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447화 (43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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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난장판이군.”

중얼거리는 델바람의 수장 카그네프의 이마에는 힘줄이 뿔룩 돋아 있었다.

마족의 움직임을 읽고 만약을 대비해 병력을 분할시켜 드래곤의 중심지로 향하고 있는 그였으나, 그는 벨제뷔트와는 다르게 확실한 정보통이 없었으므로 확신을 지니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세력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일단 움직이고 있는 것일 뿐,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안 그래도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드래곤까지 필사적으로 방해를 해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카그네프님! 드래곤들의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차라리 게이트를 통과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삼파전... 아니, 엘프나 크라베스의 종족까지도 끼게 되면 사파전도 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큰 희생이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 층에서 빠져나갈 방도는 없으니 서로 싸워 공멸하도록 놔두고 위에서 기회를 보는 편이...”

이 막무가내 돌파를 꺼림칙하게 생각한 부하들이 조언했지만 카그네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순히 신물 파편을 쟁취하는 게 목적이라면 부하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옳은 판단일 수도 있었으나, 그가 노리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강호의 기억이었다.

만약 이강호가 여기서 다른 이들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면 두 번 다시 그의 기억을 읽을 수 없게 되기에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 목숨을 그렇게 아끼는 드래곤들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막는다는 건 내부에 뭔가가 있긴 있다는 뜻이다.’

만약 이강호가 이 자리에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뭔가를 손에 넣게 된다면?

“어?”

“물러난다!”

그때 드래곤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의 마법과 브레스는 하나같이 강력했으나, 막대한 물량 앞에서는 역시 장사가 없었다.

병력을 끌어 모아 상대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드래곤들에게 진군하고 있는 종족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마족, 엘프, 델바람, 블러드소울. 이 4개의 강력한 종족이 쓸데없는 다툼을 피해 각기 다른 루트로 포위하듯 진군하자 졸지 아니게 목표물이 된 드래곤들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때문에 에르비아크는 물론이거니와 그린드래곤 로드인 엘라뉘스조차도 이 사태 만큼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설마, 정보가 새나간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다. 인간들의 침입 이후로 경계를 더 삼엄히 하지 않았더냐. 게다가 그 인간조차도 우리의 대화를 조금 엿듣는데 성공했을 뿐 중요한 정보는 뭣하나 얻어가지 못했다.”

“흐음, 확실히 로드님의 말씀이 전부 맞습니다만...”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설마 배신?’

에르비아크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지나갔다.

정보가 외부세력에 의해 유출된 게 아닌 내부로부터 유출된 게 아닐 까하는 그런 가설 말이다.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동족을 배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신하여 타종족에 붙어봐야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드래곤은 이방인, 최후엔 소모품으로 활용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강자인 드래곤이 뭐가 아쉬워서 적에게 붙는단 말인가?

명말 위기 직전이라면 몰라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

그런데 그때 에르비아크의 머릿속에 한 존재가 불현듯 떠올랐다.

에르비아크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곧장 그 존재를 불러 세웠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여성형 드래곤이었다.

“에르비아크,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거냐. 적들 때문에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

“리뷔크 젠 카실리아. 네가 맡고 있는 담당직역은 분명 북쪽이었지?”

“...? 그렇다만?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마족이 남쪽에서 북상하고 있다.”

“......”

카실리아는 뭐 어쩌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리고 그 마족의 군세에 데프하우어님이 함께하고 있는 게 확인됐다.”

에르비아크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카실리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진짜?”

“진짜다.”

지독한 살기가 그녀의 전신에서 퍼져 나온다.

그 살기는 에르비아크가 보기에 연기 따위로 낼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데프하우어가 있다는 건 벨제뷔트도 같이 있다는 거겠군.”

“아마도 그럴 거다.”

“그럼 에르비아크, 너와 나의 진형을 바꾸자. 내가 놈들을 상대하고 싶어.”

“아버지와 맞붙게 되는 것일지라도?”

“아버지? 이제 데프하우어는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야. 내 아버지는 그날 그 자리에서 나를 지키고 죽으셨으니까. 지금 있는 건 본질을 잃은 껍데기일 뿐이지.”

“......”

“그러니 ‘님’자도 더 이상 붙이지 마.”

카실리아의 눈빛에는 강한 결의가 맺혀있었다.

벨제뷔트의 행동을 반드시 저지 하리라는 신념을 담은 결의가.

‘...괜한 의심을 했군.’

에르비아크가 입을 열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지금 진형을 바꿀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그렇다면 나를 왜 부른...”

“알려주고 싶었다. 모든 걸 잃은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에르비아크는 데프하우어가 어떻게 벨제뷔트의 손에 넘어갔는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약 6년 전의 일이었지.’

데프하우어가 이끄는 드래곤 부대와 벨제뷔트의 세력이 던전 내부에서 조우한 일이 있었다.

그때 에르비아크는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 나온 그린드래곤의 대표로서 데프하우어를 마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 에르비아크가 데프하우어를 봤을 때 그의 인상은 냉혈한이었다.

표정이 무척 차가웠고, 말투도 딱딱했다.

그러나 데프하우어는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애정이 많은 드래곤이었다.

그는 특히나 딸인 카실리아를 무척이나 아꼈는데, 거기에 더해 애쉬드브래스도 여타 드래곤과는 차원이 달라 카리스마도 남달랐다.

과연 차기 블랙드래곤 로드.

에르비아크는 같은 애쉬드브레스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그를 동경하기까지 했었다.

