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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 이거 참 나도 인간 사이에서 꽤나 유명해진 모양이군. 개나 소나 내 얼굴을 알아보는 걸 보면 말이지.”
“......”
벨제뷔트가 음침한 웃음을 내뱉자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아츠미를 포함해 세 사람의 발이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다 자부하는 그들이었지만, 상대는 마족의 전 이인자.
그들은 벨제뷔트에게서 승리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이, 이대로 맞붙으면... 분명히 죽는다.’
‘도망쳐야해...’
“크크크, 안 되지 안돼~”
하지만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마냥, 벨제뷔트가 손가락을 툭 튕겼다.
스스슥-
‘...?!’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10명의 수하들이 순식간에 움직여 아츠미와 일행들을 에워쌌다.
아츠미의 얼굴에는 당혹을 넘어 절망이 맺혔다.
‘빠, 빠르다! 이, 이놈들... 이전에 만났던 놈들처럼 무공을 익히고 있어...!’
아르펜과 제루웬도 난감한 표정이 된 건 마찬가지.
‘안 좋군. 하필이면 지금 벨제뷔트와 조우하다니.’
그들 또한 벨제뷔트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인물인 것.
어떻게 해야 될까.
선공?
아니면...
[인간들을 버리고 도망치시죠. 지금 저희 둘만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
“크크크, 너무 그렇게 굳지 말라고~ 너희가 내가 원하는 걸 지니고 있다면 살려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그 사이 벨제뷔트는 서서히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놈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
[...아르펜님? 아르펜님? 왜 말이 없으십니까. 아르펜님!]
[......]
[큭...]
제루웬이 지그시 혀를 찼다.
아르펜은 당장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어느새 다가온 벨제뷔트가 아르펜을 향해 잔뜩 장난기 어린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너희들... 혹시 이곳의 중추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나?”
“중추?”
“그래, 중추!”
아르펜이 반문하자, 혹시나 한 것인지 벨제뷔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겼다.
이 상황을 이용해보기로 마음먹은 아르펜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다.”
“오! 정말로?”
“그렇다.”
잘만 한다면 모두 함께 도주할 수 있는 틈이 생길 터.
“크크크, 좋아! 좋아! 그래, 한번 말해보겠어? 어떻게 가야 되는지?”
벨제뷔트가 그 기괴한 얼굴을 더욱 들이밀었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새 손만 살짝 내밀어도 닿을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
위압스러운 보랏빛 눈동자가 여전히 장난기를 머금은 채 아르펜을 지그시 응시한다.
놈은 명백히 방심하고 있었다.
아르펜에겐 호기.
그는 일부러 살짝 움츠려드는 듯한 연기를 선보였다.
“안내를 해준다면 우리의 목숨... 확실히 보장해줄 수 있나?”
“크크크, 물론이다!”
“...내가 어떻게 그 말을 믿지?”
너무 빨리 수락하면 놈이 이상함을 느낄 수 있기에 아르펜은 철저하게 약자의 입장에서 행동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되레 벨제뷔트의 믿음을 산 것인지.
“크크크, 많이 불안한가 보군! 걱정하지 마라! 이 몸은 마족의 제 이인자 벨제뷔트님이시다! 한 입으로 결코 두말은 하지 않는다!”
상대를 기만하는 걸 즐기는 놈이 잘도 저런 말을 내뱉다니.
‘아니, 이것도 기만의 일종이겠군.’
제루웬은 애를 쓰고 있는 로드를 위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보겠다.”
“크크크, 암 그래야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 마무리 되려는 순간 벨제뷔트의 눈빛이 별안간 돌변했다.
“너... 정말 길 알고 있는 거 맞냐?”
슈우우욱!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살기를 듬뿍 담은 무지막지한 손날이 아르펜을 향해 날아왔다.
“...?!”
아르펜이 마법으로 순간 몸을 가속시켜 뺏기에 망정이었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르펜의 목은 지금쯤 허공을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호오, 이걸 피해?”
“벨제뷔트!!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흐음, 무슨 짓이긴? 뻔히 보지 않았나?”
스슥-
고개를 순간 갸웃거리며 반문한 벨제뷔트의 신형이 일순간 사라지는가 싶더니 아르펜의 전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펜은 침음을 흘리며 놈의 공격을 방어했다.
치지지직!
“길을 안내받기 싫은 거냐!”
“크크크, 안내? 안내야 당연히 받고 싶지. 너희들이 정말로 길을 알고 있다면 말이지...”
“...?!”
슈수욱!
빠악!
