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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호의 눈매가 찌릿 좁혀졌다. 저 당당함과 자신감.
솔직히 이 지역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자로서, 놈의 말은 너무도 거창했다.
허나, 잘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놈은 특별하다.
어중이떠중이가 다량의 추종자가 있는 이곳의 지리를 제 집처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놈의 목적에 대해 물어본 것이 아닌가.
회귀 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나, 그건 유폐된 장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일반 대리자에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일 수도 있고.
이강호는 놈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가정 하에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일부러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히... 그 두 사람이 당해내지 못했다면 나 혼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겠지.”
“크크크,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저 문만 열어주면 힘을 완벽히 되찾을 수 있는 건가?”
“큭큭, 저 문? 아니 저 문만으로는 안 된다. 더 깊숙한 곳...그곳에 있는 봉인을 부숴야하지.”
“...많이 위험하겠군. 그것까지 해내주면 내 동료들을 구해줄 거냐?”
그 말에 크라베스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저자세로 굽히고 들어오는 이강호의 모습이 무척 만족스러운 것이다.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높아지는 크라베스의 언성.
이강호는 이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단순한 언약으로는 안 된다.’
놈은 우위를 점하면 상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건 놈의 본질이었다.
게다가 놈은 동료를 구출하려는 팀원들을 이용해 은밀하게 목적을 이루려고 시도하지 않았던가. 돌아가려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일부러 따라와 신경을 긁기까지 했고.
언약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하다. 약속을 강제적으로 지킬 수 있게 만드는 다른 무엇인가가.
“혹시, 계약 같은 걸 할 수 있나? 솔직히 불안해서 말이지.”
“크크크, 이해하는 바이다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현재로서는 할 수 없다. 힘이 봉인 되어 있기 때문이지. 나를 믿어라. 나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는 역시다.
그리고 그 순간.
입꼬리를 올린 이강호가 툭 말을 내뱉었다.
“웃기시는군.”
“...뭐라?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건가? 네 동료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는데 그런 말을 내뱉어도 괜찮겠...”
“각인...”
“...?!”
“방금 한 약속을, 너의 영혼을 나에게 각인시켜라. 그러면 네 말에 따라 움직여 주겠다.”
이강호가 눈동자에서 청염을 토해냈다.
크라베스의 안면이 순간 흠칫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어떻게 그 힘에 대해 알고 있냐는 표정.
“네, 네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
“시치미 떼지 마라. 네가 놈들의 지배자라면 사용할 수 있을 터다.”
크람베르도 지니고 있는 망자의 왕에 대한 고유권능, 존재의 근간이 되는 힘.
[영혼각인]
영혼각인은 쉽게 말하자면 영혼을 종속시키는 능력이었다. 때문에 만약 A가 B에게 약속을 하고 영혼각인을 걸게 되면 A는 B에게 반드시 약조를 지켜야만 한다.
만약 지키지 않는다면 근원을 거는 것이기에, 설명 힘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존재의 근간이 되는 힘인 만큼, 놈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 힘을 미약하게나마 지니고 있으리라.
“자, 선택해라. 각인을 할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포기할 것이냐. 참고로 난 네가 수락하지 않으면 동료들을 포기하고 이곳을 이탈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
이강호의 말에 크라베스가 침묵했다.
상황의 역전과 동시에 언쟁의 종결을 알리는 침묵이었다.
* * *
영혼 공양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제단.
의식에 집중하고 있던 추종자들의 몸이 일제히 흠칫 움찔거렸다.
왜냐하면.
‘제2 봉인이 파괴되었다.’
2층에 위치해 있던 제1 봉인에 이어 제2 봉인이 날아간 것을 느낀 것!
추종자들이 눈짓으로 서로에게 신호를 알린다.
의식의 중간에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 탓이다.
추종자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정말로 놈이 돌아왔다는 건가?’
제1 봉인이야 물리적 방어력이 약해 전투의 여파로 부서진 것이라 치부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허나, 제2 봉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
입구인 문에 걸려있는 특수한 마법결계도 결계이지만 보통의 생명체는 이걸 부수고 내부로 들어간다 한들 제2 봉인을 부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곳에는 제물들의 장비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놈들이라면 아이템만 챙겨 방을 빠져나오는 것.
헌데 그렇게 위장해놓은 제2 봉인지가 박살이 났다는 건 봉인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파괴했다는 뜻이 된다.
제단의 정 한가운데에서 위치해 의식을 주도하고 있던 제1 제사장, 렘벨크가 쓰러진 채 영혼을 뽑히고 있는 다섯을 응시했다.
‘저놈들이 데려온 건가. 역시 좀 더 꼼꼼히 확인해 봤어야 했건만...’
함정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깊숙한 위치까지 다다른 것이 의아하긴 했으나, 유세현이 동료 구출에만 신경을 쓰다가 쓰러진 덕에 의심을 거둔 것이었다.
만약 놈이 왔다는 걸 눈치 챘다면 의식을 거행하는 바보 같은 짓은 안했을 것이다.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렘벨크는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제0 제사장 스틱스를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는 의식 중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이다.
그때였다.
후우웅!
콰과과과과!
