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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603화 (58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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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기운이다.

그런데 한낱 상급 정령에 불과한 저 아이가 기운을... 그것도 특정 기운을 정확히 느끼고 읽어낼 수 있다니?

[......]

과거 스쳐 지나가듯 보레아스가 내뱉었던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쩌면 현재 특별한 정령은 정령왕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과 우연히 계약이 가능했던 디네일지도 모른다는 그 말.

[언제부터 기운을 읽을 수 있었지? 혹시 처음부터?]

[예? 아니요. 처음부터는 아니고 더럽게 아픈 이후부터 뭔가 기이한 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두 번째 아픈 이후로 더 뚜렷하게 체감되기 시작했어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 건 극히 최근이고요.]

[그렇군... 알겠다.]

이프리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강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너희가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겠군. 이강호.]

이강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네가 그나마 제일 말이 잘 통하기에 디네에게 물어 구태여 이쪽으로 왔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접근한 거라 갑자기 뭔가 찜찜해졌나?”

[하하! 그럴 리가! 설사 그렇다 해도 그런 걸 따질 여유도 없고.]

“그렇다면...”

[그래, 바로 실피리오에게 가자고. 안내해 줄 수 있겠지? 디네양?]

[물론이죠! 이프리트님!]

[좋아, 그럼 앞장서거라.]

[예!]

디네가 앞으로 쪼르륵 나서자, 김주희와 이강호, 이프리트가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몇 초를 질주했을까.

“야 디네야, 좀 더 빨리 못나냐? 지금 위급한 거 몰라? 이러다가 실피리오 그 싸가지가 당하기라도 하면...”

[아오 시끄러워! 이게 내 지금 최고 속도야 이년아! 누군 빨리 안 날고 싶어서 안 나는 줄 아나!]

“쯧쯧, 느려 터져서는...”

[어우, 이게... 너 나중에 보자!]

“그러시던가~ 어차피 한 주먹도 안 되는 게~”

[으으! 이게 정말 참아주니까! 야 이년아! 내가 지금...]

둘은 여느 때처럼 티격태격 대기 시작했지만 이강호나 이프리트는 침묵한 채 제지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노는 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

둘은 그렇게 실피리오의 근처에 다다를 때까지 끝없이 티격태격했다.

* * *

[하아... 하아...]

적들을 피해 도주하고 있던 실피리오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체력과 마력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코어를 외부로 꺼내 살폈다.

[크윽...]

상대가 부술 마음이 없어 전혀 손상이 가지 않은 줄 알았건만 무리해서인지 코어에는 약간의 균열이 가 있었다.

‘빌어먹을... 이래서인가... 좀처럼 회복이 안 되는 게...’

잘 쉬면 충분히 완전 회복이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이번싸움에선 더 이상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실피리오는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머리를 박박 긁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다.

상대를 이길 방법도, 기둥을 지킬 방법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떠오르는 건.

패배, 멸망, 안 좋은 키워드들 뿐.

[크윽...]

그럼에도 실피리오는 일단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있는다고 낫는 것도 아니었으며, 패배자 마인드로 그저 포기하고 가만히 당해주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도저히 맞지 않았다.

어떻게든 발목을 잡아 주리라.

귀찮게, 짜증나게,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떠오르도록.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우선은 그곳으로 가야겠어... 그곳에는 내 코어를 회복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떤 특정 장소를 떠올린 실피리오가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정령신이 직접 창조한 장소로서, 정령왕들에게는 [성소]라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

‘과연 열릴까...’

성소는 특정 조건하에서만 열리지만, 그 조건을 그 누구도 몰라 거의 태초부터 존재해 온 실피리오조차도 운으로 지금껏 단 세 번 밖에 드나들어 본 적이 없었다.

[후우... 후우...]

그렇기에 사실상 현재 하는 행동은 거의 도박적인 수.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실피리오는 정령왕이 아닌, 정령계를 사랑하는 하나의 정령으로서 성소가 열릴 거 같다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끼이익-

그런 실피리오의 직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성소의 문은 실피리오가 다가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후우... 후우...]

실피리오는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성소의 가장 안쪽, 금지된 구역으로 향했다.

외부와 다른 곳은 이전 드나들 때 한 번씩 전부 봤었기에, 희망이 있다면 지금은 그곳밖에 없었다.

실피리오가 금지된 구역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치 컴퓨터 경고음이 울려 퍼지듯 반복되는 경고가 울렸다.

‘크윽...!’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실피리오를 포함한 정령왕들이 이 금지된 구역에 지금껏 발을 디디지 않은 이유였다.

