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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툭.
생각에 잠긴 아가레스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책상을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급작스럽게 발생한 적의 공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무사히 막아낸 그였지만 잔뜩 경직된 표정에서는 아가레스가 현 상황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방금 전 그 일격을 날린 자... 분명 외관은 루시펠이 틀림없었다.’
맹약에 의해 제6 유적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이래로 아가레스는 내부 정보를 얻지 못했기에 그는 루시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진짜인가... 아니면 우리의 동요를 이끌어내기 위한 가까인가...’
물론, 아가레스가 지금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건 순수하게 루시펠이 진짜일지 아닐지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방금 전 그녀가 보여준 막강한 스킬.
그건 보통의 인물이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을 지니고, 더 나아가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지만 구사할 수 있는 고난도의 스킬이었다.
이것에서 아가레스는 유세현과 놈들의 동료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등골을 섬뜩하게 만들기에는 너무도 충분했다.
‘대체 유적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떻게 루시펠이 어둠의 마력을... 설마 서큐버스퀸이 환각으로? 아니다... 이 거리에서 우리가 환각에 걸렸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어설픈 외형변경도 아니고...’
아가레스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드래곤이 즐겨 사용하는 폴리모프가 떠올랐다.
그 마법이라면 접근하여 조사해보지 않는 한 알아차리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서큐버스 퀸이라고 해도 9서클 마법인 폴리모프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이에 아가레스는 루시펠이 진짜라는 가정 하에 생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 저 천사가 진짜 루시펠이라면 지원군이 왔다 한들 지금 유세현 측을 덮치는 건 자살하기 위해 달려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판단을 내린 아가레스가 이내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저놈들이 이 정도로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을...”
뱀프리안이 입을 딱딱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처음 보였던 자신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어진 모습이었다.
아가레스가 대차게 혀를 찼다.
“흥! 이제와 겁먹은 건가? 뱀프리안?”
“...무, 무슨 소리! 그냥 좀 놀란 것뿐이다!”
“크크, 그래? 그럼 잡아오라면 잡아올 수 있겠나?”
“......”
“표정 풀어라. 농담이니. 그보다도 지금 바로 분단되어 있는 인간 진형을 친다.”
“지금 바로?”
“그래, 놈들은 우리를 스킬로 공격해 존재를 알림으로써 마치 마족이 침공한 것처럼 일을 꾸몄다. 만약 지금 포획하지 못한다면 오랜 시간동안 기회를 엿봐야 될 거야.”
“제르오펜이 실세를 쥐고 있는 아르카드 제국의 황제를 구워삶았음에도 말이냐?”
“물론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황제는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커. 살아남게 되더라도 영향력을 많이 잃게 되겠지.”
“......”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이 없는 지금을 노린다. 병력을 정렬시켜! 바로 출격한다!”
아가레스가 명령을 하달하기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이 산등성이 아래를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 * *
“역시 그렇게 나왔군.”
사람들을 박살내고 있던 유세현의 고개가 일순간 산맥 위로 홱 돌아갔다.
마족이 머무르고 있던 장소로, 놈들이 이동을 개시한 걸 파악한 것이다.
‘김주희, 루시아, 아퀼라... 잘 해줄 거라 믿는다.’
유세현은 다시 본분으로 돌아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때려 눕혀가며 조악하게 지어져 있는 황궁으로 향했다.
마족도 움직인 데다 사람들에게 많은 공포심을 일깨워 주었으니 이제 남은건 대미를 장식하는 일뿐이었다.
악역이 있다면 이와 반대인 선역, 주인공도 있는 법이니까.
유세현은 이강호를 발견하기 무섭게 땅을 기고 있는 한 남성에게 접근했다.
황제를 노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황실로 향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타겟은 황제가 되었건 누가 되었건 간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유세현이 다가가자 남성은 죽음을 직감했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덜덜 떨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 아...”
그리고 그런 남성을 살짝 떨어진 장소에서 한 여성이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봤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안주를 원한 사람들 대부분이 죽음에서 멀어지기 위해 이 길을 택한 것이었으니까.
‘연인이겠지.’
유세현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 이 남성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상황이 극에 달하면 극에 달할 수로 신파는 커지는 법, 이들은 이강호가 다시 영웅으로 우뚝 서기 위한 주춧돌이었다.
“하찮은 것들... 죽어라!”
유세현은 메소드 연기를 펼치며 검을 내질렀다.
“안돼!”
여성의 입에서 진부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가 뭐래도 영웅이 등장하기 딱 좋은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 * *
쿠구구궁!
이강호의 등장은 더 없이 화려했다.
그만이 지니고 있는 특색 있는 청염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고, 더 나아가 전신에서 불을 내뿜기까지 했다.
이에 유세현의 검을 막아낸 이강호에게 시선이 몰려드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뭐, 뭐지? 저 남자는?”
“마, 막아냈어! 저 악마 같은 검을!”
유세현의 검이 막힌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 파급력은 훨씬 크게 작용했다.
둘은 본격적으로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네놈... 내 검을 막다니... 정체가 뭐냐!!”
“흥! 네가 알 것 없다.”
더할 나위 없는 너무도 진부한 대사였지만, 생명을 구원받은 연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 작용하지 않았다.
‘누, 누구지?’
‘저 불꽃...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호기심과 기억력을 더욱 자극하여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내게 한다.
이내 한 남성이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기억났다! 이강호다! 이강호야! 그가 돌아왔다!”
“뭐? 이강호?”
이에 사람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을지 언정 그 이름을 모르진 않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종족을 섬멸하고, 인간세력을 이 정도까지 부흥시킨 영웅.
