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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익-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았던 화염이 수그러들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이강호를 향해 돌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놈 능력이...’
‘이전보다도 더 강해졌다.’
‘레드드래곤의 브레스와 거의 동급이라고 들었었는데 이건...’
‘그 이상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같은 때에 저런 스킬을 사용한 거지?’
‘아무리 화력이 강할지언정 대놓고 사용하면 우릴 죽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이강호를 쳐다보고 있는 인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몇 번을 생각해도 대량의 마력 소비를 감수해 가며 저런 능력을 대놓고 사용한 의중이 파악이 되지 않는 탓이었다.
재수 좋게 얻어걸려 누군가 한 명을 리타이어 시킨다 하더라도 남은 자들에게 좋은 부분이라 손해면 손해지 이득인 부분은 전혀 없을 텐데 대체 왜...
그때였다.
이강호가 작게 혀를 찼다.
“쯧...”
그건 마치 그들이 보기엔 한 놈도 처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하하하! 설마 이런 공격으로 한 명쯤은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능력을 사용했던 거냐? 보기보다 아둔한데?”
그 행동을 본 리네리아가 이강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그를 비웃었다.
“......”
키쿨은 성격 때문에 구태여 말로 내뱉진 않았지만, 리네리아와 내심 같은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젠장...]
이에 실피리오 또한 지그시 혀를 차며 연기에 들어갔다.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작전이 실패한 자의 표정이었다.
“......”
카시우스도 말없이 재차 적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흠, 정말 별거 아니었던 건가...”
그러자 카그네프를 포함한 키쿨과 리네리아는 그제야 정말 별 것이 아니었다는 판단이 섰는지 싸움을 이어나가기 위해 재차 자세를 다 잡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강호가 노렸던 대로.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뭐지? 뭔가가 이상하다. 뭔가가...’
과거 멸망한 자신의 세계, 유적지에서 이강호와 한동안 다녀봤었던 크라베스만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아는 한 이강호는 이런 작은 확률에 기대어 리스크가 큰 스킬을 사용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계획적이고, 누구보다도 간사하기 짝이 없는 인물.
대의라는 명분하에 한때 유세현조차도 버리려 했던 인물, 그게 바로 이강호가 아니던가!
그래서 과거 그 당시 신물 파편도 놈에게 빼앗긴 것이고.
그런데 그런 놈이 이제와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그런 대량의 마나를 소비하는 능력을 사용하다니?
찜찜하다.
무척이나.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
‘젠장, 뭐냐? 내가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냐!’
때문에 크라베스는 그 짧은 순간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강호가 노리던 것이 만약에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지.
또 어떤 이유에서 일지.
다시 전투가 막 재개되려는 순간이었다.
눈을 번쩍 뜬 크라베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젠장! 석탑! 석탑! 내부를 살펴라! 놈의 동료가 이 틈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
그 말에 키쿨을 포함한 세 명의 눈동자가 순간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그래, 지금껏 정령의 편이라고 생각하여 간과해 그렇지 이강호의 숨겨둔 동료가 신물 파편을 노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원래 모름지기 배신은 최후의 최후, 의지할 수 있는 게 자신밖에 남지 않았을 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법이니까!
“큭!”
“빌어먹을!”
리네리아를 포함한 카그네프, 키쿨, 크라베스가 동시에 방향을 틀어 석탑을 향해 질주했다.
이강호와 카시우스, 실피리오가 다급히 견제를 가했으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비켜!”
“꺼져라!”
파앗!
지금만큼 그 넷은 적이 아닌 한 편이었다.
키쿨과 리네리아는 여왕이 도착할 때까지 기둥을 수호해야 했고, 카그네프와 크라베스는 취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인간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인데 적이고 아군이고 지금 무엇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그 네 명이 힘을 합쳐 석탑의 입구에 나란히 도착한 순간이었다.
“어... 어...?”
내부를 본 그들의 표정이 반쯤 넋이 나간 사람마냥 돌처럼 굳었다.
그리고 뒤 이어 너나 할 것 없이 새어 나오는 허탈 섞인 목소리.
