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02화 (488/612)

-------------- 496/606 --------------

“......”

그 말에 알리크스와 실라우벨이 시선을 돌려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이 제한은 둘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복수와 동시에 패퇴로 추락해버린 자존심을 추켜올릴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가질 수 있는 제안이었으니까.

“흠...”

허나 그들은 바로 수락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데르브르크가 이렇게 공손히 나오는 이유, 그 이유를 그들도 단번에 눈치 챈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놈...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거부하지 못할 걸 알고...’

‘짜증나는군...’

드래곤은 자존심이 높다.

일부러 치켜세워 주려 하면 오히려 자존심에 금이 갔다 생각해 역으로 불같이 성을 낼 정도로.

허나.

“재차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알리크스님, 실라우벨님.”

데르브르크가 재차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또한 자존심이 있는 드래곤인데 두 번씩이나 머리를 숙인 것이다.

이 정도면 체면은 살려 줄 만큼 살려줬다 할 수 있었다.

“크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 도와주도록 하지.”

결국 실라우벨과 알리크스는 마지못한 척 그 제안은 받아들였다.

* * *

쿠오오오오-

대지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하자 퀘루안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보통 한 번 흔들린 이후로는 지금까지 보통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엔 반나절 만에 또다시 사태가 발생한 탓이었다.

주기가... 눈에 띄게 짧아졌다.

“젠장! 갈수록 더하는군. 이 미친 곳은!”

쿠구구구!

쾅!

대지가 무너져 내리고, 그 뒤로 모든 것을 재로 되돌리는 전류가 빠르게 뒤따른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파수꾼.

“크으으으... 저 빌어먹을 파수꾼!!”

행여나 발각될라 다급히 고유특성을 사용한 퀘루안은 유세현을 향해 대뜸 불같이 성을 냈다.

“으으!! 야! 유세현! 육포는 왜 김다혜, 그년에게 전부 몰아 준거야? 몇 개는 남겨놨어도 괜찮았잖아!”

“...당시엔 그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이게 말이라도 못하면... 야! 나 체력 딸리면 너희들에게 적용되어있는 특성부터 해제해 버릴 거니까 그리 알아라.”

“......”

퀘루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말 특성을 해제하면 유세현 일행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기에 걸려있는 특성적용을 풀진 않았다.

쿵! 쿵!

파수꾼은 머지않은 시간 내에 그들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후우...후우... 누가 좀 풀뿌리 좀 빨리 가져와라! 힘들어 죽겠다 아주.”

“예! 금방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유세현! 나 덕에 산 주제에 빨리빨리 안 움직이냐? 응?”

“......”

말은 더럽게 한다지만, 받은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되는 법 유세현은 퀘루안의 말마따나 풀뿌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 꽃이 그새 하나 더 개화했어요!”

유승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던 것을 멈추고 일제히 비석으로 향했다.

정말로 꽃이 한 송이 더 늘어있었다.

“...뭐지? 정말로 그냥 알아서 피어나는 건가?”

“흠... 어쩌면 진짜 그럴 수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개화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원들.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절대 이유 없이 피어날 리가 없다.’

수십 일이 흐른 지금까지 별 쓸모가 없어 유승혜과 강희수는 깜빡 잊은 모양이었지만, 그는 김다혜가 보여준 힌트를 지금까지 계속 신경 쓰며 잊지 않고 있었다.

[태초의 꽃은 태초의 힘을 양식 삼아 피어난다.]

태초의 힘...

그것이 무엇인진 아직까지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게 꽃에 바쳐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일순간 눈을 깜빡인 순간이었다.

스스슥-

“어?”

주위의 탄성과 함께 찰나의 순간 꽃 한 송이가 하나 더 활짝 개화했다.

인원들은 더욱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뭐지? 대체 왜...”

“이건 진짜 조장님과 아리우스가 뭘 했다고 볼 수밖에 없겠는 데요?”

