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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의 영향을 줄 정도면 전투는 무척이나 격렬할 터.
“큭큭큭, 어떡할 테냐?”
그를 흘긋 흘긴 크라베스가 재차 물어왔다.
이강호는 순간적으로 흔들렸지만 역시나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진 않았다.
크라베스의 중얼거림이 귓가를 울린다.
“후후, 하기야 괜한 걸 물어본 셈인가. 돌아갈 놈이었다면 애초에...”
“......”
쉭-
그때 이강호의 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바람처럼 움직였다.
[커...컥!]
그의 우악스러운 손은 어느새 크라베스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크라베스가 벗어나기 위해 팔을 붙잡고 몸을 바둥거리지만 이강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강호가 살기어린 얼굴을 크라베스를 향해 들이대며 말했다.
“날 도발하지 마라... 지금의 난 곱게 넘어가줄 정도로 기분이 좋지 못하다.”
[크...컥!]
“알았나?”
[커...]
“알았냐고 물었다.”
[커컥...아, 알았다.]
휙-
이강호가 쥐고 있던 힘을 빼자 크라베스는 그제야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강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뻔한 도발을 참아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은 흐트러져있는 것인가.
“후... 안내해라.”
“...그러지.”
그렇게 두 사람이 3보정도 움직였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방금 전보다도 더한 진동이 몰아쳤다.
‘유세현...’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찌잉-
아까전과 같은 두통.
그리고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번에는... 네가 그를 지켜...]
[우리는... 승리... 하지... 못...]
“크으윽.”
허리춤에서 잽싸게 예비용 단검을 빼낸 이강호가 스스로의 손등을 찔렀다.
아까 전에야 미처 반응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지금 이 현상이 무엇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건 EX 아이템의 의한 부작용이다.’
그렇다면 곧 또다시 까먹게 될 터.
흔적을 만들어 놓을 필요성이 있다.
역시나 예상처럼 1초도 지나지 않아 누수가 된 것 마냥 기억은 빠져나갔고, 어느새 그는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조차 잊었다.
크라베스가 살짝 놀란 투로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왜 갑자기 자해를...”
“...자해?”
이강호가 그 말에 스스로의 모습을 응시했다.
정말 손등에서 피가 흐른다.
그는 단검을 빼내고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전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상처는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걸.
왜냐하면.
‘근육을 빗겨갔다.’
이런 세밀한 작업은 적에게 조종당할 때는 불가능하다. 아니, 적이라면 되려 심장이나 목 같은 급소를 찌르도록 명령하지 이렇게 어설프게 자해하라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역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기억이 있는 건가.’
그 기억은 무엇인가.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기억이기에 판도라 내부로 들어올 때까지 떠오르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하필 왜 지금?’“...크라베스.”
“뭐지?”
“세현이에게 돌아가겠다.”
“...뭐?”
크라베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마치 잘 못 들었다는 듯.
“돌아가겠다고 했다.”
“...진심인가?”
“그래. 그러니 안내해라.”
이강호가 고개를 돌려 뒤를 응시하자, 크라베스가 입을 쫙 찢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그래! 네가 원한다면야 안내해주마! 가자구!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서 놈들을 다 깨부수는 거다!”
이강호는 그런 놈의 모습을 보며 눈동자를 빛냈다.
신경을 슬슬 긁으며 도발해올 때부터 눈치 채긴 했지만 역시 이놈에게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스로 사지를 향해 들어가려하진 않을 것이다.
이 변수가 좋게 작용할까?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어찌됐든 지금 중요한건 합류다.’
그만큼 동료가 두 명인 것과 세 명인 것은 차이가 확 나기에.
이강호는 임시 붕대를 이용해 손을 압박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후우...후우...”
서걱-
마지막 적이 쓰러졌다. 유세현과 루시펠은 철문을 자르고 들어가 셋을 구출해냈다.
극적으로 한 재회건만 세 명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서, 선배...몸이...”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한 그런 얼굴.
유세현의 상태는 그만큼 좋지 못했다.
온몸이 너덜너덜하다 못해 걸레가 됐다.
김주희가 울먹이며 말했다.
“왜...왜 오셨어요. 선배...대체 왜...”
“...가자. 웬만한 적은 다 처리했어.”
“......”
그 말에 셋은 말을 잇지 못했다.
틀린 말이다.
적은 분명히 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예...가요 세현씨...”
셋 중 누구도 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건 그에 대한 배려였다.
게다가 또 아는가?
놈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지.
루시펠을 흘끗 김주희가 그녀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선배님을 도와주셔서.”
“......”
루시펠은 고개만 살짝 끄덕여 답했다.
답할 힘도 아껴야 될 정도로 그녀의 상태도 심각한 것이다.
감옥을 빠져나간 다섯은 공동을 지나 나선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1층.
