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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
루시뷀트의 행동을 본 키쿨의 표정이 일순간 구겨지며 이마에 힘줄이 뿔룩 돋았다.
키쿨, 판도라에 떨어지기 전까진, 아니 루시뷀트를 만나기 전까진 단 한 번의 패배조차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최강의 전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유쾌한 말투로 루시뷀트를 대하는 키쿨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할 뿐, 그의 자존심에는 무수히 많은 상처가 가 있었다.
패배 이후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열등감에 몇 날 며칠을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던가.
‘그때의 그 수모... 그 기분...’
지금 갚는다.
“잘도 웃는구나 루시뷀트. 그래, 그 웃음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지켜 보마.”
눈을 부릅뜬 키쿨이 팔을 앞으로 힘차게 뻗었다.
솨아아-
그러자 마치 해일이 도시를 집어삼키듯 거세게 몰아친 푸른 물결이 공간을 장악했던 어둠을 일부 밀어내기 시작했다.
루시뷀트의 눈빛은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돌변했다.
[네놈... 이건...]
“하하하, 놀랬나? 루시뷀트? 왜, 나는 이런 걸 결코 못할 줄 알았나?”
영역선포.
특수특성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주위 환경을 자신의 힘에 동화시키는 기술.
이것은 특별한 사건 없이, 후천적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럴 터인데...
“자... 그럼 다시 간다.”
파슷-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마치 경고하듯 툭 말한 키쿨의 신형이 다시 한번 가속했다.
아까보다도 더욱 빠르게. 아까보다도 더욱 날카롭게.
쐐애애액-
그가 거칠게 내지른 주먹은 굉음을 뛰어넘어 대리자조차도 귀가 아플 정도의 속도를 자아냈다.
콰아아앙!
루시뷀트가 루베르크의 검날 옆면을 이용해 막아냈지만 충격량은 어마무시한 수준!
콰과과과-
루시뷀트의 육신이 밀려나며 대지에 마치 검으로 벤 듯한 자국이 남는다.
키쿨은 기세를 이어 더욱더 거칠게 몰아쳤다.
“하하, 어떤가. 루시뷀트. 아직도 내가 만만한가? 이거 나름 살살하고 있는 건데 말이지~”
[......]
완벽하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이 과거에 당했던 것처럼 루시뷀트를 부수고 싶었던 키쿨은 말한 것과는 다르게 루시뷀트가 반격할 조금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신경 쓰고 또 신경 썼다.
파바바밧-
키쿨의 속도가 더욱더 가속한다.
주위에 있던 마족들은 키쿨이 점점 더 빨라지자 그 엄청난 속도에 넋이 나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게 대체 무슨...”
대체 어느 정도까지 빨라질 거란 말인가!
“하하, 왜 반격하지 않는 거지? 루시뷀트? 설마 마왕이라는 자가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건 아니겠지?”
[......]
루시뷀트는 답하지 않았다.
키쿨의 공격이 말을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날카롭고 강해서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지금까지는 유세현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그 기분 나쁜 감각.
그것이 키쿨에게서도 점차 올라오고 있었다.
과거에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하여 감히 자신을 올려다볼 수조차 없었던 놈이 요행으로 좀 강해졌다고 득의양양해져 감히 자신에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다니...
마치 동급인 것처럼.
[벌레가...]
짜증이 솟구친다.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금 키쿨의 눈동자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유세현과 비슷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루시뷀트가 발을 딛고 있는 지면이 부르르 진동하며 그의 핏빛 안광 너머로 거친 살기가 뻗어 나왔다.
[똑똑히 다시 한번 새겨주마.]
그 살기가 얼마나 진한지 주위에 있는 대리자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자신감 넘치던 키쿨조차도 잠시 뒤로 물러나게 만들 정도였다.
[진정한 공포가 뭔지. 내가 누구인지.]
거검을 등에 짊어진 루시뷀트가 자리에서 발을 톡 뗐다.
스슥-
“...?!”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이동하여 키쿨의 앞에 나타나자 키쿨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까보다 빨라지다니?!’
지금껏 보여준 속도가 최고가 아니었다는 것인가?
슈우욱-
루시뷀트의 거검이 물의 영역을 가르며 키쿨의 몸통을 향해 날아온다.
이제까지의 속도였다면 피해냈을 키쿨이지만...
