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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이강호가 레피아에게 다가섰다.
“욕볼 뻔했군, 레피아.”
“이, 이강호...”
레피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 되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들이 상대한 종족은 듣도 보도 못한 어설픈 이들이 아닌 바로 마족이었다.
아무리 약해도 평균 SS랭크 중급 이상의 스탯과 인간은 지니지 못한 특수능력을 저마다 하나씩 지니고 있는 놈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쉽게 목을 내어주다니?
“너희들...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해졌구나.”
그러나 이강호를 제외하고 죽은 마족의 아이템을태연하게 회수하고 있는 다른 이들을 흘겨본 레피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워하는 자신과 다르게 이게 그들에게 있어선 얼마나 평범한 일상인지를.
“일단 자리를 옮기지. 주위에 마족이 널려있는 상태여서야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좀 그러니.”
“...그러자. 아무튼 도와주러 와서 정말 고마워 이강호.”
“뭘, 우린 동료지 않나.”
“동료...”
‘동료’ 그 단어에 레피아의 표정이 한순간 씁쓸하게 변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강호는 그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역시 이 상황도 그렇고... 뭔가 있는 게 분명하군.’
자리를 옮기자, 레피아의 말이 시작되었다.
* * *
“불화의 시작은 한 대리자가 가져온 정보에서부터였어.”
“정보? 무슨 정보 말이지?”
“이강호... 네가 지금껏 우리에게 숨기고 있던 바로 그거 말이야.”
레피아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모르겠냐는 그런 말투였는데 당연히 이강호는 바로 이해했다.
‘승리자가 종족 전체가 아닌 단 한 명뿐이란 걸 알아냈나 보군.’
이강호가 순순히 인정하자, 레피아가 그럼 그렇지 하며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뭐, 아무튼 이제와 굳이 그걸 따질 생각은 없어. 왜 숨겼는지 이해는 가니까.”
“......”
“아무쪼록 그 정보로 인해 어차피 가망이 없다 판단한 많은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보다도 안주하는 걸 선택하게 됐어. 이전처럼 버티기로 한거지.”
“제국이나 대형 길드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
이강호도 이리될 건 짐작하고 있었다.
아주 처절한 상황이라면 한데 뭉쳐 어떻게든 바득바득 강해지려 하는 게 사람이라는 생명체였지만, 그보다 쉬운 길이 있으면, 게다가 자신은 최종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내심 체감하게 된다면 태세를 순식간에 전환하여 방향을 꺾는 것도 사람이었다.
아니, 이건 사실 생명체 대부분이 그러리라.
그렇기에 이강호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그리고 길드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을 묵었었다.
일개 생존자들과 달리 집단을 이끄는 집단의 우두머리 대다수는 승리자를 목표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길드원이나 제국군이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면?
압박을 가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맞아.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어도 네 플랜대로 많은 이들이 계속 성장을 해갔어. 천족들이 공격을 감행해왔지만 화산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었지. 문제가 발생한건 너희들이 약속했던 기간 내에 돌아오지 않은 그 이후야.”
“......”
“너희들이 제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우린 네가 짜놨던 계획대로 언더월드로 이동을 시작했어. 네가 비록 정보를 고의적으로 감췄다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데다가 네 덕분에 무사히 성장이 가능했으니 일단은 마땅한 계획도 없겠다 따라보기로 한 거지.”
“흠... 이동을 했다고?”
이강호가 의문어린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일단 그의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70% 이상 성공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동 도중... 죽었어. 아르카드 제국의 황제, 투란다스 론 아르카드가.”
“?!”
투란다스 론 아르카드.
곤충조차도 대리자라는 이름 아래 더없이 강력해지는 이 세계에서 전투력이 거의 전무한 배불뚝이 황제.
이강호가 이 전투력 없는 황제의 지배를 방관한 이유, 아니 더 나아가 보호까지 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르카드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작용하는 무시 못 할 그의 영향력.
그는 약한 만큼이나 정말 움직이기 쉬웠던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재수 없게 몬스터에게 당한건가? 그래도 코인은 제법 먹어뒀을 텐데?”
“그렇지. 그는 암살당했어.”
“...뭐라고?”
