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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탑.
이 탑은 과거 수많은 종족들의 무덤이었다.
악랄한 법칙과 온갖 종류의 함정은 여타 던전들과 차원이 달랐고,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수준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연찮게 이곳을 발견한 많은 이들이 부푼 꿈을 가지고 도전했지만 클리어에 성공한 자는 없었다.
중간지점조차도 다다르지 못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하여 탈출하는 게 고작이었다.
생존에 성공하여 돌아온 자들은 이곳을 지옥 혹은 무덤이라 부르며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 탑의 존재가 알려지는 일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이 탑의 존재가 인간에게 알려졌던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탑을 발견한 자의 이름은 제르베트.
그는 거대 방패를 주력무기로 사용하는 이강호의 동료로 작전 수행 중 이 탑을 발견했는데, 동료들과 상의를 나눈 끝에 그는 조사를 위해 1000명을 데리고 이 탑에 진입했다.
당시 인간측은 다른 이종족에 비해 무척이나 허약했기에 던전을 발견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떡해서든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제르베트를 포함하여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진입한 인원의 평균 스탯이 SS랭크 20%, 팀을 이끄는 제르베트가 무려 80%에 달하는 뛰어난 대리자였던 것을 고려했을 때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이강호가 직접 나서 2차 시도를 하려 했으나 동료가 말렸기에 불가능했다.
주요 전력을 더 이상 잃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1000명의 희생을 딛고 여타 종족처럼 이 탑의 무서움을 깨달은 사람들은 탑을 떠나 여행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모였다.
그런 그들이 다시 탑을 방문하게 된 시기는 당시 마지막 유적이었던 제6 유적 가이드가 클리어 됐을 때였다.
당시 이강호와 생존자들은 제6 유적에 잠들어 있는 신물 파편만큼은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애썼지만 결국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6개의 파편이 전부 해방되자 일어난 세계의 재구축.
5번째 신물 파편이 개방되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 여파에 사람들은 끝없는 이동을 계속해야만 했다.
하루도 같은 장소에서 머물 수 없었고, 동선이 겹친 수많은 종족들과 끝없는 전투를 벌였다.
재방문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탑에 원해서 돌아온 게 아니라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돌아온 것이다.
그들이 머물던 주변에서 정상적인 곳은 탑 주위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들을 제외하고도 붕괴를 피해 많은 종족들이 탑 주위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피해 결국 내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바로 이강호가 겪은 악몽 중 베스트 3안에 드는 절망의 시작되었다.
* * *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군.’
휘이잉-
탑 내부에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잠시 회상에 젖어있던 이강호는 이내 고개를 휘휘 털어 생각을 떨쳐냈다.
이곳은 지옥.
곧바로 시작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절멸의 탑 1층에 진입하셨습니다.]
[탑 내부의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힘의 일부가 봉인됩니다.]
[봉인 대상자는 유세현, 이강호, 김주희, 루시펠, 아퀼라 라즈베리, 루시아 아인셰르 입니다.]
뿌우우웅!
눈보라가 치미는 저편에서 뿔피리 소리가 장황하게 울렸다.
이 탑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감지하고 각 군세에게 이를 알리는 소리였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돌진해오리라.
“시작이네.”
“그렇지. 내가 일러준 작전 둘 다 기억하고 있지?”
“물론이지.”
“물론이죠 선배!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고요!”
이강호의 재확인에 김주희와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인간 측은 이강호가 미리 일러둔 작전에 따라 세 팀으로 나눈 상태였는데 그 팀의 총지휘자가 이들 셋이었다.
루시펠과 아퀼라, 루시아는 각각 한 명씩 보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좋아, 내 말대로만 한다면 1층에서는 희생이 발생하지 않을 거야.”
“오케이. 그럼 나중에 보자고.”
“둘 다 다치지 마세요!”
세 명은 곧장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을 통솔하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대군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미, 미친...”