“큭!”
어찌나 빠른지 키쿨은 회피를 포기하고 팔을 들어 건틀릿으로 가드 했다.
쩌엉-
“크윽!”
마치 망치가 종을 내려치는듯한 둔탁한 음색이 울려 퍼지며 다시 한번 더 키쿨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충격파로 뒤로 밀려난 키쿨의 양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무슨...’
이 무슨 엄청난 파괴력이란 말인가!
키쿨이 이를 으득 갈았다.
처절한 굴욕을 맛봤던 그때보다도 놈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더 빨라질 거리가 없을 터인데.
설마 민첩 코인을 그새 더 흡수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고.’
현재 자신의 상태가 그러하듯 루시뷀트 또한 민첩 스텟이 한계치에 다다라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민첩 코인을 흡수한다 한들 더 이상 드라마틱한 성장은 이룰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새 성장... 했다라는 것뿐인데... 대체 어떻게...’
키쿨이 보기에 루시뷀트는 딱 봐도 허접하게 느껴졌던 검술을 제외하고는 당최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는 애초부터 완벽했기에.
드래곤의 마법에 준하는 마법능력과 죽음이라는 권능을 지니고 있는 그를 성장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대체 어디에 있겠냔 말인가.
‘그렇다면 이 속도는 대체... 어떻게 더 빨라진 거지? 대체 무슨 수를 썼기...’
거기까지 생각하던 키쿨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마력의 흐름을 잘 읽지 못하는 그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어마무시한 어둠의 마력이 루시뷀트의 거검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큰 것이 몰아치기 전의 전조현상.
‘큭! 뭐냐. 대체 뭘 날릴 셈인 거냐!’
키쿨은 머릿속으로 루시뷀트가 장기로 하던 큰 기술들을 떠올렸다.
전격 마법과 권능을 섞은 흑뢰, 죽음과 강력한 폭발 마법을 섞은 데스 익스플로전 등등, 사용하는 기술을 예측할 수 있을 시 보다 대응을 능률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쳇, 모르겠군.’
하지만 루시뷀트가 사용하는 스킬은 안타깝게도 발동이 되기 전까지는 알기 힘든 구성으로 되어있었다.
루시뷀트가 당최 그렇게 만들어두었기 때문이었는데...
‘하는 수 없군.’
그렇기에 키쿨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 최강의 기술을 준비했다.
평범한 상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어의 이빨]을 뛰어넘는, 각성 단계에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새롭게 얻은 용의 특성과 원래 지니고 있던 종족 특성을 합쳐 만든 비기 중의 비기.
“와라. 루시뷀트.”
그는 그것으로 루시뷀트가 사용하는 기존의 기술 중 그 어떤 기술도 받아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루시뷀트의 기술을 기준으로 하여 끝없이 다듬고 다듬어 만든 새로운 기술이었으니까.
[건방진 벌레 놈. 죽어라.]
루시뷀트가 마침내 거칠게 대검을 내리그었다.
키쿨은 이에 놓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쿠구구구-
그러자 어마무시한 마력이 그의 주먹에서 뻗어나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상어.
[메갈로돈]
콰과과-
메갈로돈이 헤엄치자 주위에 있는 어둠이 메갈로돈의 입속으로 흡수되며 사라진다.
키쿨은 이를 보며 승리를 짐작했다.
루시뷀트가 사용한 기술은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기술이었으나, 어둠의 영역이 사라지게 되면 발동한 스킬이 무엇이든 간에 약화되어 메갈로돈에 다다를 것이기에.
그렇게 메갈로돈과 루시뷀트가 날린 검기가 부딪친 순간이었다.
“아니?!”
키쿨은 당황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메갈로돈,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상어가...
‘삼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트득-
트드득-
메갈로돈의 날카로운 이빨이 검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부서지기 시작한 것!
키쿨이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루시뷀트가 툭 말했다.
[그 따위 것으로 내가 사용한 기술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물고기.]
“...큭! 무슨...! 너에게 이런 기술은 원래 없었을 텐데! 대체...!]
[미물 따위가 알 것 없다. 사라져라.]
쐐애애액-
서걱-
메갈로돈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며 검기, 흑천경(黑天經)이 키쿨의 전신을 향해 순식간에 쇄도했다.
