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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엔 정말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그사이 유세현은 놈과 크라베스의 차이를 비교했다.
플라스크를 감옥이라 놓고 봤을 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둘의 큰 차이점은 한 가지였다.
‘형태가 시시각각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 뭐라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다.
놈은 과연 뭐하는 자일까? 왜 이곳에 잠들어있던 것일까?
유세현은 놈에게서 당장에 여러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절대 어설프게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자연스레 알 수 있었던 정보부터 툭 던져보기로 마음먹었다.
“방금 분명 멸망했다고...”
[그러네.]
아니나 다를까 놈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을 보였다.
유세현이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살아있는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후후후, 살아있다? 이게 말인가?]
“......”
[우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플라스크가 미미하게 진동했다. 꽤나 큰 자극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놈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본디 이런 애매모호한 생명체가 아니네.]
“그렇다는 말은...”
[그래, 우리도 본래는 확실한 육체를 지닌 종족이었지.]
씁쓰름한 음성이다.
유세현은 유도가 확실히 성공했음을 느꼈다.
놈이 한탄하듯 말했다.
[천체력 10191년, 갑자기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네. 우리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지.]
천문대에서도 언급되었던 만큼, 일행은 가만히 그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내용은 이러했다.
놈들의 시간으로 천체력 10191년, 놈이 거주하고 있던 행성에 공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 균열은 보통의 균열이 아닌 생과 사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균열이었다.
그 여파로 죽은 자들은 살아 움직이게 됐고, 살아있는 자들은 그 여파로 자아를 점점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는 현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네.]
놈은 지금에 와서야 스스로를 소개했다.
영혼 관련분야의 권위자, 라벤 테이메르박사.
라벤은 여러 분야의 권위자들과 함께 셀 수 없을 만큼 실험을 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멸망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점에서 거의 포기했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않았지. 그들은 이윽고 한 가지 방책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는데 그 방책이란...]
라벤이 한숨을 내뱉으며 차분히 읊조렸다.
그 말을 들은 유세현과 일행은 눈이 화들짝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망가져가는 육신을 버리고 영혼상태로만 생존하자는 거였지.]
‘영혼!!’
[하지만 나는 그때 반대했네. 왜냐하면 영혼은 생명체를 오롯이 존재시키기 위한 동력원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동력원... 말입니까?”
[그러네. 영혼은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는 아니네. 영혼과 육체, 이 두개가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지. 이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국엔 본질을 잃게 되기에 의미가 없네.]
“......”
말을 듣고 있는 유세현의 머릿속에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사부, 천마 독고천.
그는 영혼 상태로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틴 인물이었다.
판도라는 무수히 많은 법칙이 집약된 곳이기에 그 법칙이 분명 천마에게까지 적용이 되었을 터인데.
유세현은 내심 걸리는 것을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이곳에 당신인 채로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이건 내가 만들어놓은 작품 때문이네. 이 플라스크.]
“아...”
[하지만 결국 임시방편일 뿐인지라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그보다도 내가 깨어난 것을 보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시작한 모양이군.]
“시스템?”
[그래, 앞서 말 한대로 순수영혼 상태는 자기 자신이 아니네. 그리고 다른 권위자들도 그것을 잘 인지하고 있었지. 그래서 그들은 모든 영혼을 관리해 줄 또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었네.]
“그게 무엇입니까?”
[크람베르.]
“...?!”
[크레이, 람델, 베레느크, 르벤의 성을 따서 만든 이 시스템은 영혼의 개체정보를 읽어 컨트롤함과 동시에 요람 안에서 만큼은 서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해주지.]
“그건 즉...”
[그래, 그들은 현실에서 살아가지 않고 크람베르의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답을 내놓았네.]
“......”
크람베르, 망자들의 왕.
일행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는 이강호도 모르고 있던 정보였는데 꽤나 유용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무려 이 유적의 기원을 알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일행은 동시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크라베스는 대체 무엇인가?
크람베르의 추종자들은?
‘분명 무언가가 더 있을 거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라벤이 말했다.
[후... 오랜만에 대화를 하니 정말로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군.]
“......”
[그래서? 왜 나를 깨웠는가? 희생당한 저 불쌍한 영혼들 때문은 아닐 테고...]
유세현이 추격해 온 놈들을 응시했다. 놈들은 어디가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아직도 벌벌 떨고 있었다.
라벤이 말을 이었다.
[이자들은 영혼화 시키는데 희생당한 실험체들이네. 내가 한곳에 거두어 동면시켜놨는데 모종의 이유로 풀려난 모양이군. 저들을 헤치지 말게 어차피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유세현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스텟도 되지 않고 스킬도 떨어뜨리지 않는 적들이다. 해가 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죽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질문!
비록 유도를 한 것이었지만 라벤의 말을 들어주면서 유세현은 느낀바가 있었다.
이자는 크라베스와는 다른 존재다.
유세현과 이강호의 눈빛이 교차했다.
일행은 약간 각색만 할 뿐 숨기지 않기로 했다.
라벤의 말에서 플라스크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놈이 퍼줄 때 받는다!