벨제뷔트가 내지른 주먹이 양팔을 들어 방어한 아르펜의 팔을 강타했다.
아르펜의 몸은 반동으로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그가 채 균형을 잡기도 전 순식간에 접근한 벨제뷔트가 지그시 귀에다 대고 읊조렸다.
“뻔히 보인다고. 거짓말이.”
“큭!”
“감히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인간?”
그렇게 시작된 전투.
벨제뷔트의 맹공이 이어진다.
아르펜은 방법을 바꿔 놈을 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벨제뷔트! 멈춰라! 확실히 네 생각처럼 우리는 길을 모른다. 하지만 너도 이 공간을 거닐어 봤으면 알 것 아니냐! 지금은 서로를 죽일게 아니라...”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그렇...”
“어딜 감히 인간주제에... 인간주제에...!! 나에게 제안을...!!”
난데없이 역정을 낸 벨제뷔트의 몸에서 어둠의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르펜은 그제야 자신이 벨제뷔트의 어떠한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곤란하군. 내가 알기에 벨제뷔트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용해먹을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해 먹다 버린다.
그것이 벨제뷔트의 기본적인 성격.
그런데 벨제뷔트는 지금 그런 자신의 성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죽어라아아-!! 인간!”
슈우우욱-
콰아아앙!
“크으-!”
벨제뷔트에게서 뻗어 나온 어둠의 마력 충격파가 일대에 휘몰아쳤다.
아르펜은 당연히 이를 무마시킬 수 있었지만...
“꺄아악!”
인간 셋은 버틸 수 없었다.
데르메의 몸이 데굴데굴 회전하며 날아가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데르메를 향해 두 마족이 달려갔다.
‘이런... 이젠 눈치 채도 어쩔 수 없다.’
아르펜은 이제는 드래곤임을 간파당할 걸 감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블링크를 사용해 데르메를 구했다.
데르메가 당할 시 더욱 불리해질 것이기에.
그러자 벨제뷔트가 더욱 역정을 냈다.
“이, 이... 이 자식이 감히 날 무시하고 동료를 구해?”
대체 어떠한 부분에서 화가 난 것인가.
“너... 곱게 죽지는 못 할 거다...”
슈슉-
순식간에 벨제뷔트가 아르펜에게 따라붙었다.
주변 상황을 살핀 제루웬은 그 모습을 보며 글렀다는 판단을 했다.
‘이건... 못 이긴다.’
벨제뷔트가 이끌고 있던 10명의 마족.
이 마족은 이전 만났던 마족보다도 훨씬 강한 상위 마족이었다.
1:1로는 자신이 충분히 승기를 잡을 수 있지만 합공을 당할 시에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아니 되레 위험해지는 존재들.
‘역시 도주해야 된다.’
제루웬은 어떻게든 틈을 만들고 도주하기 위해 아르펜의 곁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제루웬씨...!”
애처롭게 자신을 부르는 바루코사 테미의 목소리가 그의 귓등을 스쳤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아무리 미세하게나마 정이 쌓였다 해도, 상대는 평소 자신이 벌레 보듯이 한 인간.
목숨이 위태로울 때 도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안타깝지만 너희들은 여기까...’
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테미의 목소리가 연이어 그의 귓가를 때렸다.
“아, 아르펜씨와 도망치세요!! 두, 두 분이라면... 잘하면 벗어 날 수... 으아아악-!”
쾅!
결국 바루코사 테미는 그 말을 남기고 마족의 손에 터져 죽었다.
날아가던 제루웬의 눈빛이 일순간 파르르 흔들렸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타인의 목숨을 생각해주다니...
‘제길...’
뭔가 인간보다 하위 지성체가 된 느낌이었다.
기분이 무척이나 나쁘다.
“이 자식들이...!”
치지지직-
제루웬의 양손에 강력한 번개가 모였다.
그는 그대로 질주해나가며 앞을 막고 있던 마족의 목덜미를 스치듯 쓸었다.
푸슉-
“...!!”
그러자 목덜미가 손모양 그대로 뜯겨져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샘솟기 시작했다.
당한 마족이 얼이 나간 모습으로 새어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다급히 목에 손을 얹었다.
“커, 컥... 어, 어떻게 단 한방에... 인간 따위가...”
“이놈들... 이전 상대했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조심... 컥!”
제루웬의 공격에 또 다른 마족 한 명의 팔이 날아갔다.
제루웬은 처음 의지와는 다르게 방향을 꺾어 위기에 빠져 있는 아츠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푹-
“컥, 컥... 제루웬씨... 부디 살아...”