세상을 까마득히 물들인 거대한 그림자를 확인한 사람들은 빠져 나간 넋을 좀처럼 되찾지 못했다.
쭉 도열 되어 있는 몬스터들의 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인간 측도 결코 적지 않은 수임에도 놈들은 아예 한차례 차원이 달랐다.
“이, 이런 걸 어떻게 당해내?”
“S랭크만 되도 우린 전멸이라고!”
이윽고 곳곳에서 성화가 터져 나와 일대를 잠식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조용! 어차피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다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나! 입구가 봉쇄된 걸!”
리더들이 나서서 제압하기 시작한 것.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해라!”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살아남는다!”
더불어 그들은 수그러든 기세를 북돋으려 노력하기까지 했다.
팀을 이끄는 리더들은 한 명 한 명이 리더가 된 데 전부 이유가 있었다.
쿵!
쿵!
이윽고 놈들이 본격적으로 전진해오기 시작하자 아직 수십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여 목 너머로 마른침을 연신 넘겼지만, 더 이상 아우성을 지르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여태까지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리더의 말에 그들은 마음을 다잡은 상태였다.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자 능선 위에서 적군을 살피던 유세현이 부총괄 자인 이벨린에게 지시를 내렸다.
“화염계 광역스킬 준비.”
“화염계 광역스킬 준비!”
이벨린의 지시는 순식간에 팀의 리더들에게 전달됐고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유세현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발사.”
쿠구구!
화살처럼 날아간 화염계 광역 스킬이 일대를 휩쓸었다.
* * *
들어가야 되는가 아니면 말아야 하는가.
현재 아가레스는 이를 두고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탑에 진입할시 외부와 연락이 끊겨 버릴 위험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었는데, 만약 진입하여 연락이 두절되면 완전히 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다르지만, 나머지 세 종족의 수장도 아가레스처럼 탑 진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카그네프에게서 잘못된 정보를 받은 크라베스는 이강호가 미래를 볼 수 있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카그네프는 이강호가 회귀자라는 걸 알기에, 카시우스는 여태까지의 일행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음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아가레스와 달리 세 세력이 답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들어간다.’
그들은 최상위 대리자, 웬만한 던전은 찜 쪄 먹을 수 있는 존재였다.
리스크가 인간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하지는 않을 것이었고, 인간측은 파편 조각을 지닌 종족 중 쉽게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었다.
‘이 탑의 존재 유무를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좀 찜찜하긴 하지만...’
추정 둘레만 1km 넘어가고 탑 꼭대기가 구름을 관통하여 높이를 알 수 없는 이 탑은, 여태까지 그들이 본 탑 중에 역대 최고로 거대한 탑이었다.
“그럼, 다시는 보지 말자고.”
“내가 할 소리다.”
이윽고 흩어진 세 세력은 탑의 입구가 어느 한군데에 고정되어있지 않고 둘레 전체에 즐비해 있다는 걸 이용해 마족에게 들키지 않고 입구를 통과했다.
서로 다른 장소로 진입한 그들이 마침내 탑 내부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캬아아악!]
“?!”
지옥이 그들을 성대히 맞이했다.
* * *
절멸의 탑은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해가며 길을 찾는 것으로 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던전과는 그 차이가 무척이나 컸다.
마치 제6 유적의 생과사의 경계가 사라졌었던 공간처럼.
이 탑은 특정 아이템을 찾아 소유하고, 더 나아가 조건까지 클리어해야만 오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본디 조건과 아이템을 수집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었지만... 이강호는 이 절멸의 탑을 클리어 해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보상을 손에 넣은 존재였다.
쿠구궁!
콰과과과!
갑작스러운 열팽창에 의해 흘러내린 눈이 파도가 되어 몬스터 대군을 휩쓸었다. 이로 인해 몬스터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는 없었으나 발을 묶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동!”
