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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유세현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어차피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라곤 하나 하필 깨어나도 서열전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깨어나다니.
“후우...”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루시뷀트가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운이 없는 것인지.
‘어쩔 수 없군.’
아무쪼록 아쉽기 그지없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물러나는 게 맞았기에 유세현은 자리를 뜨려 했다.
허나.
“어딜!”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포기 상태였던 벨제뷔트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하압!”
슈슉-
벨제뷔트로서는 지금이 향후 다신 오지 않을 둘도 없는 기회였던 탓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루시뷀트가 이곳에 도달하게 한다!’
만전의 상태라면 몰라도, 체력과 마력을 소비한 유세현은 루시뷀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유세현을 약속에 따라 동화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유세현을 자신의 것으로만 만든다면...
‘내가 마왕이 되는 것도 정말 꿈이 아니다.’
벨제뷔트는 곧장 쿠니아칸에게 신호를 보냈다.
[쿠니아칸! 상황이 바뀌었다! 그냥 나와서 유세현을 전력으로 공격해라!]
그러나 쿠니아칸은 명령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쿠니아칸! 왜 안 나오는 것이냐! 지금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쿠니아칸!!]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자 벨제뷔트가 인상을 구기며 이를 으득 갈았다.
왜 반응이 없단 말인가!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스르륵-
도주하려는 유세현을 향해 거칠게 맹공을 펼치던 벨제뷔트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스르륵 흔들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수마.
‘이건...?!’
누구의 짓인지 단번에 깨달은 벨제뷔트가 잔뜩 성이나 외쳤다.
“너 이놈!! 서큐버스!!”
“호오, 빨리 알아채네. 네 부하는 네 명령 때문인지 날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잠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스르륵-
마치 장막이 걷히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아퀼라가 고혹스럽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벨제뷔트는 아퀼라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제길... 당했다. 유세현 녀석 완전히 혼자인 줄 알았는데... 서큐버스년을 보험으로 동행시키고 있었을 줄이야!’
유세현에게 들키지 않는 것만 생각하여 쿠니아칸에게 다른 마족이나 대리자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이 패착이 되었다.
“강호 오빠 말대로 저 데려오길 잘했죠? 군주님?”
아퀼라가 싱긋 웃으며 한 건 했다는 듯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유세현은 그런 아퀼라를 보며 피식 웃어 주었다.
“그래, 든든하네.”
원래 유세현의 처음 계획은 동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단신으로 다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강호가 아퀼라는 순수 마족이라 나서지만 않으면 계획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만약을 대비해 붙이기를 권했고, 유세현은 이런 이강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 판단이 위협이 되었을 쿠니아칸을 잠시 무력화시키는 지금의 결과로 이끈 것!
물론...
“크아아아아! 감히 내 머리에!! 내 정신에 손을 대다니이이-!”
쿠니아칸은 어둠의 마력을 지닌 최상급 대리자.
“크아아아!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아아-! 빌어먹을 서큐버스년!!”
아무리 아퀼라가 뛰어나다 한들 계속 잠에 빠져있도록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죽어어어!”
화륵-
콰아아아앙-
이윽고 쿠니아칸이 발작을 일으키듯 거칠게 화염을 날리며 쇄도했다.
동시에 벨제뷔트가 주위에 있는 마족들을 향해 외쳤다.
“이곳에 있는 마족 전원은 들어라! 현 시간부로 지금 열리고 있는 개인 서열전에 전원 참가! 유세현을 막아라!! 이것은 명령이다!!”
“......”
그러나 명령이란 말에도 마족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벨제뷔트를 우습게 여겨서가 아니었다.
벨제뷔트도 다시 인정을 받아 지휘권을 받은 자,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추후 사형당하게 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
‘미친, 막으라고? 어떻게?’
당장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었던 그때의 기억이, 그때의 공포와 경외가 그들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마족들이 갈팡질팡 하고 있자 벨제뷔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이렇게 유세현을 모르다니!!’
벨제뷔트는 유세현의 성격상 지금 달려들어도 죽이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허나.
