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83화 (383/612)

-------------- 377/606 --------------

유세현은 놈이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크라베스.”

새까만 연기로 구성되어있던 이전에 달리 지금은 온전한 육체를 지니고 있어 외관이 많이 바뀌었지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놈은 현재 달리 없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알아보는 건가?”

크라베스가 유세현에게 서서히 접근해왔다.

한 발 한 발, 마땅한 전투 자세도 취하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이 굉장한 여유였다.

마치 언제고 죽일 수 있는 상대를 구태여 봐주고 있는 듯한 모습.

유세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놈의 상태를 차분히 관찰했다.

수많은 망령이 몸을 맴돌며 배회하고 있다.

샘물에 일부가 닿아도 딱히 반응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만으로 어둠을 날려버린 샘물이건만 놈에게는 별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는 것인가?

이에 지켜보고 있던 일행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이런, 하필 나타나도 지금 나타나다니...”

“서, 선배님 약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아직 4분 정도 더 필요해.”

“예? 4분이요?”

김주희가 기겁했다.

4분이라는 시간은 그사이 무슨 일이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긴 시간이었다.

‘크라베스...’

이강호는 1초도 안 되는 찰나 동안 많은 것을 고민했다.

약 제조를 포기하고 유세현을 도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진행해야할지.

‘진행해야 된다. 저게 진짜 놈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을 완성시켜야 돼.’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스틱스의 힘을 얻은 놈이 지금까지 포식을 해왔다면 장난이 아니게 강해졌을 테니까.

“시간 더 단축시킬 수 없어요?”

“최대한 해보겠지만 그래봤자 30초 정도야.”

“30초...”

으득-

김주희의 입이 절로 악물렸다.

그리고 그 순간, 크라베스의 목소리가 고요한 사원을 재차 울렸다.

“이 샘... 당연히 너희가 부활시킨 거겠지?”

유세현은 모른 체했다.

“샘? 부활? 무슨 뜻이지?”

“크크크, 그렇게 모른 척 넘어가려 하지마라. 너희가 예사 놈들이 아니라는 건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까. 다른 이들은 어디 있나? 왜 혼자지?”

“......”

유세현은 겉보기와 달리 크라베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엘프도 한 번에 파악한 위치를 감지해내지 못 할리가 없었다.

역시 이 지역은 놈들에게는 맹독이다.

유세현이 답 대신 칼자루를 쥐자 그 행동이 어이가 없었는지 크라베스가 실소를 내뱉었다.

“허, 지금 혼자 나를 상대해 보겠다는 거냐? 설마 네놈... 이강호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냐?”

“들었다.”

“크크크, 들었다고?”

크라베스가 이마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일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크크! 크흐흐흐! 크하하하하하하!”

“......”

“이강호가 너를 아주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뭐? 나를 혼자 상대해?”

크라베스의 안광이 번뜩 빛을 발한다. 살의가 가득 담긴 눈빛.

당장이라도 전투가 반발하려하자 이강호가 다급히 외쳤다.

“루시아씨만 남고 둘은 가서 세현이를 도와!”

“알겠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주희와 아퀼라가 지면에 바짝 밀착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크라베스를 향해 나아갔다.

루시아는 주먹을 다부 쥐었다.

그녀는 김주희와 함께 도우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왜 남으라고 한건지 알고 있었기에 갈 수 없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약의 완성.

방어마법과 특수특성을 이용해 이곳을 지켜야한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김주희의 창에 시퍼런 냉기가 맺혔다.

아퀼라의 단검에도 마력이 서렸다.

둘은 동시에 양측 담벼락에서 튀어나와 크라베스를 노렸다.

“크크크, 이럴 줄 알고 있었지.”

챙!

팅!

허나 그 기습은 크라베스의 조소와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으... 이놈들은?”

장막을 찢고 새롭게 내부로 들어온 다른 두 존재가 각각 일격을 받아낸 탓이다.

아퀼라와 김주희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자 놈들이 크라베스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차렸다.

“제 2사도 렘펠, 지금 도착했습니다.”

“제 3사도 클락, 지금 도착했습니다.”

크라베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유세현을 재차 응시했다. 누가 봐도 깔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김주희와 아퀼라는 아연실색했다.

크라베스만해도 끔찍한데 두 마리가 더 추가되다니.

‘이래서는...’

‘주군을 도울 수 없다.’

그녀들이 딱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유세현이 한 발 내딛음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투기가 일대로 퍼져나갔다.

같은 편인 김주희나 아퀼라가 느끼기에 지금까지 그가 펼쳐왔던 암흑투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투기였다.

“...?!”

그걸 느꼈는지 크라베스의 표정에도 살짝 변화가 일었다.

여전히 여유를 잃진 않았지만 뭔가 껄끄러워 하는 듯한 얼굴.

“호오... 뭐지 이 힘은? 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유세현이 답했다.

“곧 알게 될 거다.”

* * *

콰아아앙!

유세현의 검격을 받은 크라베스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단순한 방어로는 견디기 힘든 묵직한 일격의 연속.

인상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받아낼 수 없는 탓이다.

크라베스는 경악했다.

‘아무리 사도의 육신을 빌리고 있다지만 어떻게...’

크라베스가 신경 쓰고 있던 인물은 유세현이 아니었다.

제단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제법 본 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뇌리 속에 각인 되어있는 인물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강력한 화기를 운용하는 이강호 정도.

암흑투기도 겪어봤지만 전혀 겁나지 않는 데다가 속성상성도 좋았기에 크라베스에게는 사실 그렇게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분명 그럴 터인데.

‘뭐냐! 이 검술은!’

이전과 싸우는 방식이 달라졌다.

