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606 --------------
푸웅-
흙 속에서 제일 먼저 엘라뉘스가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받아온 데미지 덕분에 완벽히 방어를 못했는지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마력으로 항상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던 비단결 같던 머리카락은 일부가 끊겨 산발이 되어 흩날리고 있었고, 하얗던 피부도 전체적으로 그을렸다.
‘그 치밀하기 그지없는 데프하우어가 이런 마구잡이식 공격을 감행하다니... 그것도 벨제뷔트의 안위까지 무시한 채... 대체 뭐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 거지?’
아무쪼록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런... 마력이...’
이번 공격에 의해 아끼고 아껴왔던 힘의 대다수를 소진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크으으... 데프하우어...”
마찬가지로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크라베스와 렘벨크 등등 많은 이들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은 데프하우어가 아무 생각 없이 날린 무차별적인 광역 공격이 단순히 짜증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위력적인 스킬을...’
‘놈도 분명 제약을 받고 있을 터인데...!!’
그들의 데프하우어가 보여준 역량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래서 아무런 내막을 모르는 그들은 마치 책임을 묻듯 벨제뷔트에게 신경질적으로 성질을 냈다.
“벨제뷔트!! 이게 무슨 짓이냐!! 네놈 쪽이 더 불리하니 이판사판 다 같이 죽자, 뭐 그런 거냐?”
“......”
하지만 그들 또한 몰랐다.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 벨제뷔트 또한 그들처럼 마찬가지로 놀란 상태라는 것을...
‘어떻게...’
벨제뷔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데프하우어에게도 제약이 걸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완전한 상태라면 몰라도 전투를 치른 지금은 이 정도의 광역 마법은 발휘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자 빠르게 회전하던 벨제뷔트의 머릿속으로 답이 자연스레 도출되었다.
‘설마... 고유특성을 개화한 건가?’
수하의 성장은 분명 좋은 일임이 분명했지만 벨제뷔트는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방금 전의 운석으로 인해 균형이 무너졌다.
벨제뷔트에게 안 좋은 쪽으로.
-데프하우어... 데프하우어!!
벨제뷔트가 재빨리 교신을 시도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제기랄!!’
“후우... 후우...”
지친 얼굴로 호흡하던 엘라뉘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게이트까진 이제 정말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남다른 판단력을 지닌 그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족도, 망령을 다루는 종족도 아닌, 소수 정예 델바람 때문에.
“뭐... 됐어. 어차피 그런 마법... 두 번 사용하긴 힘들지.”
카그네프가 손목을 돌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다른 이들의 체력이 10~20% 정도까지 떨어진 상태인 반해 힘을 온전한 상태로 뒤늦게 등장했었던 카그네프의 체력은 아직 60% 이상으로 상당히 높았다.
드래곤에게도 아직 카스디아와 에르비아크, 제루웬 베루라는 주력 세력이 남아있었지만, 그들 또한 다수의 적과 전투를 치른 상태로 등장한 것이었던지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아크샤와 파라간이 이끌고 온 2군은 대다수가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날아간 상태.
남아있는 아크샤와 파라간은 분명 강자였지만 추리고 추린 최상위 대리자만 데리고 온 델바람들에게는 비빌 것이 못 됐다.
‘어쩔 수 없군.’
결국 마음을 정한 엘라뉘스의 몸에서 광명이 터져 나오며 육체의 변화가 일어났다.
약간이지만 데프하우어보다도 더 거대한 크기.
위용 있게 펼쳐진 두 개의 날개.
“그렇게 나오신 건가...”
[어차피 너희들도 운석을 막기 위해 무지막지한 수준의 마력을 사용했을 터!]
“미안하지만 널 죽일 정도의 마력은 남아있다!”
강력한 마법에 의해 한번 소강상태로 접어든 대리자들의 전투가 재개되었다.
* * *
고열로 인해 도자기처럼 굳어버린 흙구덩이 속에서 손가락 하나가 뿔룩 튀어나왔다.
작은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와 밝히자 구멍 사이로 깜박이고 있는 눈동자가 비친다.
“어때?”