현재 그들의 머릿속에선 이강호가 숨겼던 진실 따윈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기억하고 있을지언정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지금 이강호는 다시 한번 영웅으로서 그들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다니... 각오는 돼 있겠지?”
“하하하! 운 좋게 검 한번 막았다고 가소롭구나! 인간주제에!”
파앙!
채재재쟁!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자, 충격파가 이리저리 퍼지며 파공성이 일었다.
일반 대리자들이 보기엔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초고속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미, 미친...”
“피, 피해라! 휘말린다!”
쾅!
콰과광!
검과 창이 부딪칠 때마다 천지가 뒤흔들렸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서로 목숨을 건 사투!
그러나 정작 싸우고 있는 둘은 별 대수롭지 않았다. 아니, 되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족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목표는... 김주희쪽.”
“그래? 이쪽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족 놈들 결단력이 있군. 더 빨리 끝내야겠는데? 한방에 몰아내는 척할 테니 루시펠씨 좀 불러줘.”
“오케이.”
이윽고 이강호가 유세현의 복부를 발로 뻥차자 유세현은 고통을 호소하는 척하며 루시펠을 불러들였다.
“귀르시아! 놈부터 처리한다! 이쪽으로 와라!”
“예! 군단장님!”
루시펠은 연기니 가명이니 모든 게 살짝 민망하기 그지없었지만 둘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한의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화륵!
쿠구구구!
이윽고 이강호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화염을 발산했다.
이강호는 남아서 뒤처리를 해야 해 어차피 따갈 수 없었기에 되도록 쇼맨쉽에 치중한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어떻게 인간 따위가!!”
이윽고 피아를 식별하는 주홍염을 뒤집어쓴 유세현과 루시펠이 자리를 이탈했다.
이강호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고, 죽을 뻔 했던 남성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많이 다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남성을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강호는 그런 그를 일으켜 부축하여 동료에게 이끌어주었다.
현재 이강호는 누가 봐도 생존자들의 안위까지 생각하는 올바른 영웅의 표본이었다.
* * *
“온다!”
아퀼라의 말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이 짜놨던 작전에 따라 골짜기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노리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아닌 무공.
그들은 팀을 나눠 시선을 분산시킴과 동시에 시야가 좋지 않은 지형으로 마족을 유도해 따돌릴 계획을 짰는데, 더 나아가 간간히 견제까지 하는 것으로 심기까지 건드렸다.
그렇게 시작된 쫓고 쫓기는 추격전.
“크으!!”
저 멀리서 날아온 스킬에 이동을 방해 받은 한 마족의 시선이 스킬의 주인을 향해 대번에 돌아갔다.
누가 다혈질 아니랄까봐 그 마족은 곧장 그 장소를 향해 방향을 틀려했지만...
“거기까지. 자리를 이탈하면 죽인다.”
“큭!”
군을 이끌고 있는 대장에게 제재를 당해 마족은 분해하면서도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아가레스가 재차 명시했다.
“딴 놈들은 노릴 필요 없다.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무림인들만 노려라.”
“예!”
“그리고 뱀프리안, 키메루스, 아크샤드, 루드퀄은 전투 준비를 해라. 따라잡으면 분명 막아서는 자가 나올 거다.”
“흥! 너는 안 싸우는 거냐?”
“나보다 강한 너희들이 당해낼 수 없다면 나는 있으나 마나 똑같을 거다. 그러니 애꿎은데 힘쓰지 않고 차라리 한 명이라도 더 포획하는데 힘쓰겠다.”
아가레스는 입씨름을 하지 않았다.
뱀프리안의 도발에 걸려들기에는 그는 팔이 잘린 이후 너무도 많은 수모를 겪은 마족이었다.
‘강해져 언젠가 다 찍어 눌러준다.’
대신에 그는 마음속으로 재차 다짐했다.
아가레스가 속도를 더 높이려는 찰나였다.
지이잉-
아가레스의 손등에 새겨진 각인이 미미한 진동을 흘렸다.
‘이건... 드라플라?’
과거 전령이었던 드라플라가 통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받으면 안 되겠군.’
아가레스는 드라플라가 순수한 의도로 신호를 보낸 게 아닐 거라 판단하고 일단은 무시했다.
만약 순수한 의도로 통신을 할 목적이었다면 연락이 왔어도 진즉 왔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쉬익-
이윽고 발에 마력을 모은 아가레스가 더더욱 가속하여 무림인들을 뒤따랐다.
그리고 그 뒤쫓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마족이 떨어져나갔다.
명령에 불복한 게 아니라, 어찌나 방해가 심한지 이쪽도 응수를 하지 않으면 뒤쫓는 게 불가능한 탓이었다.
그리고 무림인들이 아무리 경공술이 뛰어나다곤 하나, 압도적인 스텟에서 나오는 마족의 속도를 당해낼 순 없었다.
수많은 방해와 끝없는 이동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따라붙는데 성공한 아가레스가 눈을 번뜩 빛내자, 뒤를 훑은 제넥이 혀를 지그시 찼다.
“젠장... 김주희라고 했던가? 어떡할 거냐?! 이대로라면 따라잡힌다!”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시간을 벌겠어요.”
“뭐? 누구랑? 설마 너 혼자서?”
제넥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직 김주희의 본 힘을 보지 못했기에 발생한 현상이었는데, 김주희는 제넥의 입장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히 답했다.
“아퀼라와 루시아가 이끄는 부대가 이미 많이 마족들의 발을 붙잡아 줘서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요. 저 정도는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하겠다니...”
그러나 제넥이 말을 끝낼 틈도 없이 김주희가 몸을 돌림과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무너지는 땅(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