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난 거신(1) >
“그게 뭐지?”
유세현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스토크가 다가와 물었다.
비전거신의 위험성만 적혀있을 뿐 약점같이 중요한 정보가 저술되어 있는 건 아니었기에 유세현은 신뢰도 쌓을 겸 별다른 말없이 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뭔가 하고 살피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가는 스토크.
“태워버려도 괜찮겠나? 저놈에게는 이런 자그마한 정보도 주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마음대로 해라.”
화르륵-
허락이 끝나기 무섭게 편지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손을 탁탁 턴 스토크가 근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싸움의 관건은 역시 비전거신의 부활을 저지 하냐 저지하지 못하냐군.”
“그렇지. 거신의 부활을 막으면 승산은 50 대 50. 못 막으면 티탄은...”
패배할 것이다.
과거처럼.
크로마스와 천사에게 밀려서.
그렇게 되면 이번에도 파편조각은 여지없이 오르엠이라는 놈이 가지게 되겠지.
유세현은 자신이 알테라그에게 넘긴 아이템을 떠올렸다.
기억의 명옥.
등급이 에픽 SSS 랭크이니 만큼 분명 중요한 아이템일 것이 분명하지만, 아무리 봐도 비전거신의 기동에 필수적인 아이템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기동에 필요한 필수 아이템을 다 모으지 못했다면 크로마스와 천족은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
그러니.
‘제시간에 못 맞추면 기동될 가능성이 높다.’
케르트란이 뭔가 비장의 수단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불확정하기에 변수로 잡을 수는 없었다.
“후우...”
유세현은 심호흡을 했다.
현재 그의 목표는 여전히 하나였다.
탈출.
어떻게든 기회를 엿봐 출구를 찾는다.
곧 여섯 갈래의 길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 * *
통로에 달아놓은 감시장치로 티탄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오르엠이 혀를 지긋이 찼다.
‘지리를 파악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건가.’
현재 진행률은 94%.
아슬아슬했다.
아니, 이제 무조건 한 번은 싸워야한다.
오르엠은 크로마스들의 수장, 카르가스가 있는 제어실을 찾았다. 카르가스는 티탄을 웃도는 덩치에 뿔이 4개나 달려있는 게 큰 특징이었다.
“카르가스, 놈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지그시 말하자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카르가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벌써??”
반말.
오르엠은 이래서 그와 잘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야만족답게 기본이 안 되어있었으니까.
그가 크로마스의 편을 들기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접근이 용의하기 때문이었다.
티탄은 당최 자존심이 너무 높아 도움을 순순히 받지 않는다.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데, 당시에는 알그하브도 없던 지라 대등한 입장에 있을 수 있는 크로마스쪽이 훨씬 나았다.
“어디까지 도착했지?”
“2-A통로를 통과했다. 곧 1-D지점에 도착하게 될 거다.”
“후우, 결국 붙어야 된다는 소리군...젠장! 놈들이 오기전게 끝마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르엠! 네 병사는 뭘 한건지? 일주일 정도는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떵떵거리지 않았나!”
카르가스의 맹비난.
신으로서 우러러 받들어지기만 했던 오르엠의 안면근육과 입가가 수치심에 격렬하게 씰룩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다 뒤집어 엎은 뒤 목을 따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기에 그는 참고 또 참았다.
“착오가 있었다. 알그하브가 예상보다도 더 강했다.”
“큭! 빌어먹을 알그하브! 놈만 없었어도...”
입술을 곱씹은 카르가스가 칼자국이 움푹 패여 있는 눈꺼풀을 감싸 쥐었다.
이전 알그하브에게 당한 부상이었는데 다행히 시력을 잃진 않았지만 후유증은 계속 남아 그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르가스가 부하를 향해 외쳤다.
“작업병들을 제외한 전군을 집합시켜라!”
티탄족과 크로마스의 전쟁.
그 끝을 고해오는 외침이었다.