벨제뷔트와 데프하우어가 보상을 두고 경쟁을 이어갔지만, 당시 벨제뷔트는 마왕에게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군세가 불안정했기에 데프하우어를 당해낼 수 없었다.

수세에 몰린 벨제뷔트.

이때 벨제뷔트는 한 가지 더러운 수를 사용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뭐, 지금에 와서는 별로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지만, 당시 에르비아크의 입장에선 확실히 더러운 수였다.

벨제뷔트는 양동작전을 사용해 카실리아를 포획하여 카실리아를 빌미로 데프하우어를 협박했다.

원하는 장소로 오라고, 그럼 그녀를 무사히 보내주겠다고.

주위에 있던 수많은 드래곤이 카실리아를 포기해야 된다고 데프하우어를 향해 외쳤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장소로 나간 데프하우어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딸을 살리는 걸 선택했다.

그 대단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던 데프하우어가 타락하여 그의 수족이 된 이유였다.

카실리아와는 그 이후 쭉 친분을 이어오고 있는 상태.

에르비아크가 떠나가는 카실리아를 향해 툭 말했다.

“너를 본다면 데프하우어님께서 정신을 차리실 가능성은... 없겠지?”

“없어. 그러니 복수를 꼭 해드릴 거야.”

쿠구구궁!

카실리아가 사라지기 무섭게 동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레드드래곤이 발산한 브레스에 의한 불길이었다.

감상의 젖어 있을 시간 따윈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에르비아크는 곧장 엘라뉘스를 찾아갔다.

“엘라뉘스님 진행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으십니까? 이젠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얼마 정도 버틸 수 있겠느냐.”

“길어봐야 이틀...”

“그 정도면 충분하구나. 지금 유적의 힘을 개방시키는데 성공했으니 정확히 하루 뒤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낼게다.”

“오! 드디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유적이 해방됨에 따라 생기는 변화를 놈들이 만약에라도 눈치 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뚫고 들어올 가능성이 0%는 아니니.”

“명심하겠습니다.”

에르비아크가 자리를 떠나자 유적이 요동치며 구조물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 * *

쿠구구-

멀리서 느끼기에는 아주 희미한 진동이었다.

“뭐지?”

그러나 민감하기 짝이 없는 대리자들은 뭔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눈치 챘다.

“드래곤들이 드디어 뭔가를 했나 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카시우스님.”

“진군속도를 올릴 수 있겠나?”

“놈들이 깔아둔 트랩 마법과 계속 된 전투로 인해 병력들이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이 이상의 강행군은 무리입니다.”

“흠... 그렇다면...”

카시우스는 병력을 지휘할 지휘자를 제외한 나머지 최상위 대리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전 제6 유적 때처럼 정예의 인원들로 파고들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

많은 이들이 반대의사를 표현했지만 카시우스의 뜻은 완고했다.

다른 세력들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이 일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로리엔, 만약 발견하게 되면 잘 부탁한다.”

“염려 마세요. 대신...”

“그래, 만약 놈들을 발견하게 되면 이번엔 절대로 타협하지 않도록 하마.”

슈슉!

진형을 갖춘 엘프들이 돌파를 시작했다.

“이놈들이!”

드래곤이 브레스를 쓰며 응전했지만 대 여섯 마리, 최상위도 아닌 드래곤의 브레스가 그들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현재 드래곤들은 병력을 최대한 운용하며 힘을 비축해두고 있던 엘프들과 달리 힘이 많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큭! 놓쳤다!”

“막아!”

그리고 이 같은 일은 현재 이곳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렘벨크 길을 열어라.”

“예!”

크라베스와 그 외 종족들도 정예들을 이끌고 진동의 중심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수 시간.

사원 앞에서 조우한 크라베스와 카그네프가 서로를 발견하기 무섭게 우뚝 멈춰 섰다.

“하필 만나도 이곳에서 만나다니 거참 재수도 드럽게 없군.”

“하, 네 녀석의 빈정거림은 언제 들어도 짜증 나는구나. 카그네프.”

마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카그네프가 마지못한 척 툭 떠봤다.

“그래서? 놈들은 발견 했나?”

“놈들? 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네놈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하긴, 우리 둘 다 중간에 놈들을 발견했다면 구태여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을 테니 우문이었군.”

“아무쪼록. 죽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라.”

“내가 할 소리다만? 이제 막 태어난 종족주제에...”

“후후, 대신 너희와는 시작점이 다르지.”

“......”

“......”

신경전을 벌이는 두 인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마족이나 엘프의 동향을 모르니 일단은 겉치레 적인 연합을 맺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그간 인간을 쫓으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할 말 따윈 없어보였다.

“쳐라!”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병력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 * *

-장난 아니군.

블러드소울과 델바람, 드래곤들이 서로 한데 뒤섞여 한바탕 벌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제넥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하늘에서는 블리자드 같은 좀처럼 보기 힘든 고위 마법들이 이리저리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범위가 넓은지 유세현의 말에 따라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저 공격에 휘말려 발각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묻는 건데 유세현, 당신은 어떻게 적들의 움직임을 그리 잘 파악할 수 있는 거지?

-비밀입니다.

-쳇! 그렇게 나오기냐! 그래 뭐, 중요한 건 피했다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당신들 저 사원에 잠입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이대로라면 레피아씨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무리일 것 같은데?

제넥이 솔직한 의견을 털어놨지만 이강호가 즉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아니, 가능하다.

-어떻게 확신하지?

-다른 놈들도 곧 도착 할 테니까.

-다른 놈들? 설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사원 반대편에서 날아온 충격파가 폭음과 함께 일대를 덮쳤다.

진리의 반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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