유세현은 더 깊이 파고들 생각이었다. 크라베스의 말에 따르자면 그곳에 바깥과 이어지는 탈출 포탈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선배님, 선배님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요.”
“저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세현씨.”
“군주시어 저도 이들의 말에 찬동하는바 입니다.”
셋이 이렇게 이구동성이 되어 말하자 유세현은 뭔가 묘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잡졸도 상대하기 힘든 상태지만 그래도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났건만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설...마?’
눈치 빠른 유세현이 불안감을 뒤로 하고 물었다.
“혹시 추종자가 둘 말고 더 있는 거야?”
“......”
“큭...”
침묵은 곧 긍정, 유세현은 그녀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추종자들을 피해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벅.
소리는 무척 작았으나 그건 분명 발소리였다.
일행은 곧바로 바닥에 눌러 붙어있는 새까만 액체를 뒤집어썼다.
워낙 죽인 적이 많기에 가능한 행동.
다가온 발소리의 주인은 한동안 말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세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 송글 맺힌다.
그가 보기에 놈은 아까 처리한 추종자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해보이진 않았다.
‘제발 그냥 가라.’
그 간곡한 바람이 통한 것일까?
딱히 이상한 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는지 놈이 지하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대로 내려간다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때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놈이 대뜸 중얼거렸다.
“거기 있었군.”
동시에 일행이 숨은 장소를 향해 확 돌아가는 목.
“젠장할!”
유세현과 나머지 넷은 자리에서 단번에 일어나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늦은 것 같구나.”
크라베스가 흔적을 살피고 있는 이강호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말했다.
이강호는 다분히 혀를 찼다.
‘애초부터 내가 같이 왔더라면...’
상태로 보건데 만약 그랬다면 시간과 체력이 절약되었을 것이고 운이 따라주었다면 도주하는 게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료들을 쓰러뜨려 데려간 놈은 추후 등장한 놈이 틀림없었으니까.
이제는 텅텅 비어있는 감옥.
부서진 창살로 판단컨대 잡혀온 다른 이종족 인원들도 전부 끌려간 모양이다.
의식은 아마도 시작되었으리라.
“...후...”
이강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동료를 구출 할 수 있을지. 어떤 수를 취해야 할지.
‘일단 정공법으로는 절대 구출할 수 없다.’
추후 등장한 놈이 더 강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하 놈들도 있을 테고.
그런 악조건에서 부상당한 동료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이 빌어먹을 데스게임을 만든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잡혀간 유세현과 같은 말로를 걷게 되겠지.
“...젠장.”
답답한 마음에 이강호가 머리카락을 박박 긁었다.
어쩔 수없이 포기해야 되는가.
‘하지만...’
기억이 갑작스레 떠오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정말 중요한 이유가.
착잡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감옥 바깥으로 옮기자 크라베스가 말을 걸어왔다.
“어이.”
“...뭐냐, 난 지금 바쁘...”
“저 문, 열어보지 않을 건가?”
“......”
크라베스가 가리키고 있는 문은, 이강호조차도 파악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된 문이었다.
이강호가 툭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가 왜 이걸 굳이 열어 봐야 되지?”
“혹시 모르잖나. 이곳에 빼앗긴 동료의 무기들이 보관되어 있을지. 구하러 갈 거라면 확인해보고 가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는데.”
“...흠...”
대충 들으면 이강호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그럴싸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강호는 이곳이 무기창고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직접 힘을 담아 제작한, 전용 무기를 사용하는 추종자 놈들은 대리자들의 무기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이강호는 이쯤에서 놈과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했다.
“크라베스.”
“뭐지?”
“숨기고 있는 걸 다 밝혀라. 네가 이곳에서 노리고 있는 수는 뭐냐?”
크라베스는 의표를 찔린 것 마냥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난 단지...”
“길안내를 할뿐이다? 시치미 떼지 마라. 내가 머저리로 보이나?”
“......”
“넌, 우리를 엿 먹이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 번 뿐이긴 하지만 구역을 나누는 함정도 있었으니 말이지.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다. 숨기지 마라. 넌 우리의 협박 때문에 따라온 게 아니다. 난 네가 이 문을 열어주길 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
유영하듯 주위를 맴돌던 크라베스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광소.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잘도 눈치 챘구나. 나름 잘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너의 목적은 뭐지?”
“난 찬탈자. 빼앗는 자. 난 놈들을 지배할 자다.”
“...??”
이강호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추종자들이 따르는 지배자는 단 1인, 망령의 왕 크람베르뿐이거늘.
이강호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말도 그럴싸하게 해야지 놈들에 의해 유폐되어 있던 주제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크크크,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내가 너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단 이것만큼은 말해주마. 너는 내 도움 없이는 동료를 절대 구출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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