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01화 (48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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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아름답게 드리운 어느 버스정류장의 앞.

김다혜는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자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한 남자의 귀여운 모습에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다혜야!”

남자는 그녀가 대답할 새도 없이 한걸음에 뛰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많이 기다렸어? 늦어서 미안. 갑자기 앞에 사고가 나서 버스가 막히는 바람에... 많이 추웠지? 얼굴 빨개진 거 봐.”

이어서 살포시 눈웃음을 지으며 김다혜의 볼을 쓱쓱 어루만져주는 남자.

그는 주위에 있는 누가 봐도 매력적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였다.

김다혜는 일부러 장난기 섞인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응, 많이 추웠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얼어 죽을 뻔~”

“어어, 진짜? 이상하네. 그 정도 추위는 아닐 텐데~”

“맞는데?”

“에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럼 내가 오늘은 지은 죄가 있으니까 우리 다혜 특별히 일일 여왕으로 떠받들어 모셔줄게~”

“후훗, 그게 뭐야.”

“장난 아니야. 진짜로~ 우리 여왕님 어디가고 싶으시죠? 많이 기다리셨을 텐데 배고프시진 않습니까?”

갑작스레 허리를 굽힌 남자가 능청스레 상황극을 시작했다.

김다혜는 순간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행동에 맞춰주었다.

“응, 배고파.”

“오! 역시! 어디로 모실까요. 돼지고기, 족발, 뭐든 준비 되어있습니다만.”

“음... 그럼 돼지고... 아, 잠깐! 원래 이런 건 묻는 게 아니라 신하가 미리 여왕님 취향 맞춰서 따박 따박 준비해둬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거 신하 수준이 살짝 의심 되는...”

“하하하,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실 제가 준비해둔 게 있습니다. 에스코트 해드릴 테니 제 손 잡으시죠 여왕님.”

“으응? 진짜로?”

“물론입죠.”

남자가 재차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다혜는 마지못해 그 손을 잡는 척 했다.

남자는 김다혜가 손을 잡자마자 자신의 패딩 주머니 안으로 함께 손을 쏙 넣었다.

패딩안 남자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후후, 그럼 이동해보도록 할까요?”

“그래 한 번 안내해 보거라. 괜찮지 않은 곳이면 경을 칠 것이야.”

“하하하, 무서워서라도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답한 남자는 이내 흥얼거리며 걷기 시작했고, 김다혜는 함께 발을 맞추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다정다감하면서도 재미있는 그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추운데 기다린 보람이 있달까?

‘밥 먹고 뭐할까나~’

김다혜는 다정하게 일일 신하가 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현아.”

* * *

“...어이 김다혜. 김다혜, 일어나라. 이동할 시간이다.”

“......”

아리우스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뜬 김다혜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가며 주위를 훑었다.

어둠침침하기 짝이 없는 외길의 통로와 차가운 돌.

‘꿈... 이었구나...’

방금 전까지 거닐고 있던 길과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에 김다혜는 씁쓸한 실소를 머금었다.

‘하긴... 헤어진 게 언젠데. 아니, 배신한지가 언젠데...’

자리에서 일어선 김다혜는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그 달콤했던 꿈을 잊기 위해 고개를 휘휘 털었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

허나, 되레 의식하게 되면 지워질 것도 빨리 안 지워지는 법.

“어이! 김다혜! 조심해라! 뭐하는 거냐! 지금 방금 함정을 밟을 뻔하지 않았나!”

“미, 미안...”

김다혜는 아리우스의 지적에 곧바로 사과했다.

드래곤이건 인간이건을 떠나서, 현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믿어야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 괜한 자존심을 세워 불화를 만드는 건 미련한 짓 중에서도 최고로 미련한 짓이다.

“후... 아니다. 결과적으로 밟진 않았으니 이렇게까지 화낼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나도 좀 민감해진 모양이군.”

“뭐, 이곳에 들어온 지 35일이 넘게 흘렀으니... 나도 더 정신 차리도록 할 테니까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 아리우스.”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이쯤에서 잠시 쉬어가자.”

“너무 빨리 쉬는 거 아닌가? 아직 한 시간도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이쯤에서 한 번 먹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먹어?”

“어, 받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다혜가 무언가를 아리우스에게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낸 아리우스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게 무섭게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받았어. 먹어.”

“...고맙게... 잘 먹도록 하지...”

그것은 퀘루안이 그토록 탐내고 탐내던 육포였다.

한 입 크게 깨문 아리우스가 몇 번 씹더니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맛있군... 이게 뭐라고... 예전에는 거들떠도 안 봤던 미천한 음식인데...”

“뭐,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라고도 하니까. 풀뿌리와 다르게 제대로 된 열량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퀘루안님이 그토록 발광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야.”

“그래서 준거야.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제 우리에겐 진짜 시간이 없어.”

“약 10일... 아니 9일인가.”

그 안에 던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탈출해야 된다.

“바깥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다른 단서를 찾았을까?”

“그럴 수도 있다. 퀘루안님은 무척이나 생각이 깊고 총명하신 분이니.”

“...그렇겐 안보이던데.”

“겉모습만 그런 거다.”

“아니, 육포 달라고 떼쓰는 거 보면 아무리 봐도...”

“......”

더 하면 무안해질라,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이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 나아가지 지나지 않아 그들은 마주할 수 있었다.

두개의 갈래 길.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던전의 끝을.

