴두었던 기술이 안 먹힌 건데.”
알베타스가 즐겁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그녀가 좋은 대리자를 손에 넣었다 생각할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유세현의 친구, 이강호.
불의 화신.
감정이 닳고 닳아 감정 자체가 그다지 남아있지 않는 인물.
‘후후, 운이 좋았구나.’
[감정]
그중에서도 적대감이라는 감정은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리자를 알베타스화 시킬 수 있는 [상자].
그 [상자]는 알베타스를 향해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만 알베타스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대가 알베타스를 원수라고 생각한다면?
그 상대는 때려죽여도 알베타스화 시킬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알베타스가 인간을 습격했을 때 유혜인을 죽이지 않고 되레 살려준 이유이기도 했다.
‘후후후. 여기서 이강호를 손에 넣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록 이 일로 인해 유세현에게 강렬한 적대감을 얻게 되겠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이강호를 손에 넣었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알베타스는 그때가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베타스의 웃음을 본 이강호가 비로소 입꼬리를 피식 말아 올리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다만 고맙다 알베타스. 카시우스와 실피리오를 놔줘서.”
“...?!”
후웅-
그와 동시에 이강호의 신체가 불꽃처럼 순간 일렁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알베타스는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후후후... 이강호. 감히 나를 속이다니... 재밌구나.”
[...왕이시어...]
“괜찮다. 시간을 끌기 위해 아마 처음부터 대비를 해놓고 그런 연기를 한 거겠지. 그러니 뭘 해도 어차피 놓쳤을 거다. 혹시나 했다만 역시나로구나.”
[......]
“그보다도 우린 원래 목적을 이루러 가자꾸나.”
알베타스가 그리 말하며 석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네리아와 키쿨은 죄인이라도 된 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왕이시어. 그게...]
“혹시 지금 하려는 말이 기둥이 저기에 없다는 것이냐?”
[어엇! 그걸 어떻게... 원래는 있었는데...]
“있었는데.”
[그게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알베타스의 눈동자가 순간 번뜩 빛을 발했다.
그녀가 에반이 있을 방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역시 내가 신하 하나는 잘 뒀단 말이지.”
[...그 말씀은...]
“그래, 가자꾸나. 기둥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알베타스가 휙 몸을 돌려 날기 시작했다.
[......]
이에 리네리아와 키쿨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곧장 알베타스의 뒤를 따랐다.
이해가 가고 안 가고 따질 필요 없이.
‘왕께서 틀릴 리가 없으시다.’
둘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한 실수를 다음에 꼭 만회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왕중의 왕(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