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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회랑에서 말인가?”
[그렇다. 솔직히 답해다오.]
“......왜 그걸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방에서 신에게 얻어낸 맹약은...”
잠시 망설이던 유세현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답했다.
마왕대 마왕으로서, 상대를 기만하지 않은 진실된 답이었다.
‘맹약이라고?!’
순간적으로 기이한 느낌을 받은 벨제뷔트가 대화를 엿듣기 위해 다급히 귓가에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유세현의 말은 이미 끝난 뒤였다.
‘제기랄!’
벨제뷔트가 이를 악물며 분통을 터트렸고, 유일하게 유세현의 말을 들은 루시뷀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묘한 말을 내뱉으며.
[자, 그럼 마무리를 지어볼까. 유세현.]
루시뷀트가 양손으로 거대한 대검, 루베르크를 움켜쥐며 자세를 잡았다.
유세현도 이에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쿠구구궁-
마의 정점, 두 존재의 전신에서 죽음의 근원인 어둠이 거칠게 터져 나온다.
줄곧 지켜보고 있던 마족들은 그 기세에 순간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투감각이 높고, 본능이 뛰어난 그들은 느낀 것이다.
이번 합이 끝을 보게 될 마지막 격돌이라는 것을.
스슥-
쾅!
순간적으로 잔상을 일며, 서로의 검이 맞붙었다.
치지지직-
쾅!
한 번 한 번, 검이 맞붙을 때마다 상상도 하지 못할 폭발음이 일며 충격파가 퍼져나가고 불꽃이 튄다.
두 존재는 자리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마치 물러나면 끝이라는 듯.
치릿!
콰과광!
순간적으로 어마무시한 크기의 흑뢰가 유세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유세현은 그것을 몸을 틀어 회피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전한 절기.
콰아아앙-
정말 타이밍 좋게 시전한 천마혈자상이었지만 흑뢰가 유세현에게 닿지 않았듯, 천마혈사장 또한 루시뷀트에겐 닿지 않았다.
둘은 자세를 다잡기 무섭게 다시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휘익-
콰아앙!
트드드득-
검을 맞댄 두 인물의 팔이 너나 할 것 없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린다.
“허억... 허억...”
[후욱... 후욱...]
두 인물 다 마침내 체력적 한계에 봉착한 것이었다.
[......]
“......”
마주 보고 있던 두 인물의 시선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소수의 마력과 절기 한방을 날릴 수 있는 마지막 체력뿐.
[...유세현...]
“루시뷀트...”
둘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동시에 절기를 사용할 최적의 자세를 잡았다.
스스스스-
그들의 검신으로 모든 것을 끌어모은 마력이 모여든다.
스슥-
이윽고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두 마왕이 서로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 * *
휘이이잉-
콰아아아아앙-
절기가 맞부딪치자 불안정했던 차원이 그대로 산산 조각나며 어마무시한 폭발이 일었다.
타닥-
트드드득-
거칠게 흩날리며 소용돌이치는 세계의 파편.
“크윽! 뭐, 뭐냐 이건!”
세계가 강제로 부서지며 일어난 폭풍의 소용돌이는 평범한 마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벨제뷔트조차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위력이었다.
“으으으! 무, 무슨! 이런 소용돌이가... 이, 이런 빨려 들어간... 끄아아아!”
결국 버티지 못한 몇몇 마족들은 그대로 폭풍에 휘말려 날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체면이 있지! 크으으! 하압!”
반면 마력으로 몸을 고정시키는데 성공한 벨제뷔트는 손으로 불어오는 강풍을 막으며 유세현과 벨제뷔트가 있던 장소를 응시했다.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든 결과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
장소를 본 벨제뷔트는 놀라 눈을 그저 꿈뻑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유세현의 천마광룡참과 루시뷀트의 깎아내리는 죽음이 정면으로 부딪친 그 장소는 그야말로 뻥 구멍이 뚫려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 되어있었다.
‘차원을 정말 부숴버리다니... 그보다 루시뷀트와 유세현은 어디지?’
벨제뷔트가 거친 바람에 눈을 찡그린 채 다급히 주위를 훑었다.
그러나.
‘대체...’
주위 어느 곳에서도 루시뷀트와 유세현은 보이지 않았다.