“움직여라! 움직이란 말이다!!”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이는 벨제뷔트뿐, 그가 아무리 설명해도 마족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젠장!! 젠자아앙!!’
벨제뷔트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정말 다신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이건만!
‘쿠니아칸만으로는 도주하는 놈들을 막을 수 없다.’
이대로라면...
‘놓치게 된다.’
하늘에서 검은 벼락이 내리친 것은 딱 그때였다.
* * *
치지직-
콰앙!
흑뢰, 검은 벼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치 시간이 정지하듯 유세현과 아퀼라를 포함하여 모두가 자리에 멈춰 섰다.
스스스스-
낙뢰로 인해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그곳에는 [그]가 우두커니 서서 유세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안광과 거대한 대검.
그리고 전신을 은은하게 뒤덮고 있는 어둠.
[유세현.]
루시뷀트가 유세현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과거 유세현의 존재를 인정 못해 분개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노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유세현은 루시뷀트가 뭔가가 변했음을 느끼고는 그를 마주했다.
“루시뷀트.”
[유세현. 5시간을 주겠다. 그동안 몸을 정상화시켜라.]
“...?! 무슨!!”
루시뷀트의 난데없는 발언에 벨제뷔트의 눈이 토끼만큼 커졌다.
그는 지금 방금 루시뷀트가 무슨 말을 내뱉은 것인지 당최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공격하면 유세현의 패배는 99.99%로 명백히 이긴 싸움이었다.
루시뷀트가 도달해 버리기 전 도주에 성공했다면 몰라도 도달한 이상 협곡이라는 지형적 특성에 의해 도주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구태여 체력을 회복하라고 하며 시간을 준단 말인가!
미친것인가?
“자, 잠깐! 마왕이시어!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서열전은 그 이후에 치른다. 5시간이면 충분하겠지. 유세현.]
“물론이다.”
벨제뷔트가 다급히 외쳤지만 루시뷀트는 벨제뷔트의 말 따윈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왜... 왜...”
이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벨제뷔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끝없이 왜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뿐이었다.
[그럼 휴식해라. 유세현.]
“그러지.”
유세현이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 있는 아퀼라를 데리고 부서진 산호 바위 위로가 앉았다.
그렇게 루시뷀트는 유세현이 정말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자 나르슈나와 레오릭에게 걸어갔다.
저벅- 저벅-
레오릭과 나르슈나는 자신의 군주가 다가오자 다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군주시어. 저희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본분을 다하지 못했음을 사죄하는 신하들.
루시뷀트가 말했다.
[수고했다.]
[......]
“......”
말을 들은 나르슈나와 레오릭이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들 또한 유세현이 그랬듯이 느낀 것이다.
‘변하셨다.’
마치 판도라에 떨어지기 전, 고고하기 그지없었던 과거 때처럼.
죽음 그 자체였던 그때처럼.
최강자였을 때처럼.
[쉬거라.]
“군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과거처럼 숭고하게 레오릭과 나르슈나가 고개 숙여 복창했다.
* * *
휘이잉-
산호 계곡에 부는 스산한 바람이 두 인물을 스쳤다.
루시뷀트와 유세현.
[시간이 되었군.]
“그렇군.”
쿵-
말을 끝내기 무섭게 루시뷀트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대검, 루베르크를 움켜쥐었다.
유세현도 마찬가지로 검을 손에 쥐었다.
마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망의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후...”
이 광경을 숨죽인 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마족이 너무 긴장하여 날숨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지잉-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뜩 빛낸 두 마왕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휘잉-
콰아아앙-
그리고 서로를 향해 행해진 단 한 번의 일격.
쿠우우우웅-
산호 계곡은 그 일격에 의해 더 이상 계곡이라 불릴 수 없는 지형지물로 탈바꿈됐다.
챙!
챙챙!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위로 확산되는 어둠!
그 어둠에 닿는 것은 모조리 바스러져 형체 하나 남기지 못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무시하기 그지없는 둘의 전투.
“......”
그 엄청난 수준에 벨제뷔트 또한 감히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이...’
이것이 마왕의 전투였다.
콰아아아앙-
기술에 휘말린 이곳저곳이 뻥뻥 뚫리며 무로 돌아간다.
