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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종족들이 존재하는 만큼, 무수히 많은 군세들이 여기저기 주둔해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커다란 집단의 움직임은 주위 흐름을 움켜쥐고 있는 경우가 크기에 동향을 살필 수만 있다면 대략적으로나마 정세를 읽는 게 가능했다.
던전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머무르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는 건지.
물론 언더월드는 이전 신물 파편이 잠들어있던 배경이었던 만큼, 이곳에 존재하는 대다수들의 목표는 성장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위험한 장소를 굳이 거닐 이유가 없었다.
그 덕에 유세현 일행은 집단들이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좀 더 수월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던전 탐사나 몬스터 사냥을 하는 이들은 행동양식이 체계화 되어있었기에, 딱히 의심할 거리가 없는 이상 넘어갔다.
그들이 찾고 있는 집단은 특이행동을 하는 집단이었다.
유적이 클리어 되어 버린 이상, 언더월드에서는 사실상 특이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다른 곳이라면 압도적인 스텟의 차이로 타종족 사냥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이곳을 여행하는 대리자들은 하나같이 강할 터이기에 그런 짓은 좀처럼, 아니 거의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달.
마침내 유세현의 감시망에 왠지 모를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들이 잡혔다.
‘이놈들은...’
엄청난 대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천이 넘는 세력이었는데, 감시망은 마력의 흐름을 읽음으로써 가능한 것이었기에 그는 세력의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족?’
그렇다. 평범한 마력이라면 구별하지 못했을 터이지만, 놈들은 신성력과 더불어 가장 특색 있는 마력 중 하나인 어둠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마족이었다.
‘마족이 왜... 설마 벨제뷔트가 우리를 뒤쫓아 추격해 온 건가?’
강자들은 내공심법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 숨길 줄 알았다. 벨제뷔트 정도 되는 자들은 거의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고.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던 유세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벨제뷔트 일리가 없다.’
일행은 완벽히 추격자들을 떨어뜨렸었다.
루시아의 기억을 읽어 일행의 우선순위를 파악하게 된 카그네프가 이끄는 델바람이라면 몰라도, 벨제뷔트가 이렇게 빨리 그들의 행선지를 뒤따라 올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혹시라도 일행의 추격을 시작한 카그네프의 뒤를 밟았다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그네프는 바보가 아니다.
회귀자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을 그가 대놓고 목적을 보여줄 리가 만무했다.
유세현이 동료들에게 말하자, 이강호를 비롯하여 다른 이들도 유세현과 같은 견해를 보였다.
이강호가 말했다.
“흠... 그렇다면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벨제뷔트와 마왕이 이끄는 군세를 제외하고 지금 마족을 이끌고 있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을 테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닌가보네요 선배?”
“당연하지. 아무리 통합이 잘되었다고 한들 걔들도 결국엔 생명체니까.”
“하긴... 그렇겠네요.”
“그보다도 문제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놈들이 마왕군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마왕군이요? 벨제뷔트나 마왕 둘 다 아닌 쪽일 수도...”
“아니, 그럴 확률은 엄청 적어.”
이유가 있었다.
“유세현, 놈들이 넓게 퍼져 마구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지?”
“응.”
“아...”
거기까지만 말했음에도 바로 이해한 김주희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다.
이 언더월드는 하나같이 강자들이 몰려든다.
정말 최상위의 대리자가 아닌 바에야 아무리 1천의 마족이라 해도 자칫 훨씬 더한 숫자에 밀려 순식간에 압살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언더월드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
그건 놈들이 하나 같이 최정상에 속하는 대리자이거나 혹은 엄청난 강자가 함께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정상 대리자라면 무조건 마왕군일 것이고, 엄청난 강자가 함께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마왕군일 확률이 높았다.
“수상하네요... 굉장히.”
“수상하지.”
이윽고 유세현이 나무위로 도약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 * *
“하악... 하악... 하악...”
우거진 숲속에서는 5명의 여성이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질주하고 있었다.
여성의 눈빛은 다급함과 절박함에 가득 차 흔들이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어, 언니! 따라잡히겠어! 너무 빨라!”
“조금만 더 힘을 내! 할 수 있어! 이 앞은 계곡이야! 잘만 이용한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중에서도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여성은 절망의 차 있는 모두에게 힘을 불어넣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봐도 무리야 언니... 저놈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추격해왔던 놈들보다도 훨씬 빨라.”
그러나 그런 여성의 필사적인 말에도 나머지 인원의 눈동자에 깃든 절망은 도통 사라지지 않았다.
“언니... 우린 여기까진가 봐. 언니만이라도 도망쳐. 언니의 잠영술이라면 언니만은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웃기지 마! 맹세한거 잊었어?”
명백히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버럭 소리쳤다.
“우리 흑접사는 죽을 때까지 함께야!”
“......”
그 말에 나머지 4명의 눈동자가 일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건 정말 잠시 뿐이었고, 이내 다섯 중 최후미에 있던 한 명이 서글픈 목소리를 내뱉었다.
“언니... 또 두 명이 죽었어.”
“......”
“언니도 사실은 잘 알고 있잖아? 그런 맹세는 이 세계에선 지켜질 수 없다는 거.”
이에 이들을 이끌고 있던 흑접사의 리더, 레피아 레벤의 입가가 잔잔히 떨리기 시작했다.
‘살 수 있다.’‘벗어날 수 있다.’ 라고 말을 내뱉으며 동생들을 달래던 그녀조차도 사실은 느끼고 있던 것이다.
