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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새겨지는 알 수 없는 문자.
“후후. 이게 접속코드인가보군.”
“그런 거 같군.”
카그네프가 꽤나 만족한 표정으로 스스로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N3를 목표로 두던 그들이었기에 이는 확실히 괜찮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라벤 테이메르라... 혹시 지금 나온 이들에 대해 뭐 알고 있는 게 있나?”
“아니, 모른다. 둘 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유세현은 물음에 짧게 답했다.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크람베르에 대해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외에 부가적인 자잘한 것들은 그냥 던전을 클리어하고 정보를 손에 넣었다는 형태로 말을 해두었다.
추후 여러 정보가 모이고 모여 쌓였을 때, 그들이 일행보다도 먼저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눈치 챌지 모르기 때문이다.
“흠...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모른다면 할 수 없지.”
“그럼 이동하지.”
유세현이 몸을 돌리자, 엘프와 델바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이에 카그네프와 카시우스는 뒤를 따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일행의 등을 응시했다.
약간이나마 웃음기를 띠고 있던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
당연한 것이었다.
녀석들이 접근함으로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방향이 잡혔다. 거기에 그들은 이번일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그냥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뜻대로 움직여 준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앞으로도 그들이 주도하는 일에 되도록이면 따를 수밖에 없어진다.
저들이 호구가 아닌 바에야 추후 적이 될 이종족에게 순순히 모든 걸 퍼주진 않았을 터.
그러니 이건 눈치싸움이었다.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저들은 이쪽의 무력을, 이쪽은 저들의 정보를.
그리고 만약 핵심에 다다라 역전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일행과 엘프, 델바람들의 각기 서로 다른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 * *
“크...”
오르엠은 현재 무척이나 답답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루시펠을 찾는 것도 실패하고, 더 나아가 마족에게 압박까지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쥐새끼 같은 벨제뷔트 같으니...”
쉬이익-
꽉 쥔 그의 주먹으로부터 정형화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온다.
정면대결로 치자면 벨제뷔트는 결단코 오르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른 종족과의 전투도 그렇지만, 천족과 마족은 역상성 되는 그 힘의 특성상 힘의 차이가 나면 날수록 서로에게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호쾌하게 싸워준다면 벨제뷔트는 죽은 목숨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벨제뷔트가 무척이나 간교한자라 그런 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오르엠은 현재 벨제뷔트가 뭔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결코 좋지 않으리라.
오르엠은 일단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허나, 무력과 군세를 믿고 너무 깊숙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의 진형은 퇴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에는 마족.
뒤에는 망령.
북쪽인 우측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산맥이 즐비해있고, 좌측인 남쪽에는 지름 1km이상 되는 무저갱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다.
이쯤 되면 이곳으로 유도당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후우...”
오르엠은 일단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과거, 알테리아 대륙 신이었을 적의 그는 다방면에서 모든 것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고등한 존재였었다.
자애롭지만 냉철하고, 따듯하지만 차가운.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는 일도, 이성이 감정을 잡아먹는 일도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후인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현 시간부로 모든 리미터가 해제됩니다.]
오래전 들은 도우미의 말이 무심코 떠오른다.
휘이익-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천사부대가 떨어졌다. 대천사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이 각각 오르엠에게 보고했다.
“사대천사 미카엘, 보고를 올립니다.”
“그래. 어떻지?”
“산맥으로의 퇴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면 갈수록 마수들이 들끓고 있는데다가 환경이 열악합니다. 자칫 습격을 당하게 되는 날에는 피해가 극심할 것입니다.”
“흠... 라파엘, 망령 쪽은 어땠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동쪽을 먹어버린 놈들의 왕이 이젠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결과가 안 좋다.
오르엠이 가브리엘에게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그가 입을 열었다.
“내부 깊숙한 장소, B-10구역에서 마족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족들을?”
“예,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것이 뭔가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에 오르엠의 눈이 번뜩 빛났다.
가브리엘이 조사를 하고 있던 장소는 무저갱이었다.
길을 알아내가며 지금까지 탐색을 수도 없이 많이 하였는데, 계속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 놈들을 포착한 것이다.
오르엠은 마족이 점점 열악해지는 환경 속에서도 이탈하지 않고 이곳에 대거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뭔가 있으리라 처음부터 느끼고는 있었다.
문제는...
‘함정일 수도 있다.’
천족이 무저갱을 탐사할거란 것을 저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마족을 발견한 장소가 내부 깊숙하다하여 함부로 돌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파엘은 계속 망령 쪽을 주시하고, 미카엘은 지금부터 가브리엘 쪽으로 붙어 감시를 시작해라. 놈들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한 대천사들이 각자의 부대로 복귀했다.
* * *
“좀처럼 걸리질 않는군.”
“말했잖아요. 오르엠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고.”
벨제뷔트가 아쉬움을 토로하자, 루시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벨제뷔트는 콧방귀를 꼈다.
“흥, 누가 뭐라나? 나도 오르엠에 대해서 알만큼은 알고 있다. 그래서 네 생각엔 그가 절대 걸리지 않으리라 보나? 아닐 텐데?”
“......”
루시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 또한 오르엠이 함정에 빠지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벨제뷔트의 준비는 철저했다.
천천히 유인하고 시간을 공들여 천족을 가두고, 거기에 더 나아가 떡밥을 뿌린다.
