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606 --------------
그는 곧장 이유를 설명했다.
“놈은 불완전하게나마 크람베르의 모든 걸 구사하고 있어.”
크람베르의 능력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기본적인 능력인 망령, 망자 제어부터 시작하여 영역확대 그리고 흡수한 영혼으로 육신을 재구성 할 수 있는 능력까지.
때문에 크람베르는 단순 물리적 타격만으로는 절대 소멸시킬 수 없다.
아마 추종자 놈들도 이 때문에 크라베스를 처리하지 못하고 가둬놨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 그런 놈을 죽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숨겨져 있는 근원을 찾아서 파괴해야 돼.”
문제는 크람베르의 근원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파악하고 있을지언정 크라베스의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
게다가 근원은 특수한 물질로만 파괴가 가능하다.
물질도 아직 얻지 못했고, 놈에게도 크람베르와 똑같은 물질이 100% 통할 것이라 확신이 없는 이상 고려해야 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 선배... 놈이 도주한 이유는...”
“아마 전력보존 때문이겠지.”
유세현의 추론에 이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강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마 크라베스는 지금 그리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 거야. 원인은 다들 짐작이 가지?”
“추종자...”
유세현의 낮은 목소리가 일대에 잔잔하게 울렸다.
김주희와 루시아, 아퀼라의 얼굴에 한순간 긴장감이 스쳐지나간다.
추종자가 언급되면서 루시펠과 벨제뷔트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악마... 분명 오르엠을 잡을 거라 그랬어요. 시아야 너도 그렇게 들었지?”
“응. 나도 분명 그렇게 들었어.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루시아의 말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강호 쪽으로 쏠렸다.
오르엠,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곳의 있는 모두가 직접 경험해본 만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적을 일격에 먼지로 바꿔버리는 막강한 신성마법과 티탄족의 왕인 케르트란조차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른 강대한 힘.
게다가 일전 한 번 허를 찔리긴 했지만 그건 인간이란 종족을 너무 얕잡아 봤기에 생긴 일일 뿐 사실 오르엠은 굉장히 영악하기 그지없다.
항상 부하를 대동하고 퇴로를 확보해 놓는 등 쉽사리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놈을 과연 벨제뷔트와 추종자들이 손을 잡았다고 해서 말처럼 쉽게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인가?
“손쉽게는 안 되겠지. 하지만...”
아예 불가능인 것은 아니다.
“정말 잘하면... 우리가 돌아왔을 땐 오르엠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어.”
그렇게 말한 이강호가 대뜸 한숨을 쉬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을 테지만 유세현과 일행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도 틀어진 시나리오.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흐름.
그는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인간세력을 키운 뒤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끝나있는 게 아닐까하고.
허나, 그렇다고 해서 크라베스가 목숨을 노리고 있는 지금 5명만으로 계속 돌아다니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부담감이 크다.
이강호가 능선 너머를 응시하며 말했다.
“돌아갈까.”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가요 선배.”
그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닥쳐올 일을...
* * *
일행은 그 누구보다도 은밀하게 이동했다.
망령의 눈에 띄지 않게 자세를 낮추고, 이종족들을 피해 우회하고... 딱 한 번 이종족들에게 발각 당했으나 망령들에게 쫓기고 있던 이들이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기에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로 이동할 수 있는 지역까지 당도한 일행!
이강호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스크롤을 찢었다.
찌익-
사용하기 무섭게 밝은 광명이 터져 나오며 둥근 구체가 일행을 휘감는다.
이 세계에서는 습격방지를 위해 마을에서 나올 때 일정지역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듯이, 마을로 다시 들어갈 때도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나갈 때와 달리 들어올 때는 그 범위가 좁아 부담이 훨씬 크다.
파앗-
대로변 정중앙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행들.
건축물들을 확인한 김주희가 지친 얼굴로 활짝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뻐근해 죽는 줄 알았네.”
허리를 굽히고 있던 루시아도 그제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일행은 잠시 몸을 풀고는 곧장 출구로 향했다.
걷는 걸음걸이가 무척 가볍다.
김주희는 살짝 들뜨기까지 했는지 깡총 깡총 뛰어 보이기까지 했다.
유세현은 그걸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좋은가.’
사실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 유세현도 꽤 좋긴 했다.
진지를 떠나온 지도 어느덧 약 1년하고도 11개월.
드디어 여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잘 지내고 있겠지. 다부지고 강한 애니까.’
유혜인의 얼굴을 떠올리는 유세현의 입가에 더욱 짖은 미소가 맺힌다.
루시아는 그걸 보며 김주희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 착각했다.
‘나도... 해볼까?’
루시아는 어설프게나마 몸을 움직여 보려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자신은 저런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부럽다.’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성격도, 실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주희처럼 유쾌한 사람이 되어 유세현에게 활기를 넣어주고 싶다. 전투 때도 보다 잘 싸우고 싶다.
루시아는 자신만이 볼 수 있도록 스테이터스 창을 켰다.
그녀의 눈이 향한 장소는 특수특성과 고유특성 창.
‘난 이 두 개의 특성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있어.’
유세현이 특수특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은 없었다.
생사를 함께하는 마당에 일부러 감춘 것이 아니라, 특수특성이란 것 자체가 만큼 워낙 특이한 것이라 구설수설 늘어놔 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단계가 나눠져 있는 건 어쩌면 유세현의 특수특성인 마(魔)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특수특성인 악몽(惡夢)에도 다음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그저 내딛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뭐가 부족한걸까.’
간절함? 아니면 노력?
그녀가 한참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웅성웅성.
고심 때문에 지금까지 잘 들리지 않던 술렁임이 귓전을 강타한다.