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던 아츠미는 그 잠깐 새를 버티지 못했다.
“......”
이제 남은 인간은 아르펜이 구한 데르메만 남아 있는 상황.
더 이상 감출 필요성을 못 느낀 제루웬은 부분 본체화를 하려했다.
이전 벨제뷔트의 세력을 박살 냈었던 전력이 있기에, 벨제뷔트가 더욱 맹렬히 공격해 올게 불보듯 뻔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가 폴리모프를 해제하려는 순간...
뿌우우우웅-!
치지지직-
난데없이 허공에 뿔피리 음이 울려 퍼지며 그들의 전방에 위치해있는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으음?”
“무슨...”
갑작스레 발생한 공간의 왜곡에 벨제뷔트, 아르펜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인원들은 하던 일을 멈췄다.
이변이 발생한 이상, 지금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으므로.
자칫하면 둘 다 이 공간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스스슥-
그렇게 모두가 경계어린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는 와중 일그러진 공간으로부터 서서히 무엇인가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빠져나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벨제뷔트의 두 눈이 대번에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너... 너...!!”
“......”
“유세현!!”
* * *
벨제뷔트의 외침에 그를 슬쩍 살핀 유세현의 시선이 뿔피리로 향했다.
길을 알려주는가 싶었는데, 벨제뷔트에게 안내하다니.
‘아니, 그냥 안내된 공간에 벨제뷔트가 있었던 건가?’
아무쪼록.
“커, 컥... 세, 세현씨...”
거의 다 죽어가고 있는 데르메를 확인한 유세현이 누가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움직여 그의 앞으로 갔다.
유세현은 빠르게 눈으로 그의 상처를 훑었다.
심각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회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두, 두 명이 당했어요. 아르펜씨와 제루웬씨가 안간힘을 써 주고 있지만 역부족...”
“대충 알 것 같으니 그만 말하십쇼. 상처가 더 깊어집니다.”
“선배님! 제가 치료할게요!”
어느새 빠르게 뒤따라온 김주희가 곧장 데르메에게 힐을 사용하며 치료를 시작했다.
“유, 유세현...”
그러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벨제뷔트가 이를 악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세현은 다시 시선을 옮겨 벨제뷔트를 응시했다.
“벨제뷔트... 너에게 할 제안이...”
“유세현... 유세혀여어언-!”
하지만 유세현이 채 본론을 꺼내기도 전.
“죽어라아아-!!”
잔뜩 흥분한 벨제뷔트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쾅!
콰과광!
온갖 감정이 잔뜩 서려있는 공격이었다.
“벨제뷔트, 잠시 진정...”
“죽어! 죽어어어-!”
거의 다 손에 넣은 신물 파편조각과 루시퍼를 자신에게서 빼앗아가고, 더 넘어 데프하우어와 자신의 세력을 잃게 만든 주원인.
“크아아압-!”
파바바밧-
유세현은 벨제뷔트에게 있어선 원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멍청한 놈! 내 수하들과 함께 넘어오다니!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벨제뷔트. 잠시 진정하고 내 말을....”
“모두 공격해라! 인간들을 멸살해라!!”
유세현의 말을 연속해서 자른 벨제뷔트가 거칠게 포효하자, 목덜미에 치명상을 입은 마족을 제외한 9명의 마족이 일제히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파바밧-
이에 잠시 지켜보고 있던 아르펜은 재차 쓴 침을 삼켰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괜한 기대였나. 큰일이군.’
아까보다도 전투 상황이 더 안 좋게 되었다.
유세현이 데려온 마족들은 10명인 반면, 인간들은 유세현과 김주희를 포함해도 5명이었다.
하지만 김주희가 데르메를 회복시키고 있으니, 현재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자신과 제루웬을 포함하더라도 여섯.
무려 20대 6.
본 힘을 발휘한다면 이길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체가 탄로 나게 될 것이기에 말짱 도루묵이 된다.
‘흠, 이렇게 되면 정말 제루웬의 말처럼 도주해야 될 지도 모르겠는 걸.’
그렇게 생각하며 대응하고 있던 아르펜의 시선이 어느 한곳을 보기 무섭게 파르르 흔들렸다.
‘음?’
그가 쳐다본 장소는 유세현과 넘어온 마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죽어라! 인간!”
“이, 이 자식들이!”
벨제뷔트들의 수하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반면, 유세현이 데려온 마족들은...
“뭐 하고 있는 거냐! 라부르스! 어서 당장 공격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신의 회랑(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