유세현은 영혼이 신인류인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상황설명을 했다.
그러자 라벤이 경악을 터트렸다.
[크람베르가 영혼들을 이용해 공격을 하고 있다고?]
정확히는 크라베스.
하지만 라벤은 몇 번을 말해도 놈을 크람베르라 지칭했다.
[영혼 제어시스템은 오직 하나뿐이네. 두개는 있을 수 없어.]
“만에 하나라도 말입니까?”
[만에 하나?]
그 말에 라벤이 고심하듯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내뱉은 말.
[나는 크람베르가 완성되자마자 육체가 다해 이 플라스크 속으로 들어왔네. 그래서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은 알지 못하지. 이상이 발생했다니 분명 내가 잠든 이후에 다른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 터인데...]
“흠...”
[제작자들이 잠들어 있을 곳을 찾아가게. 그들은 나와 달리 제일 마지막에 잠들었을 것이네. 뭔가 남아있는 게 필히 있을 테지.]
일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강호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N3 연구소로 향하게. 그들은 필히 그곳에 있을 테니.]
“위치는 어디입니까?”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00km. 지형설명은 오랜 시간이 지나 바뀌었을 테니 무의미하겠지.]
일행은 살짝 실망했다.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판도라 기준이 아닐 수도 있고.
[건물은 이렇게 생겼네.]
파앗-
그가 눈짓하자 화면에 특이하게 생긴 구조물이 나타났다.
마치 직사각형의 블럭을 쌓아 올려 만든 것 같은, 유세현에게는 무척 생소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유세현은 입맛을 다시는 반면 이강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고 있구나!’
이것이 회귀자의 힘.
라벤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이정도 뿐이겠군.]
“답변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닐세. 당최 빛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위해 이곳에 들어간 것이었으니...]
쩌적-
플라스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세현은 막을 수 없음을 느꼈다.
라벤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아... 다시 한 번 더 그 찬란한 빛이 보고 싶구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생명... 영혼을 맑게 정화시키는 폭포의 물줄...]
쨍그랑!
플라스크 병이 완전히 산산조각 부서져 내렸다.
풍화되어 사라져가는 라벤의 영혼.
본래라면 크람베르에게 귀속되어야 정상이겠지만, 그는 육체 없이 의식을 지키는데 힘이 다 사용하여 소멸되는 게 분명했다.
일행은 잠시 그곳에서 계획을 짰다.
“N3연구소는 트루라이에 있어.”
그리고 트루라이에는 최강의 2종족, 천족과 마족이 분포해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들어갔다가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너무도 위험하다.
이에 유세현이 한 가지 계책을 마련했다.
내용을 들은 이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현 상황에서는 해볼법한 방법이군.”
“그럼 그걸로?”
“전, 콜이요 선배! 어차피 가만히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데다가...”
김주희가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 지긋지긋한 상판대기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싶네요.”
* * *
휘이잉-
세찬 강풍이 몰아치는 에베스트로 천문대 일대.
그곳에는 현재 엘프와 델바람의 정예가 여전히 주둔해 있었다.
알 수 없는 망령의 수장에 의해 천문대의 망원경이 15일간 강제적으로 봉인된 이후 어떻게 해야 될지 마땅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답답하군.”
“너의 말에 동의를 표하게 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동감이다 카시우스.”
엘프의 수장 카시우스의 말에 델바람의 수장 카그네프 제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단서를 얻어가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너무도 빠르게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천족이나 마족에게 또 우세를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
아니, 천문대를 잠시라도 사용한 그들은 내심 알고 있었다.
천족은 몰라도 마족 쪽은 무슨 계책이 있다는 것을.
“카시우스, 망령들의 출현빈도수가 점점 늘고 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만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어.”
“알고 있다. 하지만 마땅히...”
갈만한 장소가 없다.
지금 이 세계는 강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비규환이었다. 어딜 가도 부딪친다.
카그네프가 말했다.
“일단은 우리도 마족과 천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떤가? 일단 갔다가 놈들의 정황을 보면서 움직이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흐음... 그 수밖에 없는 건가?”
“뭐 어쩔 수 없잖나. 숨을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으니.”
“확실히...”
이윽고 카시우스와 카그네프는 함께 동행한 최상위 전사 500명과 함께 본진이 주둔하고 있는 에베로스로 이동을 개시했다.
탐색을 한다면 이곳에서도 뭔가 발견할 수는 있을 터지만, 병력을 총동원할 수 없는 만큼 시간 효율상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에베스트로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였다.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척을 느낀 엘프과 델바람측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품에서 꺼냈다. 그 시간이 미처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카그네프가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하기야 엘프와 델바람의 연합이니 만큼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다가오는 인원을 알아챈 것이다.
“모두 저놈을 처리...”
“아니, 잠깐.”
이윽고 카시우스가 공격명령을 내리려던 카그네프를 제지했다. 카그네프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이윽고 몇몇 최상위 엘프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놈들은 대체 뭐길래...
어느새 가까이 접근한 유세현이 말했다.
“엘프와 델바람측 대표는 앞으로 나와라. 협상을 하러왔다.”
연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