대충 예상컨대 저 구멍 뚫린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이래서는...’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사 자체를 확신할 수 없다.
유세현이 당할 시 동화시켜버리려 그렇게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건만...
‘제기랄!!’
일말의 기회조차도 사라져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벨제뷔트였지만 그는 유세현을 얻기 위해 감히 그 공간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곳은 한눈에 봐도 허수 공간, 최상위 대리자마저 대응 불가능한 언제 사라질지 알지 못하는 무지막지한 공간이 틀림없던 탓이었다.
허나.
[구준시어!]
스슥-
그 허수 공간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한 인물이, 아니 두 인물이 존재했다.
“세현 오빠!!”
슈슉-
레오릭과 아퀼라.
벨제뷔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혀를 내둘렀다.
‘무슨! 저 공간에 뛰어들다니!!’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르는데!
‘크으으...’
벨제뷔트는 뭔가 레오릭에게 진 듯한 굴욕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여태까지 생존해온 방식이었고, 앞으로도 생존할 방식이었기에.
* * *
새하얗다면 새하얗고, 어둡다면 어둡기 그지없는 허수 공간.
“으으으...”
그곳에 두둥실 떠 있던 유세현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정신을 차렸다.
“쿨럭... 쿨럭... 커헉...!”
폐가 다쳤는지 입에서 각혈이 새어 나오고, 전신이 으스러진 것처럼 아프다.
“으... 이곳은...”
과거 천마가 있던 장소와 굉장히 흡사해 보이는 느낌의 공간.
“크윽...”
유세현은 끝없이 몰려오는 강렬한 통증에 힘겹게 고개를 움직여 상처를 살폈다.
좌측 가슴부터 우측 골반까지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 깎인 듯한 커다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심장을 보호해주는 갈비뼈가 드러나 있는 것이 조금만 더 깊게 당했더라면 아마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하아... 하아... 그나저나 출구를 찾아야 한다...’
부상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세현이 출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살피려던 찰나였다.
[깨어났나 보군. 유세현.]
익숙한 목소리가 유세현의 바로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
바로 뒤에 있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니?
“허억... 허억... 크으으...!”
기습이라도 당할까, 유세현이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며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가 그렇게 간신히 목소리가 들려온 근원지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
유세현은 하던 행동을 일제히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쿨럭... 루시뷀트...”
우측 가슴부터 좌측 골반까지 일자로 잘려나가 신체를 잃어버린 루시뷀트가 그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이 일시적으로 죽음을 막아주고 있지만 저것은...
‘살지 못한다.’
유세현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루시뷀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유세현.]
“......”
유세현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 마왕으로서 목숨을 걸고 한 전투.
끝은 둘 중 하나가 목숨을 잃는 것으로 어차피 확정되어 있던 사안이었다.
그러니 이겼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도, 진 상대방을 조롱할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
유세현이 빠져나갈 출구를 찾기 위해 묵묵히 뒤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루시뷀트가 뭐가 웃기는지 피식 실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넌 여전히 한결같구나. 유세현.]
유세현은 그 말에 하려던 행동을 잠시 멈췄다.
“여전히?”
[그래. 여전히... 내가 본 기억에서 너는 줄곧 그래 왔었다.]
루시뷀트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유세현과 함께한, 아니 함께한 것만 같은 수많은 기억과 감정들이 뇌리 속에 생생하게 비쳤다.
바깥을 보게 해주겠다던 유세현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던 자신.
근원인 마심원을 넘겨준 것.
맘에 안 드는 영감탱이와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
유세현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것,
행동 하나하나.
전부 다.
“루시뷀트 너...”
[지금 네 안에 존재했었던, 너를 위해 죽은 루시뷀트를 떠올리고 있는 거라면 안타깝게도 나는 ‘그’ 루시뷀트는 아니다.]
이곳이 본래는 존재하지 않아야 될 허수 공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죽음이 다가와서일까.
이곳에 빨려 들어온 후 루시뷀트는 왜인지 유세현처럼 자신의 복제였던 ‘그’ 루시뷀트의 일생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내 복제가... 아니 또 다른 내가 왜 너를 도와줬는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특별히 나를 이긴 선물을 주도록 할 터이니.]
“...선물?”
