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602화 (588/612)

-------------- 596/606 --------------

치이익-

[크윽!]

무언가 익는 소리와 함께 에우로네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통증.

[큭, 무슨...]

그녀는 통로 저편에 있을 적을 경계하면서도 눈동자를 흘겨 부상당한 자신의 신체를 재빠르게 살폈다.

[......]

해일의 컨트롤을 위해 반사적으로 내민 오른팔 일부가 새까맣게 타 그을렸다.

순간적으로 한 방어라 불완전한 방어였다곤 하나 해일이 뚫린 것이다.

보통의 불꽃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

[네놈... 정체가 뭐냐.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모습을 드러내라.]

에우로네가 잔뜩 적의를 드러내며 읊조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두 명의 인물이 쓱 나타났다.

이글거리는 창대를 잡고 있는 남자와 새하얀 서리가 서린 창을 쥐고 있는 여자.

둘을 확인한 이프리트는 입가에 힘겨운 미소를 머금었다.

[많이 늦었군. 이강호.]

지금 그로서는 누구보다도 반갑기 그지없는 인물들.

“아무도 지리를 알려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정말 어쩔 수 없었겠어...]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나중을 위해 쉬고 있어라. 이놈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후웅!

툭 말한 이강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에우로네는 이강호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경악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무슨...!]

너무 빨리 움직여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닌, 정말로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블링크?’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에우로네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마법 블링크.

‘하지만 그건 시전 하는데 시간이 소요되고 마법진이 생길 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화륵-

그녀의 근처에 남겨져 있던 아주 작은 불씨.

해일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갑자기 타오르더니 불씨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이강호가 모습을 나타냈다.

[...!!]

에우로네는 이강호를 포착하자마자 당황하여 다급히 해일을 만들어냈지만 안타깝게도 살짝 늦은 뒤였다.

화르륵!

쿠구구궁!

[꺄아아아악-!]

거센 청염이 에우로네의 전신을 순식간에 휘감는다.

이번 불꽃은 방금 전 그녀가 겪은 불기둥보다도 훨씬 강한 불꽃이 아닐 수 없었다.

치이이익-

극심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체내에 있는 수분이 증발되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한다.

쩌저적-

이윽고 하나 둘 갈라져 떨어져 내리는 비늘과 피부조각.

에우로네는 이를 악문 채 정신을 가다듬어 청염을 잠재우기 위해 해일로 에워쌌으나 한번 몸에 붙어버린 불꽃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왜... 대체 어째서!!’

에우로네의 입장으로선 미치고 펄쩍 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베타스화까지한 자신이! 상성적으로도 우위인 자신이! 이렇게 온 힘을 사용하고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꺼지지 않는 거냔 말이다!!

트드득-

신체가 타들어가는 속도가 점점 가속된다.

이대로면 죽음은 거의 확정이었다.

에우로네의 머릿속에선 순간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당한다고?’

이토록 허무하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어!’

악에 받친 에우로네가 핏대가 잔뜩 선 눈을 번뜩였다.

쿠구구구-

그러자 진화의 종족 알베타스족이기 때문일까.

트득-

트드득-

그녀의 몸이 닥친 위기에 맞춰 몸 안에 마력을 격렬히 빨아들이며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

비늘이 더욱 두터운 상태로 재생성되고...

[으아아아!!]

안 그래도 새파랗던 피부는 더욱 푸르게 변하며 마치 불길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견고하게 바뀌었다.

솨아아-

그리고 그런 피부사이에서 생성되는 물길.

‘무슨...’

이강호는 에우로네가 실시간으로 모습을 변경하며 자신의 청염을 견뎌내기 시작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중에 있을 전투를 고려하여 딱히 전력으로 공격한 건 아니었다 해도 그럼에도 이건 나름 큰 일격이었다.

고유특성과 특수특성, 마력까지 세 가지를 모두 이용한 연속공격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이런 식으로 버텨?’

후웅!

이강호가 휙 창을 휘둘렀다.

[크윽! 어딜!]

에우로네는 괴로워하면서도 창대를 손으로 붙잡아 막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그대로 창날에 찔렸을 테지만 너무 접근해 있어서 생긴 일이었다.

“김주희!”

그러자 이강호가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알고 있어요 선배!”

김주희가 곧장 에우로네를 향해 돌진했다.

[크윽!]

에우로네는 그런 김주희의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이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진화와 불꽃을 막는데 이미 마력의 대부분을 사용한 터라 그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슈욱-

이윽고 소리보다도 빠르게,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김주희의 창이 에우로네를 향해 쇄도했다.