“뭐, 예상했던 것처럼 치고 박고 싸우고 있어.”
좁은 틈으로나마 주위를 대충 둘러본 유세현이 말했다.
이에 이강호는 턱을 짚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파로 모든 것이 날아갔기에 이제는 이 구덩이가 그들의 몸을 숨겨주는 마지막 엄폐물이었다.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순식간에 모두를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적에게 필연적으로 들키게 되어 모두가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채게 될 터였다.
이윽고 결단을 내렸는지 이강호가 일행 전체를 한 번 흘겨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간다.”
“......”
“접근 방식은 이전에 내가 말했던 대로.”
“알았다.”
제넥과 레피아를 포함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쿵!
신호를 주자 흙더미를 부순 그들의 신형이 일제히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거대화를 한 엘라뉘스의 모습이 일행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뭐, 뭐야?”
“무, 무슨?”
동시에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는 주위 대리자들 또한 눈에 비쳤다.
“이, 인간?”
그러나 대리자들이 일행을 방해할 틈 따윈 없었다.
레피아가 그림자가 되어 순식간에 유세현의 갑주에 녹아들었다.
김주희가 잽싸게 유세현의 목을 붙잡았고, 아퀼라는 허리에 매달렸다.
마지막으로 제넥과 이강호가 양쪽 어깨를 붙잡은 순간이었다.
우우웅-
파아앙!
마치 장전 된 총알이 발사되듯 유세현의 육체가 일순간 가속했다.
근처에 활공하고 있던 드래곤이 있었으나, 유세현은 엄청난 속도로 그들이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지나쳤다.
[...?!]
“!!!!”
대놓고 기척을 드러내자 강자들은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이를 알아챘다.
본체화 한 엘라뉘스를 포함하여 맞붙고 있던 다수의 눈동자가 일순간 파르르 흔들린다.
드래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현재 대놓고 접근하고 있는 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한 상태였다.
“저놈들이!! 또!!”
[막아라!]
드래곤들이 접근을 불허하기 위해 다급히 마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때 유세현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치지직-
콰아아아앙!
미세하게 일어난 스파크와 함께 발현된 천마혈사장이 자잘한 마법을 그대로 꿰뚫으며 길을 만든다.
속전속결.
처음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일행은 어느새 그들의 바로 앞까지 접근해있었다.
붙잡고 있던 어깨에서 손을 놓은 이강호의 전신이 곧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화르륵!
쿠쿠쿠쿠!
발산한 불길이 엘라뉘스의 오른쪽 팔을, 김주희의 빙백신공이 왼쪽 팔을 동시에 노렸다.
거기에 더해 머리위에서 떨어지는 유세현의 검과 양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아퀼라와 제넥의 창까지.
‘이, 이놈들!’
다른 모든 이들을 무시하고 자신만 노려오는 그 악랄함에 엘라뉘스가 순간적으로 아연실색했다.
그녀가 아무리 대단하기 그지없는 그린드래곤 로드라고 할지언정 마력도 거의 다 떨어진 지금 이 상황에선 마땅히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런 빌어먹을 인간 놈들!”
“이강호!!”
여태껏 죽일 듯이 엘라뉘스를 향해 몰아치던 세 종족이 인간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콰과과광!
그로 인해 발생한 틈.
엘라뉘스는 난데없는 세 수장의 합심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재빨리 뒤로 피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이 자식들이... 또 얌체같이...!!”
“네놈들부터 찢어 죽여주마! 인간!”
세 수장이 일행에게 강렬한 적개심을 내비치며 포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즉 한번 품은 적 있던 의문이 엘라뉘스의 머릿속을 다시 한 번 스쳐지나갔다.
‘그래... 그러고 보니 크라베스라는 놈이 나에게 인간의 행방에 대해 물어왔었지.’
마왕과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수장들의 저 광기 어린 집착.
‘그리고 방금 전에 분명 “또” 라고 말했다.’
또 라는 말이 나왔다는 건 이전에도 한번 당한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가 정말 저 인간들 때문이라면...’
아가레스가 그러했듯 엘라뉘스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답은 하나.’
