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97화 (58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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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내려앉은 저녁.

알베타스족의 총공격은 그때 시작되었다.

쿠구구궁-

지면을 뒤흔드는 군단의 발걸음 소리가 자욱하게 울려 퍼지고.

위잉- 위잉-

위이이잉-

하늘을 뒤덮은 스카이레블의 날갯짓 소리가 일대를 메운다.

언뜻 보기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병력의 수!

[......]

정령들은 그런 알베타스족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싸움...]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쿠구구구-

황혼의 어스름한 빛이 스카이레블에 가려져 세계가 일시적으로 완전히 어둠이 된 찰나였다.

“공격하라.”

천천히 손을 치켜든 알베타스가 높디높은 절벽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캬아아아!

-키에엑!

알비론과 스카이레블, 그 외 수많은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미친 듯한 돌진을 시작했다.

-캬아악!

쿠구구궁-

마치 바퀴벌레처럼 우르르 돌격하는 수많은 알베타스족.

[큭! 온다! 모두 준비해!]

[정령왕님께서 놈들이 절대 이 절벽을 통과하게 둬선 안 된다고 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자!]

[처음부터 연계기로 간다!]

절벽에 배치되어있던 정령들은 바람과 불, 물과 대지 등등 정령기술을 섞어 사용하는 것으로 능력을 극대화시켜 알베타스족들의 배제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럼에도 알베타스족을 막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콰아앙!

휘이이잉-

쿠구구구구구구!

[크윽!]

[미, 밀린다! 마, 막을 수 없어!]

[이, 이런! 아, 안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령왕이 정령들에게 말은 그렇게 해놨지만 사실 이곳은 최전방, 1차 방어선.

방어의 목적보단 적의 시선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알베타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높지 않은 등급의 정령들로 배치해 놓은 장소였다.

최상급 정령이 일부 배치 되어있긴 하지만 정말 일부일 뿐이고 대개는 상급정령 이하의 정령들이 배치되어있는 것이다.

임시 동맹을 맺은 인간이나 엘프, 블러드 소울, 델바람 이런 존재는 당연히 이곳에는 없었다.

그렇기에 알비론, 스카이레블 정도는 막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존재, 정예가 오는 순간...

[크흑! 부, 분한다! 저런 놈에게...]

“흥! SS랭크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 꺼져라.”

[크윽!]

정령들은 하나 둘, 역소환 되며 빠르게 사라졌고, 절벽이 완전히 점령당하기까진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1차 방어선은 그렇게 쿠룬과 샤크아크를 대동한 알베타스족에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 * *

[놈들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그곳’이... 점령당했다.]

흙의 정령왕 보레아스가 지그시 말하자 실피리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젠장...]

‘그곳’, 절벽 요새는 기둥이 존재하는 동굴로 향하는 최단경로였다.

즉 슨.

[100% 마지막 기둥의 위치를 알아낸 거겠지?]

[그렇겠지. 실피리오.]

[제기랄. 조금만 더 숨기면 됐는데...!]

인간에게 들은 바, 빛과 어둠의 지대 클리어까지 남은 기간은 대략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였다.

그만큼만, 딱 그만큼만 더 버티면 이 세계는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젠장... 빌어먹을...!]

쾅!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실피리오가 산호바위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프리트는 재빨리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진정해라. 실피리오. 이미 엎질러진 일이야.]

[크윽... 하지만...]

[괜찮을 거야. 이럴 때를 대비해서 동맹도 맺어 놨잖냐.]

[...젠장... 그거야 그렇지만 그놈들은 신뢰할 수 없는 놈들이야! 틈을 보이며 되레 기둥으로 향하려 할 거라고!]

[그 말 카시우스도 포함해서 하는 말인가? 실피리오?]

보레아스가 갑자기 끼어들어 말했다.

[...뭐? 카시우스? 카시우스는 제외...]

[그도 대리자다만. 실피리오.]

[카, 카시우스는 달라! 아주 예전부터 나와 함께 했었던 소중한... 나를 배신할 리가 없...]

[그건 과거의 그 아닌가. 지금의 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실피리오 자네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를 그냥 돌려보내려 했지 않았나. 그새 잊은 건가?]

[그, 그건... 어... 어... 아 그래! 대, 대화를 해봐서 알아! 그래! 카시우스는 여전히 그대로야! 내가 보증할 수 있...]

