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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딴 일을...”
베르네브는 현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유세현의 눈에는 그것이 굉장히 철없게만 보였다.
“이강호... 이강호오오...!!”
그는 이강호에게 통솔권을 빼앗긴 걸 여전히 분해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음에도 저런 행동을 보이는 걸 보면 집념만큼은 실로 대단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이기에 살아있어 봐야 별로 쓸모가 없어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의 주위에는 여전히 4명의 기사가 철통같이 호위하며 붙어있었다.
간신조차도 다 떨어져 나간 마당에 기사들은 왜 저런 자에게 여전히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쓰레기라고 할지언정 황제라서?
‘......’
거기까지 생각한 유세현은 베르네브에게서 이만 관심을 껐다.
하는 짓을 보건데 어차피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뿐 베르네브는 결국에는 죽을 인물이었다.
투란다스 론 아르카드를 암살 했을 때처럼 모략을 꾸밀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나 전혀 위협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그 시간 동안 주위를 한 번이라도 더 탐색해보는 것이 개인으로서나 단체에게나 훨씬 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유세현이 다시 주위 감시를 시작한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빌어먹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베르네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기사들을 둔 채 지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업무태만을 넘어 명백한 지시 위반이었다.
‘아무리 배알이 꼴린다지만...’
다른 곳도 아닌 이 절멸의 탑 내부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후우...’
어린아이보다도 못한 짓에 유세현이 나뭇가지 위에서 일어섰다.
‘어디 한번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나 볼까.’
유세현은 곧바로 베르네브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되레 조용히 뒤를 미행했다.
베르네브에게 쓰는 시간은 여전히 아까웠지만, 증거가 있어야만 전직 황제였던 그를 몰아붙일 명분이 생기기에 이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다.
무공으로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기에 능력에서 많이 차이가 나는 베르네브는 유세현의 존재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유세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네브가 움직인 목적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제르오펜 경!”
제르오펜을 발견한 베르네브가 그를 조심스레 부르자 목소리를 들은 제르오펜의 미간이 일순간 꿈틀거렸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딱 봐도 접촉을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흠... 저 자는...’
유세현으로서는 별로 익숙지 않은 얼굴.
‘그렇다는 건 리더급은 아니라는 건데...’
뭐 때문에 구태여 그를 찾은 것일까.
유세현이 여전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주위를 다급히 흘긴 제르오펜이 베르네브를 향해 개미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베르네브! 분명 내가 찾기 전까진 찾아오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을 텐데?”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네 자리로 돌아가라! 만에 하나 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큭, 미행 따윈 당하지 않았으니 염려하지 마라. 게다가 놈들의 대다수는 바깥으로 정찰을 나간 상태다. 들킬 확률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어리석은 놈! 대부분 나간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부 다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네까짓 게 놈들의 미행을 간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놈들이 제대로 마음먹는다면 나조차도 눈치 못 챌 수도 있다!”
“......”
“알아들었으면 빨리 돌아가라! 그리고 때가 오면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 그때까진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라!”
이내 엄포를 놓은 제르오펜이 몸을 홱 돌려 다시 일을 시작하자, 베르네브는 이를 갈면서도 자신이 본래 있던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제르오펜의 염려대로 듣고 있던 유세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뭐지 저놈?’
둘의 관계는 누가 봐도 군신관계 같은 게 아니었다.
마치 서로를 동급으로 여기는 듯한, 베르네브의 비틀린 성격을 보건데 말도 안 되는 관계였다.
‘흠... 마력은 딱히 이상한 점이 없는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둘의 마력 흐름을 살피고. 혹시나 하여 더 나아가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지만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둘 다 일반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마력도 평범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그 대화 내용... 분명히 뭔가가 있다.’
정확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유세현은 그것만큼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황상 어설픈 쿠데타 같은 건 절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뭐지?’
베르네브가 저렇게 나오는 것으로 봐선 분명 커다란 일임에는 분명하다.