실피리오는 이 경고를 애써 무시해 가며 더더욱 내부로 발길을 옮겼다.

‘제발... 제발... 내 코어를 바로 고칠 방도가 있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금지된 구역은 꽤나 커다랗기 그지없었지만 외길로 되어 길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곧 30m 남짓의 거대한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의 중심으로 다가서자 4개의 파여진 홈과 정령어로 된 문구 하나가 그녀의 시야에 비친다.

문구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최후의 문.

[......]

문구를 읽고 뚫려 있는 홈을 쓱 살핀 실피리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 문구.

그리고 자신의 코어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파여져 있는 홈.

이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이 문은...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문은...

그 순간이었다.

“후후후...”

[...?!]

난데없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실피리오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무슨!’

실피리오는 깜짝 놀라 곧장 바람의 칼날을 날렸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것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콰앙!

“후후후, 많이 약해졌군.”

바람의 칼날을 쳐낸 목소리의 주인, 카그네프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그네프... 네놈...]

실피리오는 그런 카그네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어떻게?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알베타스족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뒤 끝없이 이동한 상황.

알베타스 놈들은 그렇다 쳐도 처음부터 자리에 없었던 놈들은 자신의 뒤를 밟을 수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표정이군. 후후후.”

그때 기둥 뒤에서 크라베스가 쓱 모습을 드러냈다.

실피리오는 그제야 자신의 몸에 뭔가 장난질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런...’

몸은 아니었지만 영혼에 이물질이 끼어있었다.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 마치 페인트 마카 같은 이물질이.

[네놈들...]

“호오, 알아챘나? 눈치가 빠르군. 아니, 느린 건가?”

영혼에 해두었던 마킹이 떨어져 나가자 술법을 펼쳤던 크라베스가 큭큭 웃었다.

[네놈... 도대체 언제... 아니 그보다 어떻게 경계하고 있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런 짓을...]

“하하하, 내가 좀 영혼 쪽에선 워낙 대단해서 말이지. 쉬웠다만? 경계하고 있었던 거였나?”

[......]

“하하, 농담이고. 상성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라. 그럴 게 네놈들... 거의 반 영혼체이지 않나.”

크라베스가 손에 영혼의 묶음을 만들어 장난스럽게 쥐락펴락했다.

실피리오는 그런 크라베스의 행동에 이를 갈면서도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함부로 움직이는 순간...

“후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만 그래봤자다.”

스슥-

툭 말한 크라베스의 신형이 순식간에 실피리오의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실피리오는 바람을 이용한 공간지각 능력으로 적이 좌측으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부상당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크으으!]

파앗!

휘이잉-!

“하하! 너무 느리다만?”

바람의 폭풍을 날렸지만 손쉽게 회피.

순식간에 뒤를 잡힌 그녀는 코어를 붙잡힌 채 크라베스에게 제압당했다.

“후후,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다면 죽이진 않을 테니. 카그네프!”

“알고 있다.”

빠르게 다가온 카그네프가 실피리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에 카그네프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실피리오는 스스로의 기억을 잠그려 했지만...

“어림없지.”

[꺄아아아악!]

크라베스는 코어를 압박함과 동시에 영혼을 짓누르며 실피리오가 대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떠냐 카그네프. 뭔가 좀 읽히...”

“쉿, 읽힌다. 그러니 잠깐 조용히 해라.”

기억을 읽는 카그네프의 입가가 씨익 올라간다.

최상급 정령이라 불리는 정령조차도 별로 많은 걸 알지 못하고 있던 것에 비해, 정령왕이 지니고 있는 정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차원이 달랐다.

이 세계의 비밀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기둥의 위치까지.

기억을 읽는 와중 재미있는 것을 읽었는지 중간에 카그네프가 휘파람을 불며 폭소를 내뱉었다.

“휘유~ 정령왕... 이런 걸 여태껏 정령들에게 숨기고 있었던 거냐! 정령들이 알면 까무러치겠는데! 하하하하!”

[...크으으... 네, 네 녀석 대체 뭘 본...]

“뭔데 그러냐 카그네프. 뭘 읽었기에...”

“하하하! 이 멍청한 정령왕들이 뭘 포기했는지 아나! 크라베스!”

“그러니까 뭘...”

“이 멍청한 정령왕들은 이 대리전쟁에 참여하는 걸 거절했다! 스스로! 정령들의 순수함을 지키겠단 같잖은 이념으로! 언젠간 대리자에 의해 멸망할 것을 내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 말에 크라베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어 실피리오를 내려다봤다.