* * *

“아오! 빌어먹을! 스테이터스만 정상이었어도 저런 거리쯤은 단번에...”

언제나처럼 퀘루안이 투덜거렸으나 이미 적응을 완전히 마친 일행들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지금까지 얼마를 나아왔을까.

유세현은 그 여느 때처럼 고개를 들어 비석을 관찰했다.

혹시나 꽃봉오리가 개화하지 않았을까, 무슨 자그마한 변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해서였지만 안타깝게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변이 관찰 된 것은 그가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뭐지?’

여느 때처럼 관찰을 위해 비석을 올려다본 유세현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

꽃봉오리 주위에는 평소 마치 그것을 보호하듯 10개의 거대한 줄기가 에워싸듯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10개의 줄기 중 하나의 줄기 맨 끝에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일이었다.

유세현은 즉각 이를 드래곤과 동료들에게 알렸다.

“...!!”

“뭐라고?”

반응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저, 정말이다! 분명 어제까진 없었는데!!”

“언제지? 언제 핀 거지?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변화가 생긴 거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김다혜와 아리우스를 들여보낸 동굴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왜지... 왜... 대체... 단순히 시간이 많이 경과해서?”

“아니, 이 던전의 악독한 특성을 보건대 그건 결코 아닐 거다. 이 던전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뭐가 나타날 그럴 던전이 아니야.”

“확실히...”

“하지만 퀘루안님, 그게 아니라면 대체...”

분주하면서도 활발하게 의견이 순식간에 오간다.

동굴 발견 이후 실로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그럼...”

“우리 중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뭘 했다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뭘 해낸 거겠지.”

“설마 아리우스와 김다혜가?”

“가능성은 충분하다. 들어간 지 39일째니... 아무쪼록 저 비석에 다다라야 될 이유가 하나 늘었군.”

“지금 같이만 가면 5일 안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여유 시간은 길어야 4일 정도인가...”

“예, 그 안에 어떻게든 탈출 방...”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그들이 주시하고 있던 꽃이 맺힌 줄기의 바로 옆, 다른 줄기 하나가 매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갑자기 저거 왜 저래?”

“서, 설마?”

트드득!

그리고 순식간에 개화한 꽃!

“......”

정적이 내려앉으며 일행들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난데없이 꽃 하나가 더 피어난 탓이었다.

“......”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얼마가지 않았다. 아니, 1초도 가지 않았다.

“크크크. 알아냈다.”

퀘루안을 포함한 드래곤들이 마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유세현은 그들에게 왜 웃는 건지 굳이 묻지 않았다.

드래곤이 그러하듯 그 또한 단번에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퀘루안이 중얼거렸다.

“다른 건 다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군. 이 던전...”

눈을 번쩍 번뜩인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저 10개의 줄기에 꽃을 전부 피워내야 한다.”

* * *

루시펠의 작전에 패퇴의 치욕을 겪은 실라우벨과 알리크스.

둘은 서로를 만나 어떻게 해야 이 치욕을 갚을 수 있을까 고심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제길...”

쾅!

“놈들이 결정만 지니고 있지 않았어도...”

결정도 결정이지만, 이번 습격으로 동포들이 무척이나 많이 당해버린 탓이었다.

“큭... 정말 방도가 없는 건가.”

“...아쉽지만 우리만으로는...”

소모전이 되게 되면 승리를 해도 승리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사실 이제 그들의 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크으윽...!!”

레드, 블랙과 합세하여 싸우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방법 중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전 저질러 놓은 만행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레드와 블랙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크... 그때, 조롱하는 게 아니었는데...’

무척이나 후회하지만, 후회를 할 때는 언제나 이미 늦은 법.

그런데 그때였다.

그들에게 블랙 드래곤 한 명이 다가온 것은.

“알리크스님, 실라우벨님.”

“...응?”

실라우벨과 알리크스는 그를 단번에 알아봤다.

“데르브르크?”

“예. 맞습니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너가 여긴 웬일이냐.”

데르브르크는 현재 레드, 퀘루안의 부대를 도와주고 있는 블랙드래곤 부대의 부총대장이었다.

물음에 데르브르크가 답했다.

“염치불구하고 두 분께 부탁을 드릴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우리에게?”

알리크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들이 인간에게 깨진 것을 장막을 사수하고 있는 데르브르크가 모를 리 없는 탓이었다.

“야, 데르브르크. 지금 너 우리가 인간에게 깨졌다고 돌려서 조롱하는 거냐? 너 죽고...”

“진정하십시오. 저는 진심입니다.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도 있습니다.”

“...이유가 있다? 하! 아니기만 해봐라. 말해 봐!”

“예. 로드님과의 통신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뭐? 통신이 이어져?”

“예.”

데르브르크가 진중하게 답하자, 알리크스의 표정이 눈 녹듯이 스르륵 풀렸다.

블랙 드래곤 로드가 이끄는 드라프나우어의 본대는 무저갱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장막이 발현되며 지금까지 연락이 두절된 것이었다.

그런데 통신이 복구 되었다는 것은...

“설마...”

“예,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장막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입니다.”

“로드님은... 로드님은 괜찮으신가?”

“예.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어떤 일도?”

“예, 그 빛은 역시 레드와 인간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그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부탁이라는 게?”

큼큼, 헛기침을 한 실라우벨이 물었다.

데르브르크는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장막이 사라지자마자 무저갱에 있는 본대를 포함해 총공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 전투에 두 분이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태초의 정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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