유세현이 영문을 알 수 없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은 언제 무너져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
그런데 잠깐 기다리라니?
‘흠...’
본디 이런 말은 듣지 않고 한시라도 바삐 출구를 찾아 움직이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선물은 거짓이고 상대가 패배한 것에 원한을 품고 같이 죽으려 하는 것이라면?
유세현은 그날로 끝장이었기에.
하지만.
“...믿도록 하지. 루시뷀트.”
유세현은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그가 보기에 눈앞에 있는 존재는 과거 방법을 상관 않고 자신을 죽이려고만 하던 영락한 마왕이 아닌, 본질을 재차 깨우치고 고고함과 자긍심을 다시 갖추게 된 기억 속의, 자신의 내면 속에 있었던 자신이 알던 바로 그...
[군주시어!]
슈슉-
다음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순식간에 날아온 레오릭이 루시뷀트와 유세현의 앞에 섰다.
[아아... 아...]
루시뷀트의 모습을 본 레오릭은 손으로 얼굴을 움켜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군주시어... 제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에...!!]
레오릭이 자책하자 루시뷀트가 그를 향해 툭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레오릭. 이건 단순히 내가 부족했기에 진 것이다.]
[군주시어. 하오나...!!]
[그보다 너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레오릭.]
마지막, 그 마지막이란 말에 레오릭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루시뷀트가 거지 같은 대리전쟁을 만든 ‘진짜’ 신이란 존재를 확인하고 영락했다 한들, 루시뷀트는 그에게 있어 하나뿐인 군주였다.
그런데, 그런데 마지막 명이라니!
[...군주님의 마지막 명을 받듭니다.]
루시뷀트가 유세현을 당장 찢어 죽이라면, 자긍심조차도 버리고 당장 행할 생각으로 레오릭이 답했다.
[유세현을 마왕으로 인정하고 보필하여라.]
[...!!]
명령을 들은 레오릭의 눈이 순간적으로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이건... 레오릭으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답이었다.
분명 예전이었다면 유세현을 당장 찢어 죽이라고 했었을 테니까.
‘...완전히 본래대로 돌아오셨군요. 군주시어.’
[...군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레오릭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심을 담아 고개를 숙여 답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루시뷀트는 신에 대한 증오로 인해 영락해버린 자가 아닌, 진정한 마왕으로 돌아온 루시뷀트였다.
그렇다.
진정한 마왕으로 돌아온... 자신이 섬기던 진짜 주군.
[그래, 그걸로 됐다. 레오릭. 이제 가라. 그리고 유세현.]
루시뷀트가 힘겹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휘익-
훙-훙-훙-
저편에서 거대한 대검이 날아와 유세현의 앞에 멈춰 섰다.
[가져라.]
“...고맙게 잘 쓰겠다. 루시뷀트.”
유세현은 대검을 바라보다 온 힘을 다해 팔을 움직여 손잡이를 쥐었다.
파앗-
손에 잡힌 루베르크는 순식간에 유세현의 손에 딱 맞게, 과거 사용했던 레전더리 루베르크과 같은 외형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륵-
“세현 오빠! 아니 군주시어!!”
뒤따라온 아퀼라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빌어먹을 해골 자식! 세현 오... 아니 군주님한테서 떨어져!!”
“잠깐! 멈춰! 아퀼라! 쿨럭! 쿨럭!”
유세현은 다짜고짜 레오릭을 공격하려던 아퀼라를 다급히 제지시켰다.
“어... 어...?”
이에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순간 벙찐 얼굴이 된 아퀼라.
아퀼라는 나중에 설명해주겠다는 유세현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등을 업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확실히 뭐니 뭐니 해도 이곳에서의 탈출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유세현을 업은 순간.
쿠구구궁-
“...!!”
시간이 다 되었는지 허수 공간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주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유세현이 루시뷀트를 쓱 쳐다보자, 그가 입 열어 말했다.
[가라. 유세현. 문이 닫히기 전에.]
그렇게 말한 루시뷀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더 이상의 대화 따위는 불필요하다는 듯.
“...루시뷀트...”
쿠궁!
쿠구궁!
트드드득-
그들은 잠이 든 것만 같은 루시뷀트를 뒤로한 채 허수 공간을 빠져나가기 위해 내달렸다.
기둥 공방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