대리자가 되기 위해 끝없는 고통을 인내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한마디 내뱉었다.

“하, 멍청한 놈들 같으니.”

[...네놈이 뭘 안다고 감히 지껄...]

“지껄이고 자시고 너희가 그러니까 지금 이 꼴이 난 건다. 알겠냐?”

휘익-

읽을 걸 다 읽었는지 카그네프가 움켜쥐고 있던 실피리오의 머리를 툭 놨다.

뒤돈 카그네프가 크라베스를 향해 말했다.

“가자, 크라베스. 여기엔 기둥이 없다.”

“으음? 그럼 저 문은...”

“우리에겐 딱히 의미 없는 문이다. 저 년도 잘 모르는 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기둥은 다른 곳에 있다. 가면서 계약대로 전부 알려주겠다.”

“알았다.”

크라베스 또한 휙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실피리오는 묘한 위화감과 함께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자신을...

[네, 네놈들 어째서 나를...]

“살려두는 거냐고? 하하하! 왜인지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아니면 인정하기 싫은 건가?”

[......]

“멍청한 년.”

크라베스는 그 말을 끝으로 카그네프와 함께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실피리오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믿었던 카시우스에게서 몰려오는 그 배반감.

그것은 실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그런 감각이 아닐 수 없었다.

[......]

믿고 있었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흐윽...]

머리는 경고하더라도 카시우스는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는데...

[으아아아아아!!]

성소 내부에는 한동안 실피리오의 구슬픈 포효가 잔잔히 울렸다.

* * *

성소의 바깥,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실피리오가 나오자 그곳에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한 인물이 있었다.

하늘 같은 푸른 머리칼.

[카시우스...]

한껏 퀭해진 눈으로 실피리오가 그를 응시하자 카시우스는 슬픈 얼굴로 실피리오를 향해 다가왔다.

“...어쩔 수 없었다. 실피리오.”

[......]

“난 진심으로 너의 세계를 구하고 싶었어.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알베타스의 공세가...”

카시우스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실피리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조차도 이제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려는 한낱 대리자에 불과했다.

[비켜. 막으러 갈 거야. 어차피 이 세계가 파괴되면 나도 죽...]

“아니. 실피리오. 넌 이 세계가 파괴돼도 죽지 않을 수 있어.”

[...뭐라고?]

“나와 계약을 맺자. 실피리오.”

카시우스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실피리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안에는 하나의 돌이 들려있었다.

평범한 돌이었지만 그것으로 실피리오를 소환함으로써 이제는 바람의 파편으로 바뀐.

과거, 카시우스가 실피리오를 우연히 부르는데 성공했을 때 사용됐던 매체.

아이템명: 평범한 돌(바람의 파편)

등급: 에픽 [?? Rank]

상세정보: 과거 바람의 정령왕 실피리오의 소환에 사용된 매체입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인해 실피리오와 계약할 수 있는 힘을 잃은 상태였으나 직접적인 접촉과 유대감에 의해 힘이 되살아났습니다.

실피리오와 계약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사용조건: 카시우스 델 아르베이트.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정보창을 읽은 실피리오가 허탈한 실소를 내뱉었다.

[이거 때문이었구나.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카시우스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최근에 정말 우연히 봐서 알게 된 거고 난 너를...”

[꺼져.]

“아니 실피리오, 진정하고 내 말을 한 번 들어...”

[꺼지라고 했다. 대리자.]

실피리오의 손아귀에서 만들어진 거친 돌풍이 카시우스를 향해 날아갔다.

카시우스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쿠웅!

[호오, 안 피해? 그래 약화된 내 공격 따위는 피할 가치도 없다 이거지?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이것도 맞아 봐라!]

후우웅!

거친 회오리가 일대를 휘감았다.

“아니, 실피리오. 그런 게 아니야.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을...”

[닥쳐.]

콰아아앙!

실피리오는 카시우스가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공격하고 공격하고 또 공격하고.

“하아...”

이윽고 한숨을 내쉰 카시우스가 실피리오의 팔을 붙잡아 제압했다.

카시우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성을 되찾게 하고, 차분히 대화를 이어나가면 어떻게든 수습이 될 거라 생각했다.

실피리오는 다혈질이지만 바보는 아니니까.

허나.

[찾았다.]

슈슈슉-

카시우스가 채 무슨 말을 꺼내볼 새도 없이 예리한 칼날이 그와 실피리오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흔적을 뒤쫓아온 헤드리아와 캬쟉프였다.

실피리오와 카시우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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