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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니...]
한편 아쿠리네에게 인간에 대한 처사를 들은 실피리오는 깜짝 놀라 불같은 화를 터트렸다.
쿵!
[어차피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지 못해 걸리지도 않을 거 대충 비스무리한 가짜 지도를 제공했으면 됐잖아! 놈들이 당장 배신하면 어쩌려고!]
[......]
[야, 아쿠리네! 뭐라고 말 좀 해봐! 너 대체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흥분한 실피리오가 자신도 모르게 거친 돌풍이 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알베타스족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상황, 이제 그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누군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제와선 알아봤자 꼬치꼬치 따져가며 물릴 수도, 대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그냥 그렇게 풀어줘 버리다니?
양심에 가책이 간다는 이유로?
[크으... 아쿠리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쿠리네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실피리오가 더더욱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
피잇-
순간적으로 대기에 진동이 일나 싶더니 실피리오를 포함하여 이곳에 존재하는 정령왕들에게 어떤 신호가 내리쳤다.
[...!!]
정령왕들의 표정은 그 신호를 받기 무섭게 대번에 변화했다.
[...이런 빌어먹을...!]
델바람과 블러드소울이 지키고 있던 동쪽 길목이 뚫려버렸다.
* * *
콰광!
콰과과광!
[더욱 몰아쳐! 절대 뚫리면 절대로 안 된다!]
[모든 힘을 쥐어짜!]
[으으으-!]
알베타스의 군세가 보다 강하게 몰아치고 있는 산호협곡의 동쪽.
-키에엑!
-캬아악!
그곳에서는 정령들이 안간힘을 쓰며 알비론과 스카이레블, 그리고 산하의 병력들을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다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방어해내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죽어.”
퍼억-
그도 그럴 것이 이제와 중급이나 상급 정령들은, 본체이건 분신체이건 너무나도 강해진 대리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으으으! 네놈들...!]
그렇기에 그나마 희망이라고는 함께 있던 델바람과 블러드 소울의 병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전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자리를 이탈하여 퇴각해 버렸다.
이런 말을 남기고는 말이다.
[이곳은 어차피 뚫린다. 여기서 더 싸우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내부로 합류하여 막는 게 더 낫다]
정령들은 분하기 그지없었으나 퇴각하는 그들을 붙잡을 힘도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렇게 쉽게 버리고 퇴각하고, 쉽게 버리고 퇴각하고.
무려 두 개의 종족이 지키고 있던 동부 진형은 인간들이 지키고 있는 서부나, 엘프가 있는 중부와 다르게 어느새 절반 이상이 뚫려버린 상황이 되었다.
알베타스는 동부가 허술하다는 것을 깨우치기 무섭게 서부나 중부보다도 동부에 병력을 더더욱 집중시켰다.
쿠구구궁-
콰과과-
어마무시한 대군이 수많은 산호를 짓밟고 넘어간다.
-캬아악!
끝없이 몰아치는 대군단!
베아렉클에 올라타 있던 알베타스는 블러드소울과 델바람들이 이번에도 진지를 버리고 허탈하게 물러나기 시작하자 그것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후후후...”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는 행동.
허나 알베타스는 전혀 개의치 아니했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건,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던 간에 결국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급조했을 게 뻔한 궁여지책.
그 따위 것이 자신에게 먹힐 리가 없을 것이기에!
알베타스가 베아렉클을 향해 말했다.
“베아렉클. 정령왕들의 동향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느냐.”
[예.]
“그럼 놈들은 동굴 내부에 있을 확률이 높겠구나.”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후후후. 좋아. 그럼 빨리 놈들을 만나보러 가자꾸나.”
알베타스가 고개를 들어 산호 동굴이 있을 저편을 응시했다.
그녀는 주위 정리 후 간단한 정비를 마치기 무섭게 병력들을 또다시 진군시켰다.
* * *
빠득-
빠드득-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마무시한 속도로 블러드소울의 수장과 델바람의 수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실피리오의 눈은 무척이나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카그네프와 크라베스를 만나자마자 둘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네놈들...!!]