메갈로돈에 지속해서 마력을 들이 붇고 있던 키쿨로서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아... 이런...’
키쿨은 죽음을 직감했다.
이건... 누가 뭐래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포기하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하하, 이렇게 포기하면 안 되죠 키쿨. 당신은 아직 할 일이 있잖아요?”
키쿨의 앞으로 하나의 신형(身形)이 쓱 나타났다.
“넌...”
깜짝 놀란 키쿨이 더 뭐라 할 새도 없이 발도 자세를 잡은 남자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는 흑천경을 향해 검을 뽑았다.
휘익-
그리고 그 순간.
서걱-
[...?!]
흑천경이 그대로 반으로 잘려나가며 하늘이 열렸다.
키쿨이 남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반... 에반 비텔스바흐.”
“하하, 다행히 안 늦은 거 같군요. 키쿨.”
“너... 저걸 대체 어떻게.”
“마왕이 방심한 덕이죠. 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에반.
반면 키쿨은 진심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베타스, 그들의 세력 내에서도 에반은 붕 떠있는 존재였다.
딱히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적도 없이, 여왕의 주위에만 맴도는 인물.
그렇기에 키쿨은 여태까지 그가 그저 여왕의 맘에 들어 생존에 성공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베타스화 한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한 검기를 알베타스화 하지 않은 평범한 상태에서 베어내다니.
“에반... 지금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음... 딱히 그런 적은 없는데요? 그저 키쿨, 당신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에반의 말에 키쿨은 순간 자신의 머리를 망치로 강하게 얻어맞은 감각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에반과 무언가를 같이 한 적이 없었다.
반면...
‘그래서 인가. 그래서...’
일전 에반과 같이 전투를 한적 있던 리네리아가 에반을 얕보던 자신에게 한 말이 있었다.
[너가 에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던 뭐 니 맘이다만 얕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걸?]
그래, 그때 리네리아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아무튼 덕분에 살았군. 고맙다 에반.”
“에이~ 같은 팀끼리 뭘요.”
에반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보다도 자리를 얼른 뜨도록 하죠. 키쿨.”
“놈을 안 죽이고? 놈은 나와 싸우느라 생각보다 많은 기력을 사용했다. 지금이라면...”
“아마 우리가 합세해서 마왕을 처치하는 것보다 저쪽의 지원이 더 빠를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은 네 판단을 따르도록 하지.”
“고마워요 키쿨.”
파밧-
그들은 퇴각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빠르게 루시뷀트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루시뷀트는 그것을 그저 쳐다만 볼 뿐 둘을 쫓지 않았다.
‘내 흑천경을 잘라내다니...’
루시뷀트는 그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놈이 지니고 있을 영문모를 고유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특수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쿵!
화를 참지 못하고 루시뷀트가 발을 지면에 힘껏 내리찍었다.
현재 그에게 있어 이유는 별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만든 최강의 기술이 타인의 기술에 졌다는 사실뿐.
그러고 보면 흑천경은 유세현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두 개의 영혼에게도 통하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당시에는 역으로 당했었다.
‘분명 진(眞), 천마광룡참((天魔狂龍斬)이라고 했었었지...’
그래선 안 되는데 의문이 자꾸 스멀스멀 머릿속으로 기어 올라온다.
이 상태로 유세현을 마주했을 때 자신은 정말 압도적으로 놈을 찍어 누를 수 있을 것인지.
신의회랑 내부에서 다시 유세현과 조우했을 때, 루시뷀트는 유세현이 이전에 비해 뭔가가 변한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당시에는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지만...
“왕이시어! 괜찮으십니까!”
그때 다급히 뛰어온 레오릭이 무릎을 꿇었다.
루시뷀트는 무언가 고심하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차분히 레오릭을 불렀다.
[레오릭.]
“예, 왕이시어.”
[잠시 진군을 멈추도록 하겠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잠시 할 일이 생겼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병력들을 뿌려 그동안 놈의 행방을 확실하게 추적하도록 해라.]
레오릭으로서는 의문이 드는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난데없이 해야 할 일이 생기다니.
어중간한 것은 밑에 시키면 될 일일 터인데.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레오릭은 따지지 않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왕, 군주에게 바치는 충성이었다.
이후 루시뷀트는 마치 의식이 없는 존재인 마냥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몇 날 며칠을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시간을 보냈다.
습격(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