날카로운 창끝을 본 에우로네는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건...’

못 피한다.

허나, 그때였다.

쿠구궁-

콰광!

김주희의 창끝이 에우로네의 목에 다다르기 직전, 에우로네와 이강호가 있던 바닥이 난데없이 푹 꺼지더니 자이언트 웜의 거대한 아가리가 튀어나왔다.

“?!”

파앗-

이강호와 김주희는 반사적으로 뒤로 도약해 그것을 회피했지만, 자이언트 웜의 목표는 처음부터 에우로네였는지 그녀를 삼키기 무섭게 방향을 틀었다.

누가 봐도 이탈하려는 심산!

이강호와 김주희는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동시에 자이언트 웜에게 날아들어 그 거대한 몸을 난자했다.

촤자자작-

자이언트 웜은 순식간에 분해되어 살점과 내장, 피를 지면에 흩뿌렸다.

‘어디지... 어디...’

그리고 그 떨어지는 잔해 속에서 김주희와 이강호는 에우로네를 찾기 위해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전후좌우, 위아래.

‘찾았다!’

이윽고 잘려나가지 않은 웜의 아가리 쪽에서 이강호보다 먼저 에우로네를 발견해낸 김주희가 눈을 번뜩이며 에우로네를 향해 날아들었다.

에우로네는 지금 이강호의 불꽃 때문에 체력과 마력을 거의 다 소진한 상황.

붙기만 한다면 죽이는 건 일도 아니기에 김주희는 상대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선 1도 걱정하지 않았다.

허나.

푸짓-

에우로네의 근처에 다다르기 직전, 거대한 웜의 머리통 뒤편에서 갑작스레 알 수 없는 분비물이 발사되어 김주희에게 날아왔다.

‘으응?! 이건?’

김주희는 그것이 독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재빠르게 몸을 틀어 회피했다.

치이익-

물론 완벽하게 회피하진 못했지만.

솨아아아-

아슬아슬하게 스친 얼굴피부가 녹빛으로 변하며 일부 녹아내린다.

김주희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 독... 뭔 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성저항력으로 볼 때 이건 보통 강한 독이 아닌 탓이었다.

거의 레피아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최대한 마력을 아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에 김주희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광범위하게 빙백신장을 날렸다.

피잉!

콰과과과!

순간적으로 발사된 어마무시한 한기가 앞으로 나아가며 자이언트 웜의 살과 피, 그 외 모든 것을 얼려버린다.

[크윽! 이런...!]

에우로네가 자신의 마력을 다 쥐어짜내 해일로 맞받아 치려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트드드드득-

해일조차도 맞닿은 앞부분부터 순식간에 얼어 결빙되어 버린다.

빙백신장은 바로 그 너머에 있던 에우로네의 목숨까지 순식간에 위협했다.

그러자.

[쯧, 결국 이렇게 되는군.]

스슥-

지금까지 줄곧 죽은 자이언트 웜 머리 뒤편에서 정체를 숨긴 채 숨죽이고 있던 존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에우로네. 그러게 내가 그리 말했잖냐. 단독행동 좀 하지 말라고.]

얼굴부터 시작하여 몸통, 배, 꼬리까지 전신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자글자글한 주름.

16개의 다리를 지니고 있는 놈은, 언뜻 봐도 애벌레에 다리를 붙여놓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애벌레, 과거 캐트필터족의 왕이었던 자.

[캐르피스.]

솨아아-

그는 빙백신장의 앞을 가로막기 무섭게 강력한 독을 내뿜어 빙백신장을 저지시켰다.

저지시키기 무섭게 캐르피스가 에우로네를 향해 말했다.

[에우로네. 너 때문에 귀중한 자이언트 웜 한 마리를 잃었다.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

[아, 미안하다고. 아까부터 계속 미안하다고 했잖냐. 기왕 구해주러 온 거 좋게 좋게 좀 구해주면 안 되냐? 나도 잘못한 거 알고 있...]

[에우로네. 난 지금 여왕님께 뭐라고 보고를 들여야 할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너도 알고 있잖냐. 여왕님께서 이 웜들을 얼마나 아끼시고 있는...]

[아, 잘 알았고! 죄송하고! 미안하니까! 지금은 저놈들부터 좀 어떻게 해봐!! 이러다 나 죽게... 으아아! 온다! 와!]

