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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쾅!
쾅!
콰과광!
눈 한번 깜짝할 사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공방이 순식간에 오간다.
동기가 달라진 만큼 리네리아를 상대할 때와는 한 차례 차원이 달라진 호전성이 아닐 수 없었다.
“죽어라, 이강호.”
[망자의 늪.]
“흠, 싫다만.”
[태양신공, 열화창무(烈火槍武)]
콰아아앙-
서로의 스킬이 부딪치자 어마무시한 반발력이 생성되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물론 둘에게 피해는 딱히 가지 않았다.
‘저놈들 대체...’
전말을 모르는 리네리아가 기분이 언짢아져 인상을 와락 구겼다.
현재 그녀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 또한 쿠룬족의 왕으로서 일반 대리자들 따위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공포의 존재이건만...
이강호 저놈이 대체 뭐기에...
‘좀 열받네?’
사실 지금 이강호를 처음 보는 것이라 한들, 자신의 왕인 알베타스에게 들은 것이 많았기에 리네리아 또한 그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을 이끄는 영웅.
레드드래곤의 브레스에 필적하는 화염을 내뿜을 수 있는 강력한 화염계 능력자.
‘하지만...’
그 따위 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놈의 정체성은 인간에 불가할진대.
마음 같아서는 끼어들어 힘을 뽐내며 둘 다 박살을 내버리고 싶은 심정.
허나.
‘지금은...’
리네리아의 시선이 석탑을 향해 쓱 돌아갔다.
현재 그녀에게 있어선 개인의 자존심보다도 여왕을 위한 임무가 더 우선 사항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석탑에 몰래 다가가기 위해 딱 한 발자국을 움직이려던 찰나.
후웅!
콰아앙!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여태껏 싸우고 있던 크라베스의 망령과 이강호의 불꽃이 동시에 리네리아를 향해 날아왔다.
제지당한 리네리아는 잔뜩 기분이 언짢아져 그들을 바라봤다.
“왜, 계속 나 무시하면서 싸우지. 무시하고 잘 싸우더만.”
“크크크, 그렇다고 네가 저곳에 가게 둘 수는 없지. 안 그런가 이강호?”
“......”
이강호가 말없이 리네리아를 향해 창대를 뻗었다.
더 움직이면 크라베스와 함께 협공하겠다는 간접적인 의사표현이었다.
체면을 완전히 구긴 리네리아의 이마에는 분노로 인한 핏대가 뽈록 돋았다.
“하, 이놈들이 진짜...”
무시하더니만 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래... 한 번 해보자 이거지. 그래 둘 다 완전히 찌그러뜨려주마...”
슈슉-
[전사의 분노]
잔뜩 열이 뻗친 리네리아는 그 기분을 표현하듯 거친 스킬을 사용하며 둘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강호는 그런 리네리아의 행동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완벽한 삼파전의 시작.
시선을 석탑에서 완전히 돌리는데 성공한 것이었으므로.
‘작전은 성공했다. 김주희, 이젠 너만 믿는다.’
이강호는 곧장 불꽃을 일으키며 전사의 분노를 사용한 리네리아를 맞았다.
* * *
피융!
콰아아앙!
격렬한 파공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전장의 외곽.
카시우스가 카그네프와 키쿨의 시선을 끄는데 이어 이강호가 리네리아와 크라베스의 시선을 끄는데 성공하자 김주희와 일행은 비로소 이동을 개시했다.
스슥- 스슥-
한 걸음, 한 걸음.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을 기하고 또 기하고.
그렇게 목표까지 100m.
50m.
10m.
들키는 순간 모두가 몰려올 것이기에 김주희는 석탑에 근처에 다다라선 숨까지 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눈앞에 둔 석탑의 입구.
[지금이 타이밍 같은데?]
이프리트가 말했다.
김주희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카그네프와 크라베스, 키쿨과 리네리아는 최정점에 다다른 대리자들, 이강호와 카시우스가 시선을 끌고 있다 한들 은연중에, 아니 지금조차도 석탑을 감시하고 있을 게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린다. 선배가 확실한 길을 만들어줄 때까지.’
화르륵-
아니나 다를까 시간을 계산해 일행이 어디까지 왔을지 대략적으로 추측한 이강호가 어마무시한 마력을 발산하며 불꽃을 일으켰다.
이강호가 지니고 있는 태양신공의 성명절기.