“무슨...”
분명히 아까 전까진 있었던 기둥이... 나무가...
‘사라졌다!’
* * *
“후우... 후우...”
한편 네 명의 대리자들이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석탑 내부를 응시하고 있을 무렵,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김주희와 이프리트, 디네는 나무를 심을 곳을 찾아 열심히 지면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이프리트님?”
“여기서 왼쪽!”
뽑을 때만 해도 괜찮은 줄만 알았던 태초의 나무는 가지 끝부터 시작하여 점점 돌처럼 굳으며 석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시라도 빨리 심어줘야 할 것만 같은 느낌.
투두둑-
[큭!]
완전히 석화된 나뭇가지가 부서져 내리자 잘 달리고 있던 디네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자신의 코어를 움켜잡았다.
이전 기둥이 부서졌을 때처럼 고통이 몰려온 것이었다.
“야! 디네! 너 괜찮...”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나무에나 신경 써.]
“...알았어. 대신 무조건 버텨라.”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디네가 이를 악문 채 답하자, 이프리프가 태초의 나무를 쓱 응시했다.
다른 이들은 주위를 경계하는데 온 신경을 쓰느라 못 봤지만,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순간 디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만은 지금 이 순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예측했던 대로 세계와 디네는...
‘연결되어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일까.
처음 예상대로 계약으로 인해 바깥세상과 연결이 되어있기에?
만약 그런 거라면 이젠 소환수가 된 실피리오 또한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고 있을 런지.
아무쪼록.
‘젠장... 안 좋군.’
이프리트의 예상보다도 나무의 석화가 점점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무를 심을 장소로 점쳐놓은 곳이 몇 군데가 있었는데, 이 속도라면 그곳에 다다르기 훨씬 전에 나무가 석화되어 죽을 가능성이 100%.
“그럼 어쩌죠? 이프리트님?”
[안타깝지만 장소를 바꿔야겠지.]
“어디로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여야 될 텐데.”
이프리트는 그 말에 딱 1초 고민하더니 답했다.
[어쩔 수 없지. 가는 길이 위험하겠지만 성소로 가야겠다.]
“성소요? 실피리오님하고 합류했던 그곳?”
[그래, 맞아.]
“적들도 장소를 알고 있을 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되레 그곳으로 가려는 거야.]
대개 대부분의 대리자들은 한 번 전투가 크게 일어난 장소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아이템 등등 중요한 단서 같은 건 대부분 싸움날 당시 털리고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이프리트로서는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야. 다른 건 생각이 나질 않네. 미안하다.]
“이프리트님이 미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하하, 그렇게라도 말해주니 고맙군.]
그렇게 세 명이 성소를 향해 방향을 살짝 틀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
거침없이 질주하던 김주희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하게 변함과 동시에 갑작스레 자리에 멈춰 섰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미지의 존재의 기척을.
[뭐지? 갑자기 왜 그러...]
“이거 받아 디네야.”
이프리트가 채 말을 끝낼 새도 없이 김주희는 들고 있던 태초의 나무를 곧장 디네의 어깨로 옮겼다.
이프리트는 그제야 어떤 상황이 발생했는지 깨닫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김주희가 디네를 마주 본 채 말했다.
“디네야. 믿는다.”
[걱정 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잘 도착해서 심어볼 테니까.]
디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한쪽 팔로는 나무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론 코어를 붙잡은 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디네를 보낸 지 몇십 초 지났을까.
“나와. 알고 있으니까.”
산호 바위의 위로 도약해 올라간 김주희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흐음, 여전히 예리하시군요. 주희씨는.”
스슥-
산호와 수풀로 가려진 바위 뒤에서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화한 얼굴과는 정반대의 상상할 수 없는 어마무시한 위압감을 지니고 있는 자.
“에반... 비텔스바흐.”
김주희는 조심히 창대를 움켜쥐었다.
* * *
“잘 지내셨나요 주희씨?”
에반이 웃으며 물어왔다.
“......”