엘라뉘스의 눈동자가 인간들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 * *
‘역시 쉽지 않군.’
이강호가 이프리트의 삼지창을 보며 아쉬움의 혀를 찼다.
‘멸화창만 지니고 있었더라도...’
이프리트의 창은 분명 SSS랭크 아이템으로 그의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매우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등급이 아쉽게도 유니크였다.
반면 멸화창은 SS랭크로 랭크가 하나 낮았지만 등급은 레전더리.
그렇기에 두 창은 증폭 효과만 1.5배, 경도는 비교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 갭 차이가 컸다.
‘하지만 그 창은 지금 당장... 아니 어쩌면 끝까지 얻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멸화창은 제 5유적, 쿠룬 종족과 마왕이 5번째 신물파편을 두고 맞부딪치고 있을 때 쿠룬의 대전사, 쿠니아칸의 잡고 얻은 것이었다.
어떤 던전에서 나오는지 회귀하기 전까지 알아내지 못했기에, 멸화창을 얻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은 수순을 밟는 게 정석인데 현재에 이르러서는 미래가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후... 아무쪼록 시간이 끌리면 위험하다.’
“비켜라.”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이강호의 눈동자가 주홍빛 섞인 푸른 귀화를 토해냈다.
가슴을 노려오는 카그네프의 주먹을 회전하여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그는 곧바로 회전력을 이용해 발꿈치로 카그네프의 등을 후려 깠다.
“큭!”
카그네프는 순간적으로 밀려났지만 지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 카그네프의 녹안에서 번쩍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석화인가!’
이강호는 불길을 내뿜어 가속하여 회피함과 동시에 카그네프의 머리통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지 탈취는 세현이에게 맡긴다.’
이 중에서 최고로 쌩쌩한 카그네프에게 방해를 받아서야, 도무지 엘라뉘스를 잡을 틈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이브! 렘벨크! 카그네프를 도와라!”
“예!”
크라베스가 곧장 지원 병력을 보냈다.
이강호가 파편 조각을 지니고 있는 만큼 마음 같아서는 그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무시하기에는 김주희와 아퀼라 또한 대단한 강자들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막 둘이 이동을 하려던 찰나였다.
파앙!
한 인물이 렘벨크와 이브를 막아섰다.
후웅! 후웅!
후우우웅!
마치 육체의 일부라도 되는 것 마냥 너무도 자연스럽게 몸 주위로 창을 돌리고 있는 남자.
이브와 렘벨크가 대번에 그를 비웃었다.
“흥! 감히 혼자 우리를 막을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막은 자는 분명 인간이었으나 전혀 상정에 두고 있지 않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세계를 겪어보지도 못한 덜떨어진 놈이 어디서...”
이에 제넥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나를 너무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희의 스텟은 분명 나보다 우위에 있을 테지만...”
그가 먼저 달려들며 읊조렸다.
“실력까지 우위에 있진 않을 테니.”
후웅!
쉬이익!
마치 창이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창끝이 뱀처럼 휘어 렘벨크를 향해 파고들었다.
‘?!’
치직-
렘벨크가 높은 스텟을 이용해 잽싸게 회피했으나, 회전력이 담긴 힘은 보이지 않는 칼날이 되어 그의 갑주에 생채기를 남겼다.
움직임을 본 이브와 렘벨크의 눈가가 일순간 꿈틀거렸다.
‘이놈... 만만히 볼 수 없다.’
탑의 디버프로 스텟이 낮아지고, 체력까지 상당히 소진한 상태였던 그들은 긴장하지 않고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확실히 상대해 빠르게 물리친다. 내가 우측을 노릴 테니 네가 좌측을 공략해라 이브.]
[그러지.]
마음을 맞춘 두 사람이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재차 피식 비웃은 제넥이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그는 이번엔 바로 옆에 있는 마족을 공격했는데, 무슨 의도인진 구태여 생각해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굉장히 노골적으로 행동을 취했다.
‘저놈...’
슬쩍 돌아본 제넥이 손을 까딱이기 무섭게, 열이 오른 이브와 렘벨크가 동시에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진리의 반지(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