[멸격대염천(滅激大炎天)]
콰아아아아앙-
멸격대염천이 퍼져나갔다.
‘미친, 갑자기 이런 큰 공격을 감행하다니.’
어마무시한 화력이 아닐 수 없었기에 아무리 크라베스와 리네리아라고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멸격대염천이 그들이 싸우고 있던 전장을 떠나 카시우스가 전투하고 있는 공간에까지 영향을 미친 찰나였다.
‘지금이다!’
눈을 번뜩 빛낸 김주희가 이프리트와 디네의 몸을 부여잡고는 석탑내부로 뛰어들었다.
김주희는 입구로 들어오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두근- 두근-
성공일까 아니면 실패일까?
[놈들의 반응은... 딱히 없군.]
“후...”
김주희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방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프리트가 말했던 것처럼 아담한 나무가 있었다.
“이게... 태초의 나무.”
[그렇다. 이게 바로 정령들의 시작점이자 이 세계의 시작점인 태초의...]
“바로 시작하죠.”
푹-
김주희가 말을 자르며 미리 제작해두었던 삽을 포켓에서 꺼내 뿌리를 덮고 있는 돌을 향해 곧바로 삽질을 시작했다.
마력을 이용해 파면 정말 순식간이겠지만, 적에게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에 그러지 않았다.
[음...]
이에 이프리트는 씁쓸해하면서도 마찬가지로 삽을 들었다.
태초신이자, 이 세계의 근본인 이 나무를 보고도 저 정도의 반응이라니.
그들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것을 경험했고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필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힘든 일을 수없이 겪었겠지.’
이프리트 마음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 * *
“후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이제 나머지 뿌리는 자르고 나무를 꺼내 보죠.”
[음, 이 정도로 말인가? 내 생각엔 좀 더 파서 뿌리를 더 남겨야 될 것 같은데...]
“만약 괜찮다면 이 정도로도 충분할 거예요.”
[......]
김주희의 말에 이프리트가 불안한 듯 태초의 나무를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주희가 남기려 한 뿌리의 길이가 너무 짧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김주희는 괜한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도록 곧장 부가설명을 덧붙였다.
“저도 불안해서 제가 살았던 세계 기준으로 대충 두 배 정도 더 길게 남긴 거예요.”
[두 배? 이 짧은 게 말인가?]
“예. 대략적이긴 해도 제가 살던 한국에선 이거에 1/2만 돼도 잘 옮겨 심어졌어요. 잔뿌리가 많은 것도 비슷하고요.”
[흠... 그런가...]
“예, 그러니 다시 심는 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그보다도 지금 걱정해야 될 건...”
나무뿌리를 자르고 나무를 지면에서 빼내는 순간 세계가 붕괴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럼, 시작할게요.”
김주희가 창대를 치켜세우자 디네와 이프리트가 동시에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정령왕이라고 할지언정 이것만큼은 그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가설은 들어맞을 것인가 아니면 틀려 파멸할 것인가.
촤자작-
창이 뿌리를 자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태초의 나무가 마치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 마냥 덜덜 떨며 나뭇가지를 움찔거렸다.
마치 괴롭다는 듯,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듯.
동시에.
콰앙-
콰과광-
마치 기둥이 부서졌을 때처럼 세계가 진동하고 요동쳤다.
쿠구궁-
거친 지진이 일어나고, 난데없이 태풍이 휘몰아친다.
김주희는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설마 안 되는 것인가? 가설이 틀린 것인가? 지금이라도 멈춰야 되는 것인가?
‘젠장...’
김주희는 쥐고 있던 창에 힘을 뺐다.
그러자.
[그냥 계속해.]
이프리트가 말했다.
방금 전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에 대비되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예? 하지만...”
[어차피 나무를 옮기지 못한다면 조만간 알베타스던 크라베스던 누군가에게 부서지게 되어 있어.]
“그거야...”
[그러니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난 이 세계를 지키려 노력해 준 너희에게 주고 싶다. 우리의 목숨, 우리의 세계, 그리고 우리의 의지가 담겨 있을 그 신물 파편이라는 것을. 이 세계를 대표하는 정령왕의 이름으로. 그러니 계속해 김주희양.]
“...이프리트님...”
[어서, 이러다간 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알아챌지도 몰라.]
“......”
창대를 쥐고 있는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간다.