유세현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현재 유세현의 역할은 계속 산사태를 일으켜 몬스터들의 체력을 빼앗고 대열에서 낙오시키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전투는 현재로선 할 예정이 없었다.
몬스터들의 평균 수준은 SS랭크, 정면으로 맞붙었다간 대리자들이 몇이 죽어나갈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과거 이곳에 인간이 진입했을 때는 대다수가 SSS랭크였기에 힘이 일부 봉인당해도 밀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봉인당하지 않았음에도 까딱하는 순간 전멸이었다.
그렇게 유세현과 김주희의 부대가 시간과 시선을 끄는 사이, 무림인이 포함되어있는 이강호의 부대가 조건을 클리어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1층의 클리어 조건은 몬스터 군단이 나타난 지평선 너머에 보관되어있는 빙옥을 얻는 것이었다.
“마력이 다 떨어졌습니다!”
“퇴각!”
물론, 이 일을 하루 만에 끝내는 건 불가능했다. 빙옥 주위에는 그걸 지키는 수호자가 있었고, 무수히 많은 트랩이 깔려있었기에 해제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생존자들은 약간의 휴식만 취할 수 있었을 뿐 취침 같은 건 감히 할 수 없었다.
정신을 놓는 순간 산등성이 아래에서 날아온 스킬에 당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잔뜩 충혈 된 눈을 더욱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들의 전투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굉장히 고달픈 일이었지만 살기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
슈욱-
퍽!
이윽고 수마에 의해 한순간 넋을 놓고 있던 대리자 한 명이 날아온 얼음창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꿰뚫려 즉사했다.
“이런...”
유세현이 이끄는 부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정신 차려라!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으으...”
퍽!
“커헉!”
다그쳤음에도 한 번 발생한 피해는 멈추지 않고 잇따라 이어졌다.
20명의 대리자가 사망했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움직여라! 경계를 늦추지 말고 발을 멈추지 마!”
사람들의 정신력은 이강호의 예상보다도 나약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생각한 유세현은 곧장 천마혈사장을 날려 일순간 공세를 멎게 만들었다.
“뛰어라!”
콰과광!
견제와 도주가 계속 이어졌다. 피해인원이 도합 40명을 초과한 순간이었다.
[빙옥이 해방되었습니다. 몬스터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던 냉기가 사라집니다.]
알림창이 눈앞에 나타남과 동시에 몬스터들의 육체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강호가 계획대로 1층을 공략한 것이다.
“지금이다 공격해라!”
“으아아아아!”
리더들이 지시하자, 대리자들이 울분을 터트리듯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허억... 허억...”
사람들은 몬스터를 처리하기 무섭게 제자리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구역질을 내뱉는 이도 있었고, 심한 이는 토까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벨린과 아린, 레피아 등등 유세현의 동료들도 제자리에 쓰러져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싸움이었다.
급격하게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6명을 제외하곤 전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터였다.
“한 시간 쉬고 이동한다.”
“...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이강호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날 며칠을 잠도 자지 못하고 투쟁했는데 고작 한 시간 쉬고 이동이라니?
그러자 이강호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1시간 후면 길이 닫힌다. 그렇게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 되지.”
“......”
“물론, 코인은 나오지 않는다. 클리어 한 건 클리어 한 거니까.”
“...뜨아...”
레피아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앓아누웠다. 이태광만은 아직도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중상을 입은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도 훨씬 많이 움직였기에 몸 상태는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유세현이 이강호를 향해 말했다.
“야, 이거 괜찮겠냐? 전부 다 심각한데.”
“어쩔 수 없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으니까.”
이강호와 유세현은 마왕군뿐만 아니라 델바람과 엘프, 블러드소울 또한 들러붙은 것을 알고 있었다.
“놈들도 결국엔 탑에 들어 왔을 거야. 4층까지는 독립된 공간이라 만나지 않겠지만... 5층부터는...”
만나게 된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 층에 머무르고 있는 인원 전부를.
절멸의 탑(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