이로서 개화한 꽃은 총 4송이.

남은 줄기는 6개.

“이렇게 된 거 그냥 비석에 도착하면 끝나는 거였으면 좋겠군.”

“정말로...”

드래곤, 드레보스가 툭 내뱉은 말에 강희수가 자연스레 동조하며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드레보스가 계속해서 푸념했다.

“후, 하필 떨어져도 이딴 곳에 떨어지다니... 정말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아니래. 난이도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잖아. 이게 말이 돼?”

“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강희수?”

“당연한 거지. 저 파수꾼 봐봐. 도저히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잖아.”

“확실히 저건 못 잡지.”

“아니 대체 어떤 망할 놈이 이런 던전을 구상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F랭크에 저 파수꾼이라니. 땅은 계속 무너져 줄어들질 않나. 힌트는 쥐꼬리만큼도 없지 않나. 안 그래?”

“동감이...”

“쯧쯧쯧, 잘들~ 논다. 아주 잘들 놀아. 그냥 둘이서 친구먹지 그래?”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가던 강희수와 드레보스 사이로 퀘루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훅 끼어들었다.

“아주 알콩달콩한 게 여기서 탈출하면 아주 그냥 새로운 종족 하나 만들겠어? 응? 하프 레드드래곤? 응?”

퀘루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깐족거렸고, 이에 강희수와 드레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마냥 머쓱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휙 돌렸다.

둘은 지금만큼은 서로가 적임을 진짜로 망각하고 있었다.

퀘루안이 와락 소리쳤다.

“야! 이놈들아! 떠들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풀뿌리나 빨리 캐와! 나 배고파 죽겠으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아, 알았어! 가면될 거 아니야! 가면! 어휴, 저 망할놈의 성격.”

드레보스가 헐레벌떡 움직였고, 강희수가 이어 혀를 차며 수풀로 들어갔다.

유세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퀘루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유세현을 향해 말했다.

“어이, 유세현. 지금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

“...뭘 말이지?”

“어어? 모른척하는 것 봐라? 내가 뭘 말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

“쳇, 재미없는 놈 같으니. 야, 나랑 대화 안 할 거면 너도 빨리 가서 풀뿌리나 캐와. 일한 만큼 난 쉬고 있을 테니.”

퀘루안이 손을 휘휘 젓자, 유세현도 이내 풀숲으로 자취를 감췄다.

퀘루안은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피식 실소를 토해냈다.

“몸은 제일 병신이지만, 사상은 반대로 놈이 제일 위험하군.”

“역시 그렇지?”

“어, 사실 이정도면 강희수, 그 인간 암컷처럼 우리에게 정이 붙을 만도 한데 말이지. 도무지 흔들리질 않아.”

“그래서?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금 뭘 할 수 있는 게 없는...”

옆에 있던 라플라스의 물음에 답하던 퀘루안이 대뜸 말을 뚝 멈춤과 동시에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뒤, 의문을 느낀 라플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퀘루안의 입에서 한 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야,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넌 뭔데 여기에 가만히 있냐 라플라스?”

“응? 나...나?”

“어 임마.”

“나, 나야 너의 대화 상대...”

“남 힘쓰고 있을 때 가만히 쳐 놀고 있던 게 개소리하지 말고... 너도 빨리 가서 풀뿌리 안 캐와?! 어?!”

퀘루안이 입에서 불을 뿜을 뿜자, 라플라스도 헐레벌떡 풀숲으로 자취를 감췄다.

* * *

하루가 또 흘렀다.

“후우... 거의 다 왔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변한 것은 꽤나 있었다.

우선 하루 사이에 줄기에 꽃이 3송이나 더 피어 총 7송이가 되었다.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짐에 따라 처음 작게만 보였던 비석은 마치 하늘과 이어져 있는 탑마냥 대리자들의 눈에 비쳤고, 지치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계속 걸어온 덕택에 이제 남은 비석까지의 거리는 잘해봐야 고작 6km 정도였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재차 진동이 시작된다.