김주희는 쓱 디네를 쳐다봤다.
“디네야...”
[야, 뭐 하냐. 이프리트님이 방금 한 말 못 들었어?]
“야...”
[빨리하라고 짜샤. 나 튜토리얼 때부터 같이 다닌 정령이야~ 나 디네라고. 최선 다해준 거 잘 알고 있고.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도 됐어.]
“......알았어.”
서걱-
김주희가 창을 움직여 지면에 연결되어 있던 나머지 나무뿌리를 베었다.
쿠구구구-
그러자 세계는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구-
마치 정말 천장이 부서질 것처럼.
일행은 잠시 자리에 서서 긴장한 모습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지켜봤다.
[......]
쿠구구구-
얼마나 지났을까.
진동이 수그러든다.
신물 파편은 등장하지 않았다.
굳어 있던 김주희와 디네, 이프리트의 표정은 점점 밝게 펴졌다.
성공한 것이었다.
* * *
쿠구구구구구-
‘제길, 뭐야?! 하필 왜 지금...’
진동이 일어나자 싸우고 있던 대리자들의 이목이 대번에 석탑으로 집중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첫 기둥이 부서진 이래로 종종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걸 그들도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은 마지막 기둥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누군가 몰래 석탑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부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대참사가 아닐 수 없기에, 그들은 진동이 수그러들 때까지 좀처럼 석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스스-
그렇게 진동이 완전히 수그러들자.
‘흠...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클리어된 건 아니군. 역시 단순한 우연이었나.’
키쿨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안도해하며 다시 적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이강호는 그런 적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성공했군.’
일어난 현상을 통해 작전이 성공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내가 해줘야 할 일은...’
이강호는 거칠게 싸우고 있는 실피리오를 향해 쓰윽 시선을 돌렸다.
* * *
“빌어먹을...”
한편 카그네프와 키쿨, 실피리오와 카시우스는 정말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카시우스으으!”
카그네프가 카시우스를 향해 거칠게 주먹을 내질렀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그는 고작 정령 따위의 환심을 얻기 위해 신물 파편을 포기하고 자신을 가로막은 카시우스가 굉장히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바람의 정령왕 따위가 대체 뭐라고!
“지금이라도 다시 우리 쪽에 붙어라 카시우스! 그렇다면...”
“나한테 신물 파편을 양보할 텐가?”
“뭣...?!”
“그럴 생각은 없지 않나 카그네프.”
“이게...!”
콰아앙!
궤적을 따라 내지른 카그네프의 녹빛 마력이 카시우스의 전신을 덮친다.
카시우스는 순간적으로 실피리오의 바람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것을 회피함과 동시에 화살세례를 날렸다.
[황혼의 소나비]
슈슈슈슉-
그리고 실피리오의 바람으로 강화된 카시우스 황혼의 소나비는 이전보다도 훨씬 강하기 그지없었다.
“크으으...!”
카그네프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1:1의 상황이라면 전력을 발휘해 적을 쳐 죽이고 갈 수라도 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만 계속 질질 끌리는 것이다.
“귀찮군. 저 합공...”
키쿨도 상당히 까다로운지 질색하는 표정을 내보였다.
다만 그는 카그네프처럼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로서는 급할 게 없는 탓이었다.
만약 알베타스, 그의 왕과 다른 수하들이 이곳에 당도하게 되면 그땐 이곳에 있는 모두가 몰살당하고, 신물 파편은 계획대로 왕의 손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렇다.
그는 그저 기다리면 되었다.
“크으으으...!”
결국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카그네프가 자존심을 굽히고 카시우스를 향해 외쳤다.
“카시우스! 잘 생각해라! 머지않아 저놈들의 왕이 이곳에 도착할 거다! 그러면 힘을 소비한 우리는 어떻게 될 거 같으냐! 아직 늦지 않았다! 일단은 합공해서 저놈이라도 쓰러뜨리...”
그때였다.
저편에서 여태껏 크라베스, 리네리아와 잘 싸우고 있던 이강호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
갑작스런 등장에 키쿨과 카그네프의 눈은 순간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손을 높이 치켜세운 이강호가 작게 읊조렸다.
[대염천하(大炎天下)]
쿠구구궁-
실피리오의 강풍을 타고 이강호에게서 발현된 대염천하가 마치 세상을 뒤덮듯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왕중의 왕(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