본래라면 이렇게 뚫려서는 안 되는 전선이었다.
인간들이, 혹은 엘프나 다른 이들이 빛과 어둠의 지대를 클리어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크라베스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워, 워 진정하라고 실피리오.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뭐라고?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쉽게 중요한 진지를 버려놓고 그게 지금 할 소리...]
“어이 바람의 정령왕. 거기까지 해라. 우리는 네가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고기방패가 아니야. 너희야 역소환 되면 끝이지만 내 병력들은 정말로 죽는다.”
카그네프가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말을 뚝 잘랐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진지 타령하는데,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진지였다면 왜 최상급 정령들을 거의 지원해주지 않은 거지?”
[뭐?]
“설마 생사 따윈 상관없이 희생해서 막아라. 뭐 그렇게 떠밀려던 거였나? 어차피 우린 대리자니까?”
[......]
실피리오의 입이 순간 꾹 닫혔다.
사실 말마따나 그녀는 그들을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고기방패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고기방패가 아닌 썩은 고기방패로.
카그네프가 재차 입을 열어 말했다.
“실망스럽구나. 동맹인 카시우스 때문에 너를 도와주고 있는 건데 그런 우릴 이딴 식으로 취급하다니.”
[......]
실피리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진실이, 사실이 그러했기에.
“진심을 다해라. 우리가 목숨을 바쳐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카그네프가 마지막 피니쉬를 꽂았다.
이에 실피리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후...’
이들을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그 공간으로 초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젠장...’
좋으나 싫으나 지금 실피리오에겐 사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너희를... 초대하마. 그것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실피리오가 지그시 말했다.
이에 답을 들은 카그네프와 크라베스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크크.’
사실 이것은 크라베스와 카그네프가 짠 계략이었다.
그들은 정령왕이 최상급 정령을 붙여 주었건 아니었건, 알베타스가 공격을 가해올 시 일부러 밀릴 생각이었었다.
저 바람의 정령왕 실피리오 때문에 반쯤 진심인 카시우스와는 다르게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신물파편을 손에 넣는 것.
이렇게 밀려야만, 다급해져야만 정령왕은 그들이 내민 동아줄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비록 썩은 동아줄이라고 할지언정 어쩔 수 없이.
‘크크크, 성공이군.’
크라베스와 카그네프는 그렇게 바람의 정령왕의 인도를 받아 산호 동굴내부로 진입했다.
* * *
동부 전선이 와르르 밀리자 정령왕들은 서부, 중부를 맡고 있던 사람들과 엘프들 일부를 산호 동굴이 있는 근처로 불러들여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무슨!]
[벌써 여기까지?!]
알베타스의 진군속도는 인간이나 정령들이 도착하는 속도보다도 훨씬 빨랐다.
[크윽! 이런!]
그리고 마침내 뚫린 최후방어선.
-캬아아아!
-키에엑!
알베타스족은 순식간에 산호 동굴 내부로 와르르 밀려들었다.
세계의 존폐를 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이레시아! 이그니트! 놈들이 온다! 준비해!]
최상급 바람의 정령, 실데론과 실데리아의 말에 불의 최상급정령 이그니트와 이레시아가 거친 화염을 토해냈다.
쿠구구-
그리고 곧장 이어진 실데론과 실데리아의 광풍.
휘이잉-
콰아아앙!
최상급 정령의 연계기가 통로를 한차례 휩쓸고 가자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검게 타버린 재밖에 없었다.
[이레시아! 또 온다! 준비해!]
[알고 있어!]
콰아앙-
계속해서 끝없이 반 밀폐된 통로를 가득 메우는 거센 불꽃.
분신체가 아닌 본체 상태로 세계 자체에서 힘을 끌어다 쓰는 그들은 알비론은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이들은 가까이 달라붙지 조차도 못했다.
그래, 웬만한 이들은...