벨제뷔트는 오르엠을 잡기위해 자기 세력뿐만 아닌 크라베스의 세력까지 이용하는 기책을 선보였다.
크라베스, 찬탈자의 종착역도 이 지역이 될 것임을 추종자들을 통해 알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화를 사용하고 있던 벨제뷔트가 힘을 거두며 손을 휘휘 털었다.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좀 더 해도 괜찮은데...”
“내가 힘들어서 그렇다. 나도 만약에 대비해 적당히 체력은 남겨놔야 되지 않겠나.”
“...그런 거라면......”
루시펠은 곧 언제나처럼 발걸음을 옮겨 벨제뷔트의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벨제뷔트는 그녀가 사라지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만치 않군.”
현재 그녀의 마력동화 상태는 30%.
데프하우어 때와 비교해도 느려도 무척 느린 속도다.
루시펠은 더 하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지금도 벨제뷔트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조바심 내지말자.’
60%만 넘기면 된다.
그때부턴 아무리 강대한 정신력을 지닌 생명체라도 주도권이 이쪽으로 넘어 오게 되어있었다.
벨제뷔트도 꽤나 정신력을 소비했기에 휴식을 취하려던 찰나였다.
“벨제뷔트.”
“뭐냐 렘벨크.”
“놈들을 발견했다.”
“놈들?”
벨제뷔트는 뭔 소린가 하다가 이내 렘벨크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놈들은 고대의 성전으로 향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 제사장들은 이제부터 행동에 나서려고한다.”
“뭐?”
벨제뷔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우겠다니?
“안 된다. 곧 오르엠이 함정에 걸릴 수도 있는...”
“미안하지만 이건 제안 같은 게 아니다. 통보지.”
“...네놈...분명 내 계책을 우선시한다고 약조 했을 텐데?”
“물론이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든 그건 실행이 되었을 때다. 걱정마라.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니. 그곳은 우리에게 있어 고향과 다름없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해도 여태까지 한 일이 있으니 너와 한 약속은 지킨다.”
“...후... 마음대로해라.”
벨제뷔트는 짜증이 났지만 이내 설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놈들과 틀어진다면 막심한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다.
‘정말 통제가 안 되는 놈들이군.’
혀를 찬 벨제뷔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망령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군.’
하늘을 올려다본 유세현은 그리 생각했다. 보통 망령들은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공격을 감행해오는 버릇이 있는데, 지금 놈들은 되려 자리를 회피하고 있었다.
마치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최대한 사리겠다는 듯한 모습.
‘뭐 됐나...’
유세현은 이강호가 알려준 대로 특정 나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강호가 바위에 손을 얹고 무엇인가를 조작했을 때였다.
쩌쩌적-
거대한 절벽을 이루고 있던 암벽이 양측으로 갈라지며 폭이 100m가량 되는 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끝에 위치해있는 구조물을 바라본 카그네프가 중얼거렸다.
“여기가 N3연구소인가...”
“중요 단서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흥, 당연한 말을. 가자.”
N3연구소는 다른 곳과 규모가 남달랐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크람베르가 쓰러졌다고 한다.
물론, 승리한 것은 인간측이 아니었지만.
과거의 승리자, 정보의 왕이었던 카그네프 제벨과 다른 이들이 발걸음을 연구소로 향했다.
* * *
N3연구소의 내부는 다른 연구소와 달리 깨끗했다.
부서진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
지이잉-
기계 돌아가고 있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장치도 상당수 살아있는 모양.
이강호의 머릿속에서 현재의 과거의 시점이 교차했다.
‘그래... 우린 이곳에서조차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부 합쳐야 5000명 정도 일까?
타 종족이 기본적으로 4만이 넘어가는 걸 고려했을 때 무척이나 적은 수였다.
그들은 곧장 조사에 착수했다.
이강호가 구석진 벽에 손을 얹었다.
냉기가 손을 타고 흐른다.
이 장소에서... 여러 동료와 리체 케머런이 전사했다.
“흐음...”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처음 오는 게 아니건만 사실 그는 장소만 알고 있었지 이곳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시나리오가 바뀌며 내부시설이 완전히 뒤바뀐 탓이다.
본래 이곳은 무수한 점막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크람베르를 쓰러트리는데 필요한 아이템 같은 것도 주지 않았기에 이벨린의 성화에 못 이겨 머릿속에만 넣어놨을 뿐, 여태까진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좀 더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자 천장에 달린 카메라가 그의 몸을 스캔했다.
[코드가 확인되었습니다.]
파앗-
문이 열린다.
코드를 얻지 못했다면 필히 고생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여러 방을 지나 마침내 연구실로 보이는 방에 들어섰다.
줄지어 있는 수많은 포르말린병.
포르말린병은 그 크기가 2.5m가 넘었는데 대부분은 파손되어 깨져있었다. 건드리지 않아서인지 바닥에는 액체가 마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온전한 4개의 포르말린병으로 향했다.
“빙고.”
내부에 들어있는 생명체를 본 카그네프가 씨익 웃었다.
유세현도 기쁘기는 매한가지.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예 못 얻는 거보다는 났다.
그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발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지잉-
포트말린병을 중심으로 난데없이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건드린 게 없는데?
“이런!”
모두가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허나 일그러진 공간이 이곳을 잠식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제6 유적의 진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