문제는 현재로선 딱히 의심 가는 게 없다는 것.
‘나중에 직접 한번 접촉해봐야겠군.’
그리 생각한 유세현은 일단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이강호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을 이끌고 수색에 나온 것은 사람들에게 이곳의 대략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적응시키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실 이동할 땅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중력의 법칙이 망가진 세계.
그로인해 일정 시간마다 땅이 뒤집히는데, 뒤집힌 땅에는 고열의 화염이 흐르고 있어 평범한 대리자들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새로운 땅을 찾아 계속 이동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이종족들을 물리쳐야 되는 게 바로 이곳 5층이었다.
그렇게 한차례 수색이 마무리되자 이강호가 각 리더들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제일 먼저 이태광이 말했다.
“우리가 간 북쪽 섬에는 거미와 바퀴벌레를 합친 듯한 외형을 지닌 대형 몬스터들이 대거 서식하고 있었네.”
“그렇습니까. 혹시 다리의 개수가 몇 개인지는 기억나십니까?”
“물론이지. 12개였네. 확실해.”
“흠, 그렇다면 그건 저도 모르는 개체군요. 꼼꼼한 보고 정말 감사합니다. 그 다음.”
이강호는 한 명 한 명 빠지지 않고 세세하게 내용을 청취했다.
그가 이 탑을 한 번 오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탑의 내부는 너무도 방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정보를 종합하고 그나마 안전한 방향을 고를 필요성이 있었다.
“후우...”
“많이 힘들어 보이는 군, 이강호.”
피로한 눈두덩이를 이강호가 연신 꾹꾹 누르고 있자, 어느새 그의 뒤로 접근한 레피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강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언제나 그런 거 아니겠나. 레피아.”
“후후, 언제나라...”
중얼거린 레피아의 입가에는 쓴 미소가 맺혀있었다.
“이강호,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너무 혼자 많은 것을 짊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 보여.”
“......”
“뭐, 우리 입장에서야 많이 알고 있는 너의 그런 모습이 든든하기 그지없지만... 가끔 내 스스로가 초라해진단 말이지. 짐짝처럼 느껴져서 말이야.”
“너희는 짐짝 같은 게 아니다.”
이강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진심이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불태워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 이곳에 없었을 테니까.
“후후, 즉답이라... 기분은 참 좋네.”
“......”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를 좀 더 믿고 의지해 달라는 거야. 이벨린이나 남궁시영... 다른 모두가 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으니까.”
레피아가 그의 어깨를 살포시 툭툭 쳤다.
“그러니깐 가서 좀 쉬어라. 나머진 우리에게 맡기고 말이야.”
“...훗, 그럼 부탁하지.”
이강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생각해야 할 게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대놓고 배려를 마다하는 것은 동료에 대한 무례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해먹에 누워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야, 강호야 자냐?”
“어? 아니? 왜?”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시간 좀 내줘.”
다가온 유세현의 진중한 표정에 이강호는 대번에 해먹에서 일어섰다.
“뭔데?”
“그게 말이지...”
유세현의 이야기가 진행되자 들어나가는 이강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 * *
“흠... 그렇단 말이지.”
“응.”
유세현의 말이 끝났을 때쯤에는 이강호가 턱을 붙잡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쩔까? 지금 바로 접촉하는 건 너무 티 날 거 같아서 안 했는데.”
“잘했어. 아직은 하지 마.”
“언제쯤 하는 게 좋을 거 같냐?”
“적어도 이 층은 클리어하고 나서.”
이강호가 들어본바 잠재적 위험성은 충분히 있었지만, 그보다도 급한 것은 이 층의 클리어였다.
“놈들이 오기 전에 클리어 해야 돼.”
엘프, 델바람, 블러드소울.
예측하건대 놈들이 이곳에 당도하기까지는 그리 머지않았다.
이강호가 클리어 조건을 전부 알고 있음에도 인간세력이 나약하기 그지없어 여태까지 많은 부분을 우회해야 됐던 반면, 모두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놈들은 저층부를 순수 힘으로 때려 부수며 빠르게 조건을 알아냈을 게 분명한 탓이었다.