“어?”

그리고 그 진동은 대리자들이 느끼건대 지금까지보다도 훨씬 더한, 그런 수준의 진동이었다.

“이거... 왠지... 뭔가 불안한...”

콰과과과과!

쿠궁!

“...!!”

유세현을 포함한 대리자들의 눈이 일순간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그들은 열심히 진군해온 덕에 땅이 무너져 내린 지점으로부터 그래도 2~3km 정도 여유가 있는 상태였는데, 땅이 바로 코앞까지 빠르게 무너져 내리며 전류가 순식간에 다가온 탓이었다.

“크윽! 염병할! 뭐 이리 갑자기!!”

쿵! 쿵! 쿵!

“...!!”

“설마?!”

설상가상으로 파수꾼까지 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큭! 세현씨 이쪽으로!”

쉬이이익-

지진은 그들이 있는 곳을 덮치고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모두를 몰살하려는 듯 전류와 땅의 붕괴, 파수꾼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몰아쳤다.

“뒤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있는 대로 마력을 사용해!”

인원들은 누군가의 외침처럼 자신이 제일 자신하는 이동기술에 있는 대로 마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크아아아악! 퀘루안님!!”

파수꾼의 이동 경로와 우연히 겹친 제일 후미에 있던 한 명의 드래곤, 에르프론이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풍압에 휘말려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파앙!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낭떠러지 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코인이 튀어 올라 대리자들을 향해 다가왔다.

마치, 먹으라는 듯이.

“크윽...”

퀘루안은 부하의 죽음에 침음을 삼키면서도 근처에 있는 코인을 매섭게 빨아들였다.

스스스-

[코인을 흡수했습니다. 법칙에 의해 스테이터스가 현 상태 그대로 유지됩니다.]

‘뭐라고?!’

으득-

질끈 곱씹은 퀘루안의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어느새 잔뜩 충혈 되어 있었다.

싸우다가 당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거기다가 스테이터스도 오르지 않기에 그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에르프론...’

뒤를 바라보던 퀘루안이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퀘루안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비쳤다.

‘이건... 이건...!!’

마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퀘루안이 마력통신을 이용해 드래곤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전원! 지금 당장 조심스럽게 인간들에게 접근하여 놈들의 목숨을 끊어라!!]

* * *

아리우스와 김다혜가 마주한 두 개의 갈래길 바로 앞에는 오직 한 명만 통과할 수 있는 문이 각각 비치되어 있었다.

정보를 살핀 아리우스와 김다혜가 서로를 바라봤다.

“여기서 갈라져야 하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아.”

“살아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하겠다. 김다혜.”

“아리우스 너도.”

지금까지 쭉 함께 함정을 파훼해온 둘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 눈앞에 있는 문을 힘껏 열어 재꼈다.

끼이이익-

둔중한 음색과 함께 문이 개방되며, 내부로 들어온 둘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거대한 홀의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의 줄기였다.

줄기의 맨 끝에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태초란 생명의 시작, 태초의 꽃은 태초의 힘을 양식 삼아 피어난다.]

그리고 곧장 그 뒤로 줄기의 반대편에는 서로 다른 문을 통과했던 상대방이 서 있었다.

아리우스와 김다혜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 각자 씁쓸한 한마디씩을 토해냈다.

“더러운 던전이군...”

“동감이야.”

치잉-

김다혜는 검, 아리우스는 건틀릿, 마치 옷매무새를 다듬듯 각자의 주 병기를 장착한 두 사람이 서서히 서로에게 접근을 시작했다.

아리우스가 말했다.

“지금까지 함께한 동료로써 나를 너무 원망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 김다혜.”

“동감이야. 아리우스.”

“......”

쉬이익-

둘은 그 말을 끝으로 서로를 향해 거세게 달려들었다.

태초의 정원(1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