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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이템명: 르벤 하트루프의 일지
등급: 에픽 [SS Rank]
상세정보: 르벤 하트루프가 직접 저술한 일지입니다. 크람베르의 개발과정과 일상생활 등 스스로의 육체를 영혼화 시키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지!
유세현은 일지를 줍고 주위를 더 살펴보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고는 기기의 버튼을 눌러 페이지를 슬쩍 넘겨봤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혀 있어 본래라면 읽지 못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아이템이라 무슨 뜻인지 파악이 된다.
저술되어있는 첫 문구는 정말 뜬금없는 말인, [실패했다]였다.
‘실패? 크람베르의 제작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유세현은 아무생각 없이 다음 글귀를 읽었다.
[영생을 얻기 위한 불멸 프로젝트.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드는 그 실험은 애초에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이었다.]
“......”
정말 몇 자 보지 않았음에도 설마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라벤은 세계의 균열이 난데없이 발생했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원인 없는 결과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실험의 폭주로 균열이 발생하고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상부에 뭐라고 보고해야하지? 아니, 이건 보고를 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는가?]
태블릿을 읽어 내려가는 유세현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대다수의 내용은 무너져가는 사회와, 붕괴의 여파로 인해 변질되어가는 환경에 대한 그의 불안이 담긴 정서를 담아놓은 것들이었다.
한 페이지를 모두 읽은 유세현은 혀를 찼다.
좌불안석이라 그런지 내용이 이랬다 저랬다 중구난방으로 붕 떠있다.
이래서는 걸리는 부분을 찾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리리라.
‘안되겠군. 분량이 너무 많아.’
유세현은 일단 태블릿을 포켓에 넣었다.
이 장소로 돌아온 이후로 시간이 10분 가량이나 흘렀다. 추후 엘프, 델바람과 다시 조우하게 되어 그들의 눈을 피해 읽어야 되는 상황이 닥친다 하더라도 챙길 것을 챙긴 이제는 동료를 찾아 나서는 것이 우선이다.
‘무사해야 할 텐데.’
마력의 흐름을 읽어봐도 여전히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일단은 다른 장소를 뒤져봐야겠군.’
그가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쉬이이-
천장의 공간이 꾸물꾸물 일그러지며 그곳에서 엘프들과 델바람이 뚝 떨어졌다.
* * *
“젠장... 꽤 애먹었군.”
카그네프의 첫마디였다. 유세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돌아온 동료를 맞았다.
“후우, 선배...”
김주희와 아퀼라는 지쳐 보이긴 했으나 무사했다. 어디 신체부위하나 잘린 곳이 없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이강호가 창을 쥔 채 유세현을 향해 다가왔다.
“이강호! 무사 했구나!”
“응.”
“그놈들... 전체를 칠 것처럼 굴더니 나한테만 7명 왔더라. 그보다 루시아씨는? 함께 있던 거 아니야? 나뉠 때 있었잖아.”
“응, 그랬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슬아슬하게 갈리는 바람에...”
“뭐?”
유세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놈들은 ‘격이 높은 영혼’을 연신 강조했었다. 그리고 그 격이 무엇인지 유세현은 알고 있었다.
‘특수특성.’
그러니 엘프와 델바람에 특수특성을 지닌 인원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놈들의 목표는 분명 자신포함 세 명일 것이다.
이강호, 유세현, 루시아.
“너한테는 몇 명 왔냐?”
“7명.”
“7명? 그럼 우리 둘 합쳐서 14명이군.”
추종자의 총 수는 28명이었다.
만약 그들이 세 명에게 분산했다고 가정했을 때, 루시아는 무려 14명을 감당해야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주희와 카시우스 카그네프 쪽에 물어보니 그쪽에는 추종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세현이나 이강호쪽에 높은 넘버의 추종자가 몰려있었다 하더라도 무려 14대 1, 거기에 루시아는 이강호나 유세현처럼 접근전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생각하기 싫은,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 되었던 결과가 나와 버렸다.
그녀는 또 납치되었다.
* * *
“찾았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마력을 감지하던 유세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마력은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특색이 있어 구분하기가 쉬웠는데, 각 구역의 경계가 무너진 덕에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남동쪽 20km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다.
“하지만 유세현, 우리가 지금 한걸음에 뛰어 간다고 한들 루시아씨는 구해낼 수 없어.”
“알고 있어.”
유세현은 동료를 끔찍이 여기지만 바보는 결코 아니다. 마력과 체력이 전부 고갈된 지금 가봤자 아마 놈들 좋은 일만 시키는 일이 되리라.
‘그런다고 엘프, 델바람과 함께 뒤쫓기엔 너무 느리다.’
대군은 그 특성상 소수보다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최정예로 팀을 짜면 충분히 추격은 가능할 테지만.
‘놈들이 순순히 응해줄 리가 없다.’
“......”
엘프와 델바람이 반복되고 있는 영상을 보고 있을 동안 일행은 머리를 골똘히 굴렸다.
허나, 역시 방책이 없는 건 없는 거였다.
불가능하단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오기나 의지 그 무엇으로도 안 되기에 불가능이란 단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냥 저를 버리세요.]
이전 유세현이 루시아를 구해 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다.
[대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꼭 승리해주세요.]
“......”
뇌리속에 루시아를 위해 희생했던 그녀의 아버지, 지드먼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생존을 위해 가족은 물론이고 인간성마저 내팽개치는 이 세상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로써 본분을 다하고 죽었다.
“후우... 일단 추적은 계속 할게.”
“...응, 그렇게 하도록 해.”
이강호는 그 말로 일단락을 냈다.