벽이 한순간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화염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무려 8인이나 되는 추종자가 만든 대결계가 쳐져있기에 한 번에 뚫리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충격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
렘벨크를 포함한 추종자들의 시선이 구멍이 뻥 뚫린 벽을 향했다.
저벅. 저벅.
그곳에는 각기 다른 창을 양손에 움켜쥐고 있는 이강호가 서 있었다.
왼손에는 이프리트의 화염창, 오른손에는 루시펠의 롱기누스.
스틱스를 확인한 이강호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진다.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존재 스틱스, 다른 이름은 소울이터.
훙훙훙훙훙!
이강호의 오른손에 있는 롱기누스가 풍차처럼 빙빙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가 있는 힘껏 롱기누스를 날리자 굉음이 울려 퍼지고 바람이 갈라진다.
쐐애애애액!
콰아아아앙!
허나, 롱기누스가 결계에 부딪칠 때까지 제1 제사장 렘벨크를 포함한 다른 제사장들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만큼 결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한 탓이다.
물론.
쩌적-
쩌저적-
“...?!”
균열이 생성되자 동그랗게 커지는 제사장들의 눈.
이강호가 이번에는 화염창을 쥐고 있는 손을 뻗으려 한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퍼엉!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접근한 스틱스가 일각을 내질렀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발차기인데 위력은 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
재빨리 몸을 틀며 공격을 흘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밀려 뒤로 수십 미터는 날아갔을 터다.
이강호는 입술을 살짝 곱씹었다.
스텟이 자신을 훨씬 웃돈다.
영혼포식 스킬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강해지지 않았을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했던 그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놈과의 전투에 온 신경을 쓸 수 없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저 결계를 파괴하고 최후미에 위치해 있는 마지막 봉인, 크람베르의 석상을 부수는 것.
만약 시간 안에 부수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간다.
동료들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되겠지.
그때 스틱스가 물었다.
“크라베스, 그 반역자는 어디 있지?”
“난, 그런 놈 모른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 군.”
스틱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지 않았다. 되려 항상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우미마냥 표정 하나 없어 무척이나 싸늘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방전.
파바박!
파바바박!
막기만 해도 벅차다.
그만큼 손발을 형태변환해서 쇄도해 들어오는 스틱스의 공격은 무척 날카로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경과하지 않아서인지 스텟이 미쳐 날뛰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
만약 놈이 회귀 이전의 힘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면 아무리 이강호라고 한들 10초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약점을 공략하지 못한 놈은 강했다.
챙!
콰아앙!
충격파에 밀려난 이강호의 입에서 각혈이 터져 나왔다.
“큭...”
입을 악문 그의 화염창에 불꽃이 맺힌다. 그건 스틱스도 주의할 정도의 열기였다.
“그 화염은 좀 거북하군.”
치이이잉-
주홍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화염이 넘실거린다.
전력으로 특성과 권능을 개방한 이강호의 불길이 일대를 휘감았다.
* * *
“후우...후우...”
이강호는 화염에 의해 재가 되어 부서져 내린 스틱스의 오른팔을 응시했다.
스텟의 격차를 극복해내고, 일격을 먹인 것.
허나, 그럼에도 이강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스스스-
허공에 그림자가 뭉치기 시작하더니 팔이 빠르게 수복되어간다.
특수능력, 자가복구.
놈은 약점을 뒤집어쓰지 않는 한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초고속 재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게 이강호가 특히나 놈을 의식하던 이유였다.
준비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창끝으로 화염을 모았다.
이제 그의 마력은 거의 동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의식도 거의 끝나가기 직전이었다.
괴로워하고 있는 동료들의 얼굴들이 결계 너머로 보인다.
승부를 봐야한다.
놈은 무시하고 어떻게든 결계를 부순다.
그때 스틱스가 재생된 팔을 점검하며 말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주 좋은 영혼이로군. 훌륭한 양식이 되겠어.”
“......”
이강호는 놈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태양신공 그리고 고유특성, 특수특성.
이 모든 것을 하나에 담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집합한다.
불은 무엇이듯 불태운다.
신조차도 그 앞을 막아설 수 없다.
태양신공 극의.
[대염천하(大炎天下)]
쿠우우우웅!
타오르는 불길이 날카로운 창으로 변화했다.
허나,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추종자도 파이어 스피어 같은 저급한 마법을 상상할 수 없었다.
태양 같이 타오르는 붉은빛과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빛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리고 그 중심을 관통하는 주홍빛의 불꽃까지.
“하아아아압!”
힘찬 합성과 함께 불길을 둘러싼 이프리트의 화염창이 결계를 향해 날아간다.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 스틱스가 재빨리 막아서서 스킬을 사용했지만.
“망자의 벽!”
쿠우우웅!
순식간에 녹아 자취를 감추는 수십장의 벽.
“어떻게 이정도의...”
줄곧 여유를 유지하던 스틱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만큼 이 일격은 예사 일격이 아니었다.
몸을 변형시켜 막아보려 했지만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
전신이 재가 되어버리면 아무리 스틱스라고 하나 재생은 불가능하다.
“크으으... 어떻게 이런...”
스틱스가 잽싸게 옆으로 빠지자 화염이 결계를 집어삼켰다.
제0 추종자(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