스틱스를 먹어치운 뒤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온 이후, 지금까지 여러 지역을 누비며 수많은 이종족들을 먹어치운 그였다.

그 와중 몇 번 사도의 육신을 빌려 강자를 상대해 봤으나, 크라베스의 상대는 결코 되지 않았다.

대지를 뒤덮은 어둠이 주는 상승효과와 막강한 군세를 제외하더라도 그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대체 뭐가 바뀌었기에 놈이 이정도로 강해진 거지?’

그때 크라베스의 눈동자에 유세현의 왼팔이 비쳤다.

분명 이전엔 잘려있었는데.

‘재생 시킨 건가? 대체 어떻게...’

크라베스는 일반종족들이 육체를 재생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이 유세현에게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동료 구출 작전을 펼칠 때 놈의 성격상 무리해서라도 사용했을 터다.

‘아니 그보다도 고작 팔 하나 때문에 이정도의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차이가 없을 수 없다는 건 크라베스도 알고 있었다.

팔 하나와 팔 두 개, 당연히 팔 두 개인 자가 더 유리하니까.

하지만 현재 크라베스가 생각하기에 이건 그런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빠악-

“큭!”

거기에 더불어 지형을 조작하는 능력.

크라베스도 지니고 있지 못한 이 특수한 능력은 그를 더욱 곤경 속으로 몰아붙인다.

“하압!!”

결국 크라베스는 어쩔 수 없이 강력한 충격파를 발생시켜 유세현을 잠시 떨어뜨렸다.

그가 거리를 유지하며 물었다.

“네놈... 그때는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

유세현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사실 그때는 무공에 대한 증진도 없었을 때였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었다.

허나 그런 걸 밝히는 건 미련한 짓.

또한 굳이 말을 덧붙이는 것보다도 망상에 빠진 채 있게 두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스슷-

팟!

파바바박!

합을 나눌수록 긴박함이 더해진다.

“큭!”

유세현은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었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었다.

명백하게 밀리고 있었다.

이강호 때문에 마음껏 광역스킬을 발휘할 수 없는데다가 크라베스가 뚫어놓은 틈으로 어둠이 비집고 들어와 렘펠과 클락의 육체를 향상 시켜주고 있는 탓이다.

운디네도 마법을 이용해 둘을 보조해주고 있는 게 고작!

유세현은 일부러 얽히고 얽히는 난전을 유도했다.

그렇게 하면 김주희나 아퀼라를 도와줄 수 있으니까.

렘펠과 클락이 크라베스를 최우선시 했기에 일을 진행하는 건 순탄했다.

쿠우우!

얼음과 환영이 휘몰아친다.

수없이 많은 망령이 춤을 추고, 어둠이 난무한다.

그 속에서 크라베스의 빈틈을 발견한 유세현의 눈이 번뜩 빛났다.

0.5초도 안 되는 정말 미세하기 짝이 없는 빈틈이었지만 유세현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높이 루베르크를 치켜 올린 그가 그대로 팔을 내리그었다.

쿠웅!

“크윽!”

검은 정확히 크라베스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지금껏 줄곧 한손으로만 싸워온 그였다.

양손은 체중, 힘, 그리고 반동까지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다 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한손 내려치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확 굽혀지는 크라베스의 무릎.

양 손을 교차시켜 가까스로 방어해낸 크라베스가 으득 이를 갈았다.

‘지금 이 지역에서, 이 몸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유세현이 예측한 것처럼 영향을 받지 않는 척 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나 겉모습뿐이었다.

결계를 강제적으로 뚫는데 사용한 힘.

결계가 주고 있는 패널티.

그리고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사도의 육체.

“렘펠! 클락! 퇴각한다.”

“왕의 명을 따릅니다.”

파앗-

타다다닥-

셋은 강력한 스킬을 쏟아내기 무섭게 빠르게 사원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어차피 놈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구태여 쫓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약이 완성되었다.

* * *

‘대단하군.’

이강호는 약병을 챙기며 유세현의 힘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크라베스가 본체가 아니라는 건 전투가 발생한 직후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무척 강한 상대였다.

제사장을 쓰러뜨리고 얻은 코인과 마족화로 인한 일시적인 스텟 증가.

검술과 무공 등등 모든 것이 받혀주지 않았다면 놈들을 패퇴시키는 건 결코 불가능 했을 터다.

김주희가 그 여느 때처럼 찬사를 보냈다.

“선배님 정말 대단하세요! 놈을 그렇게 몰아붙이시다니!”

루시아도 고개를 끄덕였고, 아퀼라도 경외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에 유세현은 이강호가 나눠주는 약을 받으며 한마디 했다.

“놈의 상태가 안 좋았을 뿐이야.”

이강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유세현의 가장 큰 장점은 이것이었다.

겸손.

그 어떤 적도 결코 깔보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강한 적과 만나도 주눅 들지 않는다.

그는 곧장 약을 분배했다.

이번에 만든 약의 개수는 100ml 분량으로 딱 5병뿐이었다.

“사용하는 방법은 딱히 없어. 뚜껑을 열고 뿌리기만 하면 된다.”

뿌리면 대기 중으로 약이 확산되면서 효과를 발휘한다.

“액체를 직접적으로 맞추면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아 그리고 마법처리를 해놨으니, 뿌리지만 않으면 뚜껑을 열어도 퍼져나가지 않아.”

“오오... 약화는 어느 정도까지 돼요?”

“글쎄 얼마나 들이마시냐에 따라 다르지. 미완성약이지만 너희들 덕분에 잘 제조했으니 최대 20%까지 스텟을 깎을 순 있을 거야.”

“예? 20%나요?”

“응.”

김주희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 정도라면...

“이거로도 잘 만하면 크라베스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 무리야.”

이강호가 일체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세(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