에우로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강호와 김주희는 그새 양쪽으로 진을 펼친 채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대로 접근하게 놔두면...

‘난 100% 죽는다!’

[야! 캐르피스! 지금 내 말 안 들려? 저놈들 온다니까! 어떻게 좀 해봐! 쟤네 저기서 더 접근하면 너는 몰라도 나는 절대로 도망 못...]

[하아... 에우로네. 너 나한테 목숨 빚진 거다.]

지그시 한숨을 내쉰 캐르피스가 4개의 손으로 동시에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쿠구구궁-

마치 지진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 마냥 산호 동굴 사방 전체가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이강호와 김주희는 그 울림에 적에게 다가가는 속도를 더 높였다.

클리어가 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유적지인 이 산호 동굴이 이렇게 흔들릴 수 있는 요인은 지금으로선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콰광!

이윽고 예상했던 것처럼 곧바로 자이언트 웜들이 사방에서 산호벽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무려 세 마리였다.

-키아아악!

괴성을 내지른 자이언트 웜들은 서로 엉키고 설키며 이강호와 김주희가 에우로네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통로를 순식간에 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캐르피스의 몸에서 확산되는 녹빛의 독.

“김주희! 단번에 뚫는다!”

“알겠어요! 선배!”

후욱-

콰아아앙!

이강호와 김주희가 곧장 광역공격으로 자이언트 웜의 육체를 날렸다.

그러나.

“쯧, 놓쳤군.”

이강호와 김주희가 길을 뚫었을 땐 그들은 이미 그곳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 * *

“좀 괜찮아졌나? 이프리트.”

[하하, 덕분에.]

김주희와 이강호가 관문이 있던 장소로 되돌아가자 이프리트가 좀 괜찮아졌는지 평소 때처럼 명쾌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반겼다.

[그래서 에우로네란 알베타스족은 잡았나?]

“아니, 놓쳤다. 방해가 들어와서.”

[방금 전 느껴졌던 그 큰 진동이 그거였나 보군.]

“그렇다.”

[후우... 아깝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프리트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강호는 그런 이프리트를 향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프리트,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지? 이곳이 뚫리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다만.”

[뭐, 그렇지.]

“계속 이곳을 어떻게든 지킬 건가?”

[아니, 그러지 않을 거다. 이제 이곳을 지키는 건 별 의미가 없게 되었거든.]

“뭐? 그렇다는 건...”

[그래, 다른 장소가 뚫렸다.]

“어디지? 누가 뚫린 거냐.”

[몰라. 그것까진 알 수 없어. 그저 뚫렸다는 것만 느껴질 뿐...]

“뭐라고? 너희들... 정령왕급 되는 이들은 타 정령의 기척을 느끼거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하하, 그럴 리가. 나는 왕이지 신은 아니라고?]

“그럼 지금까지 발 빠르게 대응했던 건...”

[그건 미리 준비를 해뒀었기 때문이지. 하하하!]

이프리트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김주희와 이강호는 묘한 표정이 돼서 서로를 바라봤다.

[후우... 뭐 아무쪼록...]

살짝 한숨을 내쉰 이프리트가 천천히 관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김주희와 이강호를 한 번 쓱 훑어보는가 싶더니 문 정중앙에 손을 얹었다.

끼익-

쿠구구궁-

육중한 관문이 환한 빛을 내며 활짝 열린다.

문의 너머 저편 새롭게 펼쳐진 세계를 본 이강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나? 이 문을 우리에게 이렇게 순순히 열어줘도.”

[하하, 너희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나를 죽이고 뚫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뭘... 게다가 너희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차피 못 막아. 그렇다면 시간 버릴 필요 없잖아?]

“...적의 현재 위치는 파악이 가능한가?”

[아니, 전혀. 내부 곳곳에 감지마법을 펼쳐놓긴 했지만 저곳의 특성상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법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데다 아직 남아있는 건 건든 이가 없어서 말이지.]

“그렇다면 아군의 위치는?”

[말했잖아. 난 신은 아니라고.]

“불가능하다는 거로군.”

[그래, 관문 덕에 죽진 않았을 테니 어떻게든 합류해서 도와주고는 싶지만 현재로선 방법이 없...]

[제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프리트님! 내부에서 실피리오님의 기운이 느껴져요!]

이프리트가 하던 말을 채 다 마칠 틈도 없이 통로 저편에서 디네가 쪼르르 튀어나오며 당돌하게 말했다.

[뭐?]

이프리트의 얼굴은 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실피리오와 카시우스(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