“이동!”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자 또다시 몬스터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우수수 쏟아졌다.
“부상자는 뒤로 빠져라!!”
“광역스킬로 체력을 소비시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싸웠다.
섬을 이동하는 방식은 특수한 포탈을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거기까지 다다르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몇 개의 섬을 통과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수색을 나간 이강호의 눈에 저 멀리 한 종족이 비쳤다.
돌 같은 재질로 이루어져 있는 신체.
‘스토르 벤?’
과거 트롤의 왕 트루크를 잡고 판도라 내부로 떨어진 뒤, 맨 처음 조우했었던 종족이었다.
‘놈들이 이곳엔 어떻게...’
본래 지금 시기에 놈들이 있어야 될 장소는 이곳이 아닌 제5 유적이었다.
이강호는 유적하자 문득 알테라그와 함께 했던 제3 유적이 번뜩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스토르 벤도 함께했었지.’
당시 스토르 벤의 수장 격이었던 스토크는 거기서 유세현 일행과 함께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지금 저들이 여기에 있게 된 이유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탑을 오르려면 저들이 점령하고 있는 장소를 지나쳐야 되는데...’
이강호가 지그시 혀를 찼다.
하필 스토르 벤이 점거하고 있는 곳은 6층으로 오를 수 있는 장소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최종도착역의 전역인 셈이다.
알고 막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막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조건 지나가야 했기에 대립의 발생은 불가피했다.
‘본 힘을 다 사용할 수만 있다면 쉬울 텐데...”
현재 고위 대리자인 이강호를 포함하여 나머지 5명은 스텟이 어마어마하게 깎인 데다가 스킬의 일부까지 봉인 당한 상태였다.
잠시 고민에 빠졌었던 이강호가 결론을 내놓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전면전은 안 된다.’
피해가 커도 너무 클 것이 분명했다.
‘유인책을 사용하거나, 타종족을 이용해서 놈들의 시선을 돌려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이강호가 자리에서 이탈하려는 순간이었다.
스스슥-
줄곧 응시하고 있던 스토르 벤 한 명의 고개가 이강호를 향해 홱 돌아갔다.
이강호가 그의 기척을 먼저 느끼고 발견한 것처럼, 그 또한 뒤늦게라도 이강호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귀찮아졌군.’
스토르 벤은 자기 부대를 이끌고 영역을 침범한 이강호를 향해 날라들었다.
거리가 무려 3km나 떨어져 있었지만 고위 대리자에게 3km는 일반인의 50m와 다를 게 없었기에 접근해오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죽어라.”
후웅!
파아앙!
스토르 벤의 손짓과 함께 상상할 수 없는 고열의 불길이 이강호의 부대를 덮쳤다.
“크윽!”
열기에 밀려나는 부대원들.
반면 이강호는 되레 앞으로 뛰어들며 불길을 내뿜은 스토르 벤을 향해 창을 휘둘러 반격했다.
서걱-
창이 일자로 내리그어지자 싸늘함 음색과 함께 스토르 벤의 몸이 두 동강이나 지면에 떨어진다.
“?!”
이에 함께 습격을 감행해온 스토르 벤들의 얼굴은 감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크넨을 일격에?”
“말도 안돼!!”
이강호는 놈들이 놀란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압!”
그는 폭발 소리를 듣고 지원을 오고 있는 레피아나 이태광이 도착하기 전에 사태를 끝낼 셈이었다.
그러나.
치지직-
콰앙!
재차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달려든 이강호의 바로 앞으로 회백색의 낙뢰가 떨어졌다.
이강호는 이 낙뢰를 사용한 자가 누군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토크...”
스토르 벤의 영웅.
그의 앞에 나타난 스토크가 한쪽 손을 치켜들어 막으며 외쳤다.
“멈춰라, 이강호! 우린 이 이상의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점거된 땅(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