유세현은 전투적 능력과 냉정한 판단력, 굳은 심기 등등 전부 뛰어나고 대단하지만 동료애가 너무 강해 감정소모가 너무 심하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될 때는 포기해야 된다라고 물으면, 알겠다고는 답하지만 사실 그는 여태까지 소중한 이를 잃어본 적이 없다.
만약 처음부터 함께해온 김주희의 심장이 눈앞에서 적에게 뽑힌다면? 그의 여동생인 유혜인의 목이 적에게 잘려나가 땅을 뒹군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굳은 심기가 더 강할까? 아니면 감정의 치우침이 더 강할까?
“후우...”
영상을 관람하는 이강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카시우스와 카그네프, 이강호가 방향을 잡기 위해 회의에 들어갔다.
내용의 방향은 과학자들이 언급한 게 있는 만큼 자연스레 거대 구덩이 쪽으로 쏠렸다.
“흠, 마족과 천족이 진을 치고 있는 그곳인가.”
“그렇겠지. 안 그러면 괜히 그렇게 대치까지 해가며 진을 치고 있을 필요성이 없으니.”
“그렇다면 놈들도 우리가 수집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되겠군.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핵심에 다가서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분명한건 우리도 아직 늦지는 않았다는 거다.”
진행이 되면 될수록 향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천족과 마족이 아직 외부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철의 성을 발견해내지 못해냈으리란 걸 간접적으로 나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꼭 그곳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맞다면 큰 낭패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저번에 천문대에서 봤을 때 마족과 천족이 북쪽에 자릴 잡고 있었으니 우리는 일단 남쪽에서부터 접근하도록 하지. 동의하나?”
“좋아. 동의한다.”
“동의한다.”
연합은 체력과 마력 보충을 위해 근처에서 밤을 보낸 뒤 이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 *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유세현은 보는 눈이 한순간 없어진 틈을 타 동료에게 일지에 대해 털어놨다. 이강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호오, 그런 걸 주웠어?”
“응. 아마도 그 연구실에 최초로 들어온 자에게만 주는 보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좋아. 그럼 봐보자 김주희, 아퀼라 너희 둘은 지금부터 감시를 서줘. 내용은 나중에 말해 줄 테니.”
“알겠어요 선배.”
“알겠다.”
파앗-
김주희와 아퀼라가 순식간에 양쪽으로 갈라져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돌 위에 자리 잡았다.
둘은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라벤이 속해있던 세계가 붕괴된 이유, 대처하기 위한 발버둥.
속독으로 자잘한 것은 스킵해가며 읽어나가던 둘의 눈동자가 정지한 곳은 일지의 중간 부분, 한 남자가 소개되는 페이지였다.
[자칭 신의 사자라는 한 남자가 우리를 찾아왔다. 세계가 멸망해가는 와중에 신이라니 미친놈인가?]
한 순간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유세현이 그러했든 이강호 또한 영상에서 언급한 신의 사자라는 것이 줄곧 신경 쓰였던 것이다.
“크람베르에 치명적 오류가 발생한 시기네.”
“계속 읽어보자.”
둘은 신의 사자가 언급되는 부분만을 읽어나갔다.
[희대의 미친놈.]
[정신병자.]
처음 르벤 하트루프는 여느 평범한 과학자와 같이 그를 미친놈 취급하며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다.
허나, 라벤이 잠적하여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그는 마지못해 대화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놈이 말하기를 신은 우리를 보며 흥미로워 한다고 한다. 죽음을 피해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감명이 깊다나 뭐라나. 역시 미친놈인거 같다. 상대하지 말아야지.]
[자칭 신의 사자가 자신을 증명하겠다며 특수한 힘을 발휘했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처음 보는 신기한 힘이다. 어떻게 일개 생명체의 힘으로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가?]
[놈, 아니 신의 사자가 제안했다. 크람베르 시스템에 완전 귀속되어 파멸할 바에는 대리자들의 관문이 되어 기회를 얻지 않겠냐고. 관문? 그게 대체 뭐지?]
[캐물은 결과, 관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신의 사자는 말투가 무미건조해서 그렇지 생각보다 친절하다.]
대리자, 무미건조.
유세현과 이강호는 이 단어에서 어느 누군가가 떠올랐다.
‘...도우미?’
그들은 계속 읽어나갔다.
바로 아래 글귀에는 관문의 설명에 대한 게 적혀 있었다.
[크람베르 프로젝트의 실패로 이 세계는 파멸한다. 영혼들은 크람베르의 동력원이자 손과 발이 되어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해 나갈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멸망, 하지만 신의 사자의 말대로라면 어처구니없게도 크람베르가 존재함으로써 이 세상은 완전한 파멸이 아니라 한다.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셈이다. 생존하되 생존하지 못한 생명체, 그게 바로 우리다.]
[신의 사자는 향후 모든 생명체는 대리자가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자신임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한다. 크람베르에게 먹힌 영혼은 안타깝게도 자기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하니 신의 사자와 우리의 거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신에게 아무 의식 없는 우리의 영혼과 크람베르를 제공해 주는 대신, 신은 우리가 대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신의 사자의 도움아래 엄선하여 뽑은 영혼들을 두 개로 쪼개기로 했다.]
[이제부터 우리 영혼의 반은 크람베르에게 귀속될 것이며, 다른 반은 앞으로 봉인 될 크람베르를 살릴 추종자로 변모할 것이다.]
[만약 추종자가 영혼에 각인된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고 크람베르를 되살려 먹히면 우리는 완전히 파멸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중의 누군가가 기억을 되살려 크람베르를 먹는다면...]
“이, 이건...”
“그랬군. 그런 거였어.”
두 사람이 동시에 마지막 글귀를 읽었다.
[우린 부활하게 되리라.]
무저갱(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