“젠장! 이게 무슨!”
“크으으으으으!”
그녀가 전방을 응시하자 여러 이종족들이 큰 대로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축제 때의 마을 같은 모습.
“왜! 왜! 도대체 왜 못나간다는 거냐!”
“당장 그 문을 열어라 도우미! 죽여 버리기 전에!”
허나 분위기는 반대로 살벌했다.
루시아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끼고는 일행을 바라봤다.
“......”
차단 로브를 쓰고 있어 표정과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느껴진다.
“세현아...”
이강호가 입 열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여기에 갇힌 것 같다.”
* * *
왜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가.
이강호도 이것에 대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겪지 못했던 일이란 뜻이다.
이에 일행은 잠시 뒤로 물러나 과거 튜토리얼을 이끌어준 도우미를 찾았다.
도우미는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저희가 탈출구를 봉쇄한 게 아닙니다. 어떠한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봉쇄 된 것입니다.”
“어떠한 힘에 의해?”
“예,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만, 저희 도우미들은 이 세계를 좀 먹고 있는 어둠의 주인이 모종의 힘을 발휘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가. 강제적으로 풀 순 없고?”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무리입니다.”
그 말에 이강호의 입이 꾹 닫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역시나 안 된다.
그리고 이건 큰일이었다.
한숨을 살짝 내쉰 유세현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도우미씨 그럼 출구를 열 다른 방도는 아예 없는 겁니까? 알고 있다면 정보를 사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맹약에 위반되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맹약?”
“예, 그렇습니다.”
결국 도우미는 답답함만을 선사한 뒤 입을 닫아버렸다.
이에 일행은 잠시 자리를 옮겨 의견을 나눴다.
제일먼저 자신의 생각을 밝힌 사람은 이강호.
“이상해.”
“뭐가? 맹약이라는 말이?”
“아니, 맹약도 맹약이지만 그보다는 알려줄 수 없다는 그 말...”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도우미는 정보를 알고 있다면 대가를 받고 정보를 판다.
몰라서 팔지 못하면 못했지 알고 있는 정보를 구태여 숨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우미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파는 걸 거부했지.”
이건 이 세계의 룰에 위반된다.
이에 유세현이 말했다.
“그렇다면 출구를 봉쇄한 놈은 크라베스일 가능성 높겠군.”
“그렇지. 이전에는 지금처럼 거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크라베스에 대해 떠오르는 건 여전히 없어?”
“응. 안타깝지만...”
이강호의 눈빛이 착 가라 앉았다.
이강호는 지금까지 크라베스를 미니 크람베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놈에게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겠군.”
“후... 여기서 계속 생활해야 되는 거네요.”
잔뜩 울상이 된 김주희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으... 망할 크라베스... 선배님 앞으론 어떻게 하죠?”
“당분간은 정세를 지켜봐야지.”
갇혀버린 이종족들, 마족, 크라베스의 움직임을 살펴 행동을 취한다.
지금 그들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 * *
그들은 숙소 하나를 빌려 정말 오랜만에 편하게 피로를 풀었다.
샤워를 하고, 장비를 정비하고, 음식을 해먹고.
김주희가 특제 스테이크를 완성시켰을 때 유세현은 다 부서져가는 루크루프의 갑주에 마력을 넣고 있었다.
마력을 보충해주면 본디 형태를 찾아가야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이제는 별 반응이 없는 것이 수명이 다한 것이 분명했다.
‘애썼다.’
그는 갑주를 살짝 옆으로 밀어낸 뒤 나머지 장비들도 살폈다.
공간의 부츠를 제외하고는 추종자의 공격 때문에 다 한 번씩 개박살이 났었는데 이것들 또한 곳곳에 균열이 가있었다.
“부츠 빼고 다 바꾸셔야겠네요 선배.”
“그러게. 강호야.”
“알았다.”
아공간 포켓을 소환한 이강호가 창고에서 싹쓸이 해온 아이템을 방바닥에 쏟아 부었다.
수북이 싸이는 장비!
시간이 없던 터라 마구잡이로 집어넣었기에 아이템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유세현은 하나하나 세심히 따지며 보기 시작했다.
“어둠 속성 저항력을 높여주는 갑주라... 이건 됐고...”
마음에 드는 건 딱히 없었다.
랭크가 레전더리 B인 것이 몇 개 있었지만 마법이나 여러 특수 스킬이 많이 내장되어있는 있는 것이었지 장비 자체는 레전더리 C랭크인 루크루프의 갑주보다 튼튼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드는 갑주를 찾은 건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아이템명: 갈망하는자의 역갑.
등급: 레전더리 [B Rank]
상세정보: 항상 무엇인가를 갈망하던 마족 대장장이 아구스가 제작한 갑주입니다. 마계의 원석, 마정석으로 제작되어 단단한 경도와 뛰어난 강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둠의 마력에 반응하여 갑주가 보다 더 강화되나 착용자의 마력이 어둠의 마력이 아닐시 되려 약화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갑은 마정석으로 구성되어 있어 루크루프의 갑주와 비슷한 흑빛을 띄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아이템이지만 유세현에게는 더없이 잘 맞는다.
역갑은 착용하자마자 몸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안타깝게도 루크루프의 갑주처럼 형태변환이 가능하진 않았으나, 몸을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기에 유세현은 만족스러워했다.
“괜찮군.”
그는 이어서 다른 부위 쪽 장비도 맞췄다.
허나, 제대로 건진 건 역갑 하나뿐.
다른 건 그저 그렇거나 유세현에게는 상성상 잘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난 뒤에는 어둠이 퍼져나가고 있는 방향이라 던지 망령들의 움직임 등등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30시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정세(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