김주희는 이에 주위에는 누가 더 없는가 더 신경을 곤두세울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런 김주희의 마음이 보였는지 에반이 말했다.
“이 주위엔 지금 저를 제외한 다른 알베타스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주희씨.”
“......”
순간 그 말을 어떻게 믿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김주희였지만 그녀는 애써 그 말을 삼켰다.
지금까지의 에반의 행동거지로 보건대 그는 이젠 비록 인간이 아닐지언정 인간에게 적대적이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은 싸우기조차도 싫겠지.
인간 측에는 그가 마음속으로 연모하던...
“이벨린씨의 안부가 궁금해서 접근한 건가요?”
김주희가 대뜸 물었다.
그러자 미소 짓고 있던 에반의 입가에는 단번에 씁쓸함이 맺혔다.
“흠... 그것 때문에 접근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예, 뭐. 언제나처럼 지내고 있어요. 언제나처럼 알베타스족의 위협도 받으면서요.”
“......하하, 그렇군요. 알베타스족 병사들을 전부 제가 컨트롤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뭐, 무사하다니 다행이네요.”
“왜 저를 쫓아온 건가요? 에반? 이벨린씨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저를 죽이려고?”
김주희가 또다시 물었다.
에반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죠?”
“음...”
에반이 턱을 긁적거렸다.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심하던 그가 갑자기 대뜸 툭 말했다.
“주희씨는 사람 마음을 참 잘 읽고 다루는군요. 예전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거 같았는데... 자칫 저도 모르게 물러날 뻔했어요.”
“......”
“분명 이게 원래 주희씨 성격이겠죠. 그때 당시에는 유세현씨가 실종상태라 그랬던 것일 테고.”
“......”
에반의 말에 김주희의 입이 꾹 닫혔다.
에반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나름의 우위를 선점하려 했었는데 그 의도를 간파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김주희가 선제타를 가하려던 찰나였다.
“워워, 진정하세요 주희씨.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주희씨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럼 그냥 에반씨가 여기서 얌전히 물러날...”
“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귀여운 여왕님의 수하 된 입장에서 일 때문에 온 거라서 말이죠.”
“일이요? 무슨...”
“의문을 느꼈거든요. 전투가 일어난 장소에서 왜 주희씨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건지. 그곳에 기둥이 있을 텐데.”
에반의 황금빛 눈동자가 순간 번뜩 빛났다.
이에 김주희는 잠시 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답하는 게 좋을 것인지.
최대한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 내기 위하여.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처적-
그녀는 천천히 창대를 들어 에반을 향해 겨눴다.
이렇게 망설였다 답하는 것은 대개 거짓말.
그것을 머리 좋은 에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
에반은 처음부터.
‘거의 확신을 가지고 접근한 거였었어.’
어차피 결론은 나 있었다.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으로 시간을 최대한 벌어 디네가 도망칠 시간을 주었냐 못 주었냐의 차이만 있을 뿐.
마음의 결정을 내린 김주희가 애써 피식 웃어 보이며 에반을 향해 말했다.
“에반씨, 혹시 아주 예전에 우리가 한참 토벌을 끝없이 하고 다닐 때 우릴 지켜보던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매겼던 랭킹 기억나세요?”
에반은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랭킹이요? 지금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질문... 아~! 혹시 아주 예전에 사람들이 맘대로 매겼었던 그거 말인가요?”
“예. 그때 제가 아마 랭킹 4위인가 그랬는데, 에반씨는 아마 5위였었죠?”
“으음... 그랬던가요? 관심이 별로 없어서.”
“예. 저도 별로 관심이 없긴 했는데 분명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에반씨. 사람들이 저를 더 높이 쳐준 데에는 아마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김주희가 창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트드득-
창끝에는 순식간에 새하얀 냉기가 맺혔다.
의미를 알아챈 에반이 중얼거렸다.
“후회하실 텐데...”
“그건 5등이었던 당신이 하겠죠.”
“......”
파앗-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날아드는 것으로 대화의 끝을 알렸다.
왕중의 왕(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