대검을 쳐낸 유세현이 검이 부러지자 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어둠이 뻗어나가며 지형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저건...!’
영역선포였다.
루시뷀트가 마찬가지로 손을 치켜세웠다.
쿠우우웅-
어둠의 영역은 서로 잡아먹다가 힘이 다했는지 그대로 허공으로 자취를 감췄다.
순수 권능의 대결에선 무승부가 난 것이었다.
아공간 포켓에서 새롭게 검을 꺼낸 유세현이 마력을 검에 모았다.
탐색전은 방금 전 공격으로 끝.
그는 이젠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진면모를 보이지 않으면 이전과는 다르게 루시뷀트 또한 진면모를 보이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슈슉-
순간적으로 접근한 유세현이 가볍게 천마광룡참을 날렸다.
스슥-
그러자 천마광룡참을 알아챈 루시뷀트가 눈을 번뜩 빛내며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일전 마신공(魔神功), 흑천경을 사용할 때와는 사뭇 다른 자세였다.
마신공처럼 허겁지겁 급조한 것이 아닌, 과거 유세현의 몸 안에 있던 두 영혼의 기술에 루시뷀트가 영감을 얻어 상념 속에서 긴 시간 동안 창조해낸 기술.
[깎아내리는 죽음.]
후웅-
육중한 대검이 허공을 가르자 천마광룡참을 향해 거대한 톱날의 검기가 이를 드러냈다.
천마광룡참과 깎아내리는 죽음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치지지직-
마치 대검이 물체를 통째로 깎아버리듯.
‘이건...’
공간을 포함해 천마광룡참을 깎아버리고 있었다.
유세현의 눈은 순간적으로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대단하군.’
루시뷀트가 천재란 건, 루시뷀트가 마신공이란 것을 스스로 창조해낸 걸 알았을 때부터 익히 인지하고 있었다.
무공은 그리 쉽사리 창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천마도 재능이 있다고 나름 우스갯소리로 인정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마광룡참과 비등한 절기를 이 단시간 만에 창조해 낼 줄은...
어쩌면 루시뷀트는 천마보다도 더 뛰어난 천재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세현은 살짝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연속으로 재차 천마광룡참을 날렸다.
슈슉-
쾅!
유세현이 보기에 아직 루시뷀트는 어딘가 부족한 감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막 깨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빠악-
[크윽!]
아직은 부족해 보인다는 것.
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물론...
[역시 강하구나. 유세현. 하지만...]
쿠구구궁-
루시뷀트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유세현과 싸워가면서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보다 정밀해지고, 보다 위력이 강화되고.
게다가 루시뷀트는 유세현에겐 없는 아주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채재쟁!
트드득-
챙!
쨍그랑!
루베르크와 부딪친 유세현의 검에 균열이 일더니 이윽고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벌써 4개째였다.
이젠 여비도 몇 개 남지 않았건만.
[이것도 받아봐라. 유세현.]
쿠구-
콰과광-
아주 약간의 미세한 차이, 그것이 점점 쌓여 밀리게 만들고 있다.
예전이었으면 체술로 충분한 격차를 냈을 터지만...
‘이젠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은 루시뷀트는 이전과는 다르게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승산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후우...”
끝없이 고민하던 유세현은 하던 생각을 접고는 이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생과 사가 걸린, 죽음이라는 운명을 건 싸움.
그런 싸움에서 어설프게 쉽게 가려고 하다니.
“후...”
물론 처음에는 루시뷀트를 완벽하게 찍어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이 계획을 시작한 것이었다.
왜냐면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실제로도 가능했고.
깨달음을 얻기 전 루시뷀트는 유세현에게 있어선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하는 존재였었다.
하지만.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지나. 유세현. 그러니 그전에 하나만 묻도록 하겠다.]
루시뷀트는 완전히 변했고,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했다.
그렇다면 루시뷀트가 그러했듯 이에 걸맞는 대우는 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뭐지?”
[신의 회랑. 그곳에서 너는 신에게 무슨 맹약을 얻어냈느냐.]
마왕이라는 존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