이강호의 인상이 구겨졌다.
암살이라니?
‘그런 놈들은 진즉에 제거해 뒀는데?’
“범인은? 조사를 해봤을 텐데 혹시 알아냈나?”
“증거는 딱히 없어. 강력한 화염에 의해 불태워졌으니까. 하지만 난 단언할 수 있어. 투란다스를 죽인 자는 그의 아들, 베르네브 론 아르카드야.”
“...베르네브......”
그는 제1 황태자로 회귀 전에는 진즉에 사망한 인물이었다.
“놈은 곧바로 즉위 했고, 너의 계획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어.”
“......”
이강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베르네브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놈은 딱 봐도 너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투란다스와 달리 실질적인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네 뜻에 따라서 일이 잘 풀리면 그게 불가능해지잖아?”
“...나머지 대형 길드는? 그들도 제국을 따라나섰나?”
“아니, 그들은 너의 계획을 따랐어.”
진중하게 말하는 레피아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어째서...”
“놈들 때문이지. 너도 봤던 놈들이야.”
“마족...”
“맞아. 마족의 습격이 이어졌어.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강해졌다곤 해도 스텟의 한계 때문에 놈들의 상대가 될 순 없었지.”
“무림인들은?”
“그들도 일단은 네 뜻에 따랐지만 대항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어. 처음 놈들의 습격은 상승무공을 사용해 막아냈지만, 추가적으로 엄청난 강자들이 나타나면서 형세가 순식간에 역전됐지.”
“강자?”
“외관은 이래.”
레피아가 수정구를 보여주었다. 정보를 다루던 그녀답게 기록을 해둔 것이다.
수정구에서 영상이 재생되자 이강호의 표정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놈들은...”
“아는 놈들이야?”
수정구에 비친 마족은 단 둘이었는데 한 놈은 키메라처럼 무수히 많은 실로 덕지덕지 꿰매져 붙어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놈은 그것과 대조되게 망토를 둘러쓰고 귀공자의 행세를 하는 놈이었다.
이강호의 입에서 곧장 놈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키메루스 그리고 뱀프리안...”
둘은 마왕군 서열 200위 안에 들어가는 최상위 마족이었다.
‘이거 이러니 당해내려야 당해낼 수가 없었겠군.’
이강호가 마음속으로 수긍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어떤 의문이 들었다.
‘왜 습격해 온 거지? 언더월드의 일은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아니 만약 알려졌다면 저 둘이 아니라 마왕이 직접 나섰어야 정상이었다.
‘왜지? 대체 왜...’
그러한 의문을 해소 시켜준 건 이어진 레피아 말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놈들이 왜 습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잠입해 보고서야 알게 됐지.”
“거길 잠입 했다고?”
“응, 놈들은 우리를 죽이지 않고 구태여 귀찮게 포획해서 데려갔으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말이지.”
“......”
그 말에 이강호가 입이 일순간 닫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말하고 있었지만 잡히면 반드시 처참하게 죽을 거라는 걸 알고도 잠입한 그 대담한은 결코 아무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레피아답달까.’
그리고 그래서일까?
이강호는 문득 그녀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정보를 캐내러 간 뒤 돌아오지 못한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이.
“놈들은 우리가 지닌 무공을 노리고 접근한거였어.”
“무공을?”
“응. 근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너희가 떠난 이후로 우리가 마족과 접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당최 어떻게 무공에 대해 알게 된 건지...”
“......”
일행의 말문이 일순간 막혔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고리,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우리 때문인가?’
벨제뷔트의 군대가 아니라 마왕군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가능성은 낮다 점 칠 수도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키메루스나 뱀프리안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무공의 능력이 입증되었다는 것인데 일반 무공을 배운 평범한 대리자들은 무공을 배웠건 배우지 않았건 순식간에 찢어 발겨졌을 것이기에 무공의 위력을 마족에게 체감시켜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교나, 무림인, 그리고 레피아 정도 되는 특별한 자들만이 그들에게 약간이나마 의구심을 품게 만들 수 있는 것.
‘어쩌면 자취를 감췄던 마교 때문일 수도 있지만...’