“흐음... 나 먼저 가도록 하지.”
툭 말한 키쿨이 리네리아를 뒤로 한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하들과 함께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치지직-
동시에 불길에 감싸인 키쿨과 부하들의 전신에서 무언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몸이 타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물이... 화염폭풍에서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
[무슨!]
화염폭풍을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뚫고 들어오는 그 모습에 이그니트와 실데리아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크윽!]
그들은 더욱 화력을 높여 대응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쿨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다를 만난 작디작은 불꽃처럼.
‘주, 죽는다!’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불과 바람의 정령은 순간적으로 사색이 되었다.
쌩-
그러나 키쿨은 예상을 뒤엎곤 그들을 그냥 지나쳐 통로를 빠져나갔다.
마치 시간이 아깝다는 듯.
이 모습을 본 리네리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키쿨, 이 자식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더니 그냥 가? 신물파편을 알베타스님께 바치는 건 너가 아니라 바로 나다!”
그녀는 외침과 함께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 정령들에게 달려들었다.
쿠구구-
그리고 키쿨때와 같이 정령들은 이번에도 적을 막을 수 없었다.
푸슉-
[크악!]
그렇게 코어를 잃은 불의 최상급 정령 둘과 3명의 최상급 바람의 정령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이프리트...님...]
그것은 수백, 수천의 시간을 살아온 그들이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진정한 죽음이었다.
* * *
산호 동굴의 통로는 폭이 약 좌우 30m 정도로 매우 커다란 편에 속했으나, 그 커다란 크기에 걸맞지 않게 수많은 통로가 존재하며 미로로 되어있었다.
지금은 부서져 사라진 2개의 기둥들이 존재했던 장소가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던 것에 비교하자면 이곳은 굉장히 생소하면서도 특이한 공간인 것이다.
“흐음... 어디로 가는 게 맞으려나.”
그렇기에 아무리 샤크아크족의 수장 키쿨이라고 할지언정 길을 빠르게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 하나하나 전부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퍼트린 뒤 마치 트랩처럼 존재하는 최상급 정령들을 때려잡으며 곳곳을 누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으으음... 리네리아보다는 내가 먼저 도착해야 되는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쯤 통로를 빠져나간 그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 돔 형태로 된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의 내부 정중앙에는 2명의 인물이 산호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2명은 키쿨이 공동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그제야 고개를 들어 키쿨을 응시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키쿨도 아는 인물이었다.
“호오, 키쿨인가. 오랜만이네?”
카그네프가 반갑다는 듯 키쿨을 향해 손을 흔드는 반면, 키쿨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
샤크아크족과 델바람.
델바람은 용인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종족인 반면, 샤크아크족의 수인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종족, 나름의 상성 종족인 탓이었다.
덕분에 과거 그는 카그네프에게 패배한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게 오랜만이네. 카그네프.”
키쿨의 표정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카그네프는 예상과 다른 키쿨의 반응에 미간을 꿈틀거렸다.
‘저게?’
카그네프는 자리에서 일어선 뒤 천천히 키쿨에게 다가갔다.
“후후, 얘기는 들었다. 먹혔다면서? 알베타스에게.”
압박하듯, 무겁게.
과거를 떠올릴 수 있도록.
“먹힌 게 아니다. 새롭게 태어난 거지.”
“크크크, 새롭게 태어나? 먹히면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그딴 개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다니! 예전의 너였다면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딴 말은 내뱉지 않았을 거다.”
“날 잘 알고 있는 듯 말하는군. 그때 한번 부딪혔던 게 전부인 게.”
처적-
어느새 다가온 카그네프가 키쿨의 바로 코앞에 멈춰 섰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시선에선 스파크가 튀었다.
카그네프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다 죽다 부하의 희생으로 운 좋게 살아간 놈이 많이 건방져졌구나. 키쿨. 왜, 먹히더니 이젠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
키쿨이 짧게 답했다.
“......”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슈우욱-
빠악-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기둥 공방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