전부가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만큼 전력의 차는 명백했다.
추격자들은 스무 명인데 반해 이쪽은 다섯.
게다가 스텟의 차도 어마어마했고, 이쪽은 쫓기게 된 이래로 추격자들과 달리 제대로 쉬지도 못해 체력과 마력도 거의 고갈되어 있었다.
신법으로 그 차를 메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것.
“언니... 언니가 미끼를 자처했을 때 언니를 따른 건 우리의 뜻이었어.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언니.”
“맞아. 차라리 살아남아서 우리의 복수를 해줘. 그게 우리가 바라는...”
그 순간 옆에 서 툭 튀어나온 추격자 한 놈이 레피아를 막아섰다.
“큭!”
마침내 따라잡힌 것이다.
“하하하! 드디어 따라 잡았다 이 미꾸라지 같은 년.”
거기에 더해 다른 추격자들이 도착하자 레피아와 검은 꽃들은 순식간에 포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레피아가 곧장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추격자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크크, 마력도 다한 게 뭘 하려고? 설마 순수 육탄전으로 감히 인간주제에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순순히 잡혀라. 그럼 당장은 너희들의 몸에 손을 대지 않겠다.”
“...웃기지 마...”
레피아가 잡아먹을 듯이 으르릉 거렸다.
그녀는 한 번의 잠입으로 놈들에게 잡힌 이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효용 가치가 사라진 남자는 사지가 찢겨 먹잇감이 되었고, 여자는 장난감처럼 능욕당하다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는 살해됐다.
그녀의 입장에서 잡힐 바에는 차라리 깔끔하게 그 자리에서 죽는 편이 나았다.
“그래? 그렇다면야 뭐...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히죽 웃은 마족이 레피아에게 달려들었다.
레피아와 검은꽃들이 진원진기를 끌어올려 전투에 임했지만 상대가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언니! 제발 언니만이라도!”
“큭!”
레피아가 뒤늦게 잠영술을 사용했지만, 이미 이정도의 접근을 허용한 상태에서 악마는 레피아의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어딜!”
악마가 레피아가 사라진 그림자 속으로 손을 푹 집어넣자, 목덜미를 붙잡힌 레피아가 곧바로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크크크, 감히 지금까지 귀찮게 했겠다?”
악마는 손바닥으로 레피아의 뺨을 툭툭 때렸다.
살짝 친 것임에도 어마어마한 마력이 담겨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라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악마는 레피아가 발악한 것에 속이 안 풀리는지 난데없이 갑주를 벗고 자신의 하반신을 드러냈다.
“으... 으...”
누가 봐도 능욕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야, 아쿠두스. 저년은 중요 인물로 꼽히는 년 중에 한명이야. 지금 손대면 니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데 진짜로 하려고?”
“뭐, 어때?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포획에 성공한 마당에 아가레스님께서 이 정도도 봐주지 않으실 거 같아?”
“흠... 아, 모르겠다. 네가 말려서 될 놈도 아니고.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니 맘대로 해. 대신 우린 상관없는 거다.”
“흐흐, 알고 있어.”
거대한 양팔로 레피아의 팔과 몸까지 같이 붙잡은 아쿠두스가 음흉한 미소를 드러냈다.
“크으으! 으으!”
레피아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 언니! 언... 흡!”
“시끄럽다. 좀 다물고 있어.”
검은꽃을 제압한 악마들이 웃으며 아쿠두스의 행동을 지켜봤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가학과 폭력을 좋아하는 그들은 아쿠두스의 행동을 내심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크흐흐, 다른 인간들은 꿰뚫리는 순간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던데 쟤는 어떨지 궁금하네. 견딜까? 못 견딜까?”
“내기 할래?”
몇몇은 내기까지 하려하고 있었다.
“자 그럼 견뎌보라고~”
어느새 레피아를 강제 탈의 시킨 아쿠두스가 마지막 행동에 접어드려는 순간이었다.
후웅!
쉬익-
하늘위에서 아쿠두스의 곁으로 무엇인가가 뚝 떨어졌다.
* * *
“어?”
아쿠두스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회전했다. 그의 망막에는 다급히 움직이려던 자신의 몸과 갑자기 등장한 한 남성이 비치고 있었다.
아쿠두스는 머리가 지면에 닿고 나서야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깨달았는지 세상에서 제일 황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내가 반응해보지도 못 하...”
“말 돼.”
콰직-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남성의 발길질에 막혔다.
아쿠두스는 뇌수를 흩뿌리며 그대로 절명했다.
“괜찮아요? 레피아?”
남성이 묻자, 그 남성의 얼굴을 확인한 레피아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너, 너는...”
“일단은 전부 정리하고 얘기하죠.”
유세현의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아쿠두스와 똑같이 다른 마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강자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인간 측에서 이 정도로 강한 인물을 본 적이 없던 것도 이유였긴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실력의 차이가 너무도 명확한 탓이었다.
압살.
“말도 안 된다. 말도 안돼... 어떻게 고작 인간 따위가 이런 힘을 발휘...”
서걱-
그들은 선혈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안되겠다 생각한 몇몇이 남은 여자들을 인질로 사용하려 했으나, 이미 검은꽃들을 붙잡고 있던 악마들은 목이 전부 떨어져 나간 후인지라 소용이 없었다.
마족들은 고작 1분도 지나지 않아 전부 정리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세력 붕괴(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