[실피리오. 거기까지.]

이프리트가 양손을 들며 제지했다.

실피리오가 쳐다보자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그런 걸로 대화하고 있을 시간 없는 거 알지? 실피리오? 이 와중에도 알베타스는 진군해오고 있을 테니.]

[...알고 있어.]

[좋아. 그럼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아무쪼록 카시우스던 인간이던 그들도 대리자인 만큼 언제고 우리를 배신하고 기둥을 노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우린 이들을 이용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방어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걸] 사용할 생각인데 모두 동의하나?]

이프리트가 눈앞에 있는 산호돌덩이를 응시했다.

아쿠리네와 보레아스는 이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사용하지 않으면 알베타스를 막지 못한다고 그들 또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피리오?]

[...동의할게.]

그리고 실피리오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찬성을 표했다.

[좋아, 그럼 모두 손을 앞으로.]

스슥-

이프리트의 말마따나 모두가 오래된 산호돌덩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산호돌덩이, 그건 이제껏 단 한 번밖에 사용된 적이 없는 정령신이 남긴 또 하나의 가호였다.

1천 년이란 기간 동안 오직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세계를 조작하여 세계의 지형을 일부 이동시킬 수 있는 유물.

파앗-

그들 모두가 산호돌덩이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넣자 세계가 정령왕들의 의지를 받들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쿠궁!

쿠구구궁!

천둥벼락이 내리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호의 숲, 계곡, 절벽 등등 수많은 지면이 마치 퍼즐처럼 갈라지더니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호 선배... 이건...”

“흐음... 과연, 이렇게 할 생각이었던 건가 정령왕...”

이에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라 이동을 시작한 지면을 경계선에서 내려다본 이강호가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이강호는 사실 정령왕들이 핵심 장소에 인간 진형을 배치시키지 않은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었다.

디네를 봐 동맹을 맺긴 했으나 인간도 결국은 대리자.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근본적으론 인간 또한 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을 겸, 병력도 보존할 겸 이강호와 이벨린은 지금껏 맡은 바 지역만 지키며 정령왕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

세계의 붕괴가 빨라진 것으로 보건대, 슬슬 한계가 와 장소를 바꿔 중요 장소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우리를 이용할 줄이야.’

머리가 좋은 정령왕들이다.

디네 때문에 딱히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통째로 지면과 함께 옮겨 적과 대치시킬 시, 중요 장소에 있다 한들 스스로의 위치를 특정하는데 시간이 꽤나 잡아먹혀 뒤통수를 칠 틈이 없게 된다.

그야말로 정령들에게만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이 정도까지 침략을 당했으면 동맹이고 뭐고 병력을 물리고 이 전투에서 빠지는 게 맞는 판단이었다.

이 정도의 대규모 총공격은 정확한 정보 없이는 결단코 할 수 없는 행동, 중추의 위치는 100% 적에게 발각당한 상태일 터고 한 달이란 시간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이강호와 이벨린이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유.

튜토리얼부터 함께해온 소중한 동료인 디네를 발악도 하지 않고 허무하게 포기할 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유세현이 스스로를 책망하며 망가져 버릴지도 모르기에.

‘그런 일은 절대 벌어져선 안 되지.’

스스스-

마침내 지정된 위치에 도착했는지 지면이 스르륵 내려앉기 시작했다.

쿠구궁-

사람들이 서있던 지면은 주위 환경과 포개지듯 겹쳐지더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어 하나로 합쳐졌다.

김주희가 주위를 두리번 살피며 말했다.

“선배 이곳은...”

“글쎄... 그 거대절벽 뒤인 것 같긴 한데... 디네, 혹시 여기 알고 있는 장소냐?”

[아니. 나도 처음 와보는 곳이야.]

“처음?”

이강호가 순간 눈빛을 번뜩 빛냈다.

정령계 곳곳을 누빈 디네가 모르는 장소인 만큼, 이곳은 예상했던 것처럼 중추로 향하는 길목이 99.99% 틀림없었다.

‘그러니 머지않아...’

알베타스족도 나타나겠지.

앞으로 일어날 전투를 대비해 진형을 바꾸기 위해 이강호가 바뀐 지형지물을 살피려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보글보글-

이강호와 김주희의 앞으로 난데없이 물이 몰려들더니 아쿠리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주희는 아쿠리네의 모습을 보기 무섭게 다가가 옳다구나 따지고 들었다.

