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37화 (337/612)

< 깨어난 거신(2) >

으득-

오르엠이 입술을 곱씹었다. 사실 그도 카르가스가 패배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긴 했었다.

다만 직접 상대하기 꺼림칙하여 피한 것일 뿐.

거신이 작동할 때까지만 시간을 끌면 되는데 그걸 버티지 못하고 당하다니.

다음 순간 알그하브의 외침이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짐이 카르가스를 쓰러트렸다! 전군! 돌파하라!”

힘들게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모든 티탄들의 사기를 단번에 최고조까지 끌어올리는 한 마디였다.

“와아아아아!”

티탄들은 함성을 지르며 보다 더 필사적으로 몸을 놀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티탄쪽으로 넘어간다.

이건 오르엠으로서는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크크크, 당장 안 가봐도 되겠나?”

케르트란이 비아냥거리자 오르엠이 들고 있던 황금의 검을 재빠르게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가더라도 처리하고 가려는 셈이었지만.

“공간부수기.”

케르트란이 정확히 타이밍을 맞춰 정권을 내질렀다.

바람과 마력이 공진작용을 일으키며 주먹 끝에 사각형 모양으로 된 여러 겹의 층이 만들어진다.

우우웅-

이윽고 그곳에서 발산되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충격파!

그 충격파는 정말 공간이라도 부술 듯이 장난이 아니었다.

“크으!”

멀리 밀려나 기회를 놓친 오르엠이 케르트란을 쏘아봤다.

케르트란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휘휘 젓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

허나, 오르엠은 더 이상 놈에게 신경을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멸살의 빛.”

오르엠의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그의 등 뒤로 10개의 빛의 줄기가 자리 잡았다.

9티어 신성 마법.

이것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짓밟는 광역 스킬이었다.

팔을 앞으로 내려뻗기 무섭게 알테라그가 위치한 장소를 덮치는 멸살의 빛!

“?!”

날아오는 스킬을 확인한 알테라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보통의 스킬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콰과과광!

초토화되는 일대.

흙먼지가 걷히며 현존하는 최강자, 알테라그와 오르엠의 시선이 교차했다.

파앗-

둘은 잠깐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알테라그가 권갑을 착용하고 있는 주먹을 내지르자, 오르엠이 황금검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반격까지.

“꿰뚫는 빛.”

“파쇄의 격.”

콰아앙-

감히 그 누구도 접근할 생각을 갖지 못했다. 괜히 도와주겠다고 어설프게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휩쓸려 죽기 마련이었다.

“후후후.”

케르트란은 그런 둘을 보면서 웃었다.

“그래, 계속 싸워라 싸워.”

두 사람이 격렬한 전투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그에 대한 주위 감시는 빠르게 수그러져 가고 있었다.

눈치를 슬그머니 살핀 그가 이내 수하들과 함께 구석진 장소로 향했다.

드르륵-

벽의 특정 부분을 정확히 누르자 특수한 장치가 나타난다.

행여나 누가 있을까 주위를 쓱 둘러본 케르트란이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드러나는 비밀통로.

케르트란은 부하와 함께 얼른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문이 닫힌다.

그렇게 케르트란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을 때였다.

두 명의 인물이 바위 뒤에서 쓱 나타났다.

“역시 뭔가가 있었군.”

지금까지 몸을 사리며 출구를 찾고 있던 스토크와 유세현이었다. 만원경에서 눈을 뗀 두 인물이 케르트란이 서있던 장소를 향해 다가갔다.

“놈이 하는 건 잘 봐뒀겠지?”

“물론.”

이곳에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무조건 뒤따를 생각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의견을 조율했다.

“너무 많이 뒤따르면 케르트란에게 100% 발각된다. 그러니 10명 정도만 데려와라 스토크.”

“그러도록 하지.”

“좋아. 그럼 약 5분 뒤에 내부에서 보도록 하지.”