“후... 아무튼 놈들의 습격으로 생존자들은 혼비백산, 대다수의 대형 길드는 진지에서 이탈해버렸어.”
“전부 뿔뿔이 흩어진 건가?”
“응, 완전히는 아니지만 지금 네 뜻에 맞춰 움직이고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아.”
“있긴 있다는 거네.”
“응,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였으니까. 마족의 습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해했다. 동료들과 유적으로 향하던 도중 마족과 조우했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네가 미끼를 자처했나보군.”
이강호가 핵심을 말하자, 레피아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많이 힘든 선택이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다.”
“......”
내색하진 않으려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꼬여버렸다.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그렇겠지. 아무튼 고마워. 구해줘서.”
그러나 레피아는 다른 이들과 달리 감정을 끝까지 내비치지 않고 삼켰다.
“이젠 대충 알겠지? 움직이자. 은신처로 가면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을 거야.”
* * *
은신처로 가는 길은 험하지 않았다. 여타 종족과 몇 번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족조차도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이종족들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나온 코인은 레피아, 검은꽃들 너희들이 전부 흡수해.”
“뭐?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우리는 이제 이 정도 순도의 코인으로는 스탯이 거의 증가하지 않아.”
“그럼 염치불구하고...”
그렇게 도착한 은신처.
바위에 감춰져 있는 거대한 동굴의 안에는 무려 3천이라는 병력이 숨죽인 채 숨어있었다.
행여나 재수 없게 발각되는 것을 고려했는지 문지기가 없었기에 자칫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꼼짝없이 치명타를 입을 터였지만, 그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저벅. 저벅.
스킬로 빛을 만든 레피아가 걸어 나가자, 얼굴을 확인한 대리자들의 입에서 안도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레피아씨인가.”
무림인을 포함해 무려 3천이나 되는 인원이었지만, 이곳의 대리자들은 위기 때문인지 사람 한 명 한 명, 얼굴뿐만 아니라 이름까지도 전부 외우고 있었다.
이강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곳을 용케 찾았군. 내가 준 정보에 이런 장소는 없었을 텐데.”
“운이 좋았지. 그보다도 저길 봐.”
레피아가 손을 뻗자 그곳에는 뛰어오고 있는 인원들이 있었다.
남궁시영, 이태광 그리고 유혜인을 포함한 인연을 맺었었던 여러 사람들이었다.
“어, 언니! 무사했구나!”
제일먼저 한 걸음에 달려온 유혜인이 그대로 레피아에게 와락 안겼다.
레피아는 유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그럼, 내가 누군데.”
“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번쩍 든 유혜인이 다급히 주위를 훑었다.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나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어... 어?”
유혜인을 포함하여 다가온 사람들의 턱이 떡 벌어졌다.
이용석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아니 마족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너는... 유, 유유유유세현!”
“정말 오랜만이네요. 과대님.”
유세현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이용석이 자신의 뺨을 툭툭 쳤다.
“이거 진짜야? 정말로?”
어지간히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면 이태광은 유세현을 꽉 끌어 안아주었다.
“하하하, 역시 세현 동생! 살아 돌아왔군!”
“예. 살아 돌아왔습니다만... 숨이 막히는군요.”
“하하하! 어이쿠 미안! 미안! 내가 대기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선수를 쳐버렸군!”
이태광이 살짝 뒤로 물러나자 유혜인이 유세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오빠...”
“혜인아.”
“바보! 왜 이렇게 늦었어!”
빡-
그러나 모두가 바라고 있던 훈훈한 모습과는 반대로 유세현의 정강이를 후려 깐 유혜인은 그대로 휙 뒤돌아서 자리에서 도망쳤다.
“어휴, 저 성격...”
유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남매끼리 울고불고하는 건 유세현이나 유혜인, 둘 성격에 맞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되려 살짝 당황해했을 것이다.
이태광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쫓아가 봐. 그래도 몇 년 만에 만난 거 아닌가. 안 쫓아가면 아마 다음번엔 검이 날아올지도 몰라.”
“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이윽고 유세현이 유혜인을 뒤따라 뛰어가기 시작하자, 모두가 그 모습을 웃음 띤 얼굴로 한동안 지켜봤다.
신창 제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