“아쿠리네! 이건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죠?”

[미안해요 주희양.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따로 설명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급박하게요? 흠... 그렇다는 건...”

[예, 이렇게 된 마당에 대충 예상하고 계셨겠지만 이 세계의 존폐를 결정짓는 성역이 적에게 발각당했어요.]

“성역이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적을 막아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아쿠리네가 잘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강호는 대번에 입가에 비릿한 실소를 머금었다.

“흠,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 싸우다 죽어라. 이건가?”

[아니에요.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그렇다면 이 주위 지리를 담고 있는 지도를 넘겨라.”

[...흠... 그건...]

“왜, 제공할 수 없나? 우리가 지도를 보고 뒤통수를 칠까봐?”

[......]

“아쿠리네. 우리는 처음 동맹을 맺었을 때 한 약속대로 줄곧 아무런 요구도 없이 지금까지 너희가 배치시켜준 자리를 지켰다. 설령 그게 중요한 장소이던 아니던 관계없이...]

[......]

“하지만 너희는 이게 뭐지? 한 마디 상의 없이 갑자기 지면을 띄워 이동시키고 급하다는 명목하에 적과 싸워달라니. 설마 지면을 띄워 이동시켰으니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우길 생각인 건가? 우리가 만만해 보이나?”

[...그런 게... 그런 게 아니에요 이강호.]

“그렇다면 너희 멋대로 약속을 깨고 이곳에 우리를 배치시킨 대가를 치러라. 정당하게. 그렇게 한다면 너희를 돕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이강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청염이 일었다.

그가 재차 이어서 말했다.

“우린 너희가 좋아서 돕고 있는 게 아니다. 너희 세계가 망하면 ‘디네’가 죽기에, 사라지기에 그렇기에 너희를 돕고 있는 거다.”

[......]

“생각할 시간을 1분 주도록 하지. 결정해라.”

말을 마친 이강호가 몸을 홱 돌렸다.

이에 진심이란 것을 안 김주희와 디네는 아쿠리네와 이강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렇게 1분.

길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답은?”

[그전에 하나 질문할 게 있습니다 이강호. 솔직히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지?”

[당신은 저번에 약 30~40일 정도면 빛과 어둠의 지대를 클리어할 수 있다고 말했었죠?]

“그렇지.”

[당신의 생각에 우리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기묘한 물음이었다.

“아니, 이대로라면 못 버틸 거라 생각한다.”

이강호는 상대를 기만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이 기묘한 물음에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이대로라면 말인가요?]

“그렇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쿠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까 못한 답을 하겠습니다 이강호. 제 답은...]

아쿠리네가 중얼거리듯 답했고, 그 말을 옆에서 들은 김주희와 디네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 * *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장거리 마법수정구.

그 구슬에 비치는 이벨린은 한껏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강호에게 들은 이야기가 그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흠... 아쿠리네가 그런 답을 내놓다니... 어째서 일까요?

-글쎄... 짐작 가는 게 있긴 하지만 확신할 순 없군.

당시 아쿠리네의 답은 이랬다.

[저는 당신들에게 지도를 제공하지 않을 겁니다. 동맹을 끊던 유지하던,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세요.]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것.

명분도 있겠다 거절할 만한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강호? 퇴각할 건가요?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이강호가 쓱 디네의 얼굴을 살폈다.

디네는 당장이라도 울 것 마냥 훌쩍이고 있었다.

[강호 오빠 말대로 정말 못... 막는 걸까?]

“어휴, 강호 오빠 확률론적인 거 너도 알잖아. 좀 많이 힘들다는 뜻이지. 세상에 100%는 없어. 너도 잘 알잖아.”

[그렇지만... 인간 측이 퇴각해버리면...]

“걱정 마라. 퇴각은 안 할 거니까.”

이강호가 디네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디네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정말로?]

“물론이지. 다만 지금부터는 우리 마음대로 행동할 거다.”

“예? 그래도 될까요? 선배?”

“아마도.”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아쿠리네의 그 말.

어쩌면 그녀는 이강호의 의도를 읽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이대로라면 못 버틸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 이 말에 숨겨져 있는 의미, 수동적인 상태에서는 결코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그 의미가 담긴 말을...

‘그렇다면 움직여도 괜찮을 거다.’

이강호는 그리 생각하며 창을 움켜쥐었다.

기둥 공방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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