파앗-

두 사람이 재빠르게 장소에서 흩어졌다.

* * *

비밀통로의 길이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게다가 감춰져 있는 장소라 그런지 마땅한 함정도 없었다.

케르트란이 장애물에 직면한 건 통로를 벗어난 뒤였다.

나아가던 케르트란의 발걸음이 뚝 멈춘다.

이내 지그시 혀를 차는 케르트란.

“쯧, 왜 안보이나 했더니...”

그의 앞으로는 미카엘과 마찬가지로 4쌍의 날개를 지닌 남성형 천사가 서 있었다.

찢겨진 소매로 들어난 투박한 근육이 유난히 눈에 띈다.

마치 마초남 이태광을 보고 있는 느낌.

대천사 라파엘,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

“......”

케르트란이 살며시 망치를 치켜세우는 것으로 대신 답하자,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하기 싫다는 건가...뭐, 상관없다. 어차피 이 이상은 못 나아갈 테니.”

명백한 도발.

“오르엠의 부하 따위가...감히...”

케르트란과 그의 수하들이 천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웅!

일대를 뒤흔드는 일격이 난무한다. 전투는 빠르게 격렬함을 더해갔다.

덕분에 두 종족은 누군가가 그곳을 은밀히 지나치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후...어찌어찌 들어오긴 했네요. 선배.”

김주희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유세현이 주변마력을 살폈다.

‘대천사는 분명 4명이라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등장한 대천사는 아직 3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있다면 이곳에 있을 터인데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신성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없는 건가? 왜지?’

아무쪼록 이건 좋은 일이었다.

비로소 포복자세를 풀고 조심히 허리를 핀 유세현.

자연스레 주위 풍경이 비친다.

지름 1000m를 가볍게 웃도는 거대한 원형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그 중앙에는 높은 탑이 세워져있었는데 그 탑 위에는 원형으로 된 보랏빛 구슬이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환경.

그 중에서도 제일 눈에 밟힌 것은 구덩이 속에 전개된 마법진의 테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이었다.

붉은 선은 땅을 매개체로 움직이는데, 탑의 외벽을 타고 구슬을 향해 꿈틀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구슬의 색을 보니 아직 다다르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제 곧 다다른다.

‘으음...’

일행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저건 그 누가 봐도 거신의 봉인을 해제하는 술식이었다.

막아 볼 것인가. 아니면 출구를 찾을 것인가.

거신이 작동하면 티탄은 패배하지만 출구가 열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만약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보다 더 안전한 쪽에 배팅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거신은 깨어나면 끝이지만 출구는 제지한 후 찾아도 늦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적이 강했다면 망설였겠지만...작업병이라 그런지 다행이도 수준은 별로 높지 않다.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

“저지하자.”

딱 한마디 내뱉은 유세현이 구덩이 속으로 몸을 날렸다.

김주희를 포함한 3명이 곧바로 따라나서는 반면, 스토르 벤들은 경악했다.

크로마스들이 강하면 어쩌려고 저 지랄을 한단 말인가!

허나, 스토르 벤중에서도 스토크만큼은 무척 침착했다.

유세현이란 남자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무모한 짓거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유세현을 발견한 크로마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네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서걱-

그것이 놈의 최후의 말이었다.

스토크의 눈이 맹렬한 빛을 발산했다.

역시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정확히 적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지.

단순한 우연?

감?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진 못할 터.

‘상대방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군. 그것도 꽤나 상세하게 파악이 가능한...’

이건 그에게는 좋은 수확이었다.

“스토크...어떻게 할 생각이냐? 우린 널 믿고 이곳까지 따라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네가 정해라.”

“일단은 돕도록 하죠.”

스토르 벤들도 가세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크로마스.

구덩이의 정중앙에서 이를 흘깃 흘겨본 작업병 팀장, 메로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부만 막고 나머지는 작업에 힘써라!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다!”

“하, 하지만 적이 너무 강합니다! 다 같이 상대하지 않으면...”

서걱-

메로드는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소인족에게 줄줄이 썰려나가는 꼴이라니!

“정신을 더 집중해라! 술식을 더 빨리빨리 운용해!”

현재 진행 작업률은 99.23%.

정말로 조그만 더하면 거신이 기동된다. 그리고 기동되면 놈들은 끝이다.

이제 99.45%.

‘제발 눈치 채지 마라.’

메로드는 마음속으로 빌고 빌며 더욱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현재 맡고 있는 역할은 한 곳에 모인 에너지를 기둥으로 보내주는 다리로써 이 일의 핵심과 다름이 없었다.

즉, 그가 당하면 더 이상 연결이 되지 않아 아무리 많은 에너지를 보내와도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제발...제발!’

허나, 유세현은 눈치가 무지 빠른 사람이었다.

‘저놈 주위에만 병력이 더 많다. 왜지? 모두 동일하게 작업을 하는 게 아닌...설마?’

주위에 있던 크로마스를 베어나가던 유세현의 방향이 메로드를 향해 꺾였다.

더욱 가속하여 나아가는 유세현.

메로드는 기겁을 했다.

어느새 유세현은 메로드의 바로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검이 날아온다.

메로드는 온몸을 날려 간신히 그것을 회피했다. 목숨이 위험에 처하면 기지가 발휘된다는데 실로 거구답지 않은 날렵함이었다.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작업은 멈추고 말았다.

‘젠장...”

주위에 있던 작업병들의 일부가 작업을 멈추고 달려들었다.

“메로드님! 빨리!”

허나.

촤자작-

10등분으로 잘리는 적.

유세현은 단숨에 끝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쉬이익-

쾅!

그의 앞으로 한 명의 티탄이 떨어졌다. 유세현도 잘 알고 있는 티탄, 감시역을 맡았던 카윈이었다.

“거기까지. 움직이면 죽인다.”

그건 메로드에게 한 말이 아닌 유세현에게 한 말이었다.

카윈의 등 뒤에 위치해 있는 메로드를 흘깃 살핀 유세현이 차분히 말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보는 그대로다. 거신을 되살릴 것이다. 야! 너! 빨리 작업을 개시해라.”

카윈의 말에 메로드가 벙찐 표정이 되었다.

왜 적이 도와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

반면, 유세현은 놈이 그러는 이유를 단번에 파악했다.

‘거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나보군.’

그것 말고는 되살릴 이유가 없으니까.

“야! 빨리 시작안하냐?”

“......”

메로드가 잽싸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빨리 움직인 건 유세현이었다.

거신은 티탄이 가져선 안 된다.

아니, 정확히는 케르트란.

거신이 놈에 손에 넘어가는 순간 어떻게 될지 너무도 뻔히 보인다.

카윈이 혀를 찼다.

“하! 지금까지 적당히 맞춰줬더니 벌레자식이 제 분수도 모르고...감히 네까짓 게 내 말을 무시...”

하지만 그는 하던 말을 끝까지 다 내뱉을 수 없었다.

‘거신을 제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이제 와서 놓칠 수는 없다. 들킬 가능성이 있지만...하는 수 없지.’

유세현이 주위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정밀하게 컨트롤하여 카윈과 메로드에게만 암흑투기를 쏘았다.

깜짝 놀라 동그랗게 변하는 카윈의 눈.

“이, 이건?”

동시에 케르트란을 상대하던 라파엘의 눈도, 타르탄을 향해 거칠게 맹공을 퍼붓고 있던 미카엘과 우리엘의 눈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르엠의 눈도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마기?”

어둠의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

허나, 그들이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정말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착각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방금 전의 그건 대체...”

그때였다.

쿠구구궁-

대지가 요동쳤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깨달은 두 종족의 희비가 교차했다.

< 깨어난 거신(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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