* * *
저벅. 저벅.
알테라그의 병력이 통로를 나서기 무섭게 성대한 환영식이 펼쳐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각종스킬!
콰과광!
위력은 상당했으나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덕에 별 피해는 없었다.
유세현은 잽싸게 주위를 살폈다.
하늘을 수놓고 있는 흰 날개.
지상에서는 크로마스들이 각종 병장기를 치켜세우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왔나! 알그하브!”
그때 제일 선두에 나와 있던 크로마스가 외쳤다. 카르가스였다.
알테라그와 카르가스의 시선이 교차하며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이리저리 튄다.
“오랜만이군, 카르가스.”
알테라그가 너스레 인사를 건네자 카르가스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저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다니.
허세가 분명하다고는 하나 그가 원하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꽤나 여유로우시군, 알그하브.”
“물론 알지.”
“......”
카르가스의 이가 으득 갈린다. 알테라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카르가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어째서 공존을 포기하고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카르가스는 그때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알테라그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을지.
그는 진심을 담아 비열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강하지만 하지 역시 머리는 우둔하기 짝이 없구나 알그하브! 왜 그러냐고? 당연한거 아닌가! 재미있으니까다!”
알테라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는 죽이는 게 즐겁다! 빼앗는 것이 너무 즐거워 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당당하던 놈들이 발끝을 붙잡고 애원하는 꼴이란! 알그하브! 네놈을 죽이고 네 나라를 침공하겠다! 수컷은 가축으로 부릴 것이며 여자
는 병사들에게 던져줄 것이다!”
“......”
“자아 덤벼봐라 알그하브! 여기가 너의 무덤이다!”
카르가스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도발했다.
허나 알테라그는 분노에 차 바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사실 그는 크로마스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조사를 통해 지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티탄이 아니 꼬았던 것일 뿐이었다.
상대를 배신하며 마구잡이식으로 살아가는 크로마스와 달리, 티탄은 집단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가니까.
다툼 없이는, 먹잇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종족.
어찌 보면 그들은 정말 불쌍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티탄의 대적자라고 불리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수가 점차 줄어들 것이고 언젠가는 분명 멸족하게 되리라.
콰앙-
그때 우측과 좌측 상부에서 폭음이 울렸다.
그곳에는 타르탄과 공적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승격 된 케르트란의 부대가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서 등장하는 수많은 티탄들.
“칫!”
카르가스가 혀를 찼다.
현재 그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소는 메인 동력부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어떤 통로를 거친다 하더라도 동력부가 목적지라면 결국에는 이곳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해올 줄 알고 일부러 도발을 한 것인데.
알테라그가 손목을 치켜세우자 휘하 장군들이 명령을 내릴 준비를 갖췄다.
카르가스도 팔을 휘저어 부대를 통솔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두 종족의 대표자가 동시에 외쳤다.
“고지가 눈앞에 있다! 놈들을 뚫고 동력부를 장악하라!”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이 장소를 놈들의 무덤으로 뒤바꿔라!”
“우와아아아아!”
두 종족의 함성이 일대를 가득 메우며 온갖 스킬들이 난무한다.
결전을 알리는 봉화에 불이 붙은 순간이었다.
* * *
콰앙!
콰과과광!
지금의 전투는 앞선 전투와는 다른 규모의 격전이었다.
중앙에서 알테라그와 격돌하고 있는 카르가스.
콰앙!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파공성이 퍼지고 주위로는 흙먼지가 흩날린다.
치지직-
밀린 것은 카르가스였다.
“크윽! 제기랄!”
카르가스는 크로마스의 수장답게 무척 강했지만, 알테라그보다는 약했다.
눈앞에 병사를 베어 넘긴 케르트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간다.
알테라그.
그는 정말 어마어마한 변수였다.
그리고 타르탄.
알테라그가 역사상 가장 강한 왕이었었다면, 타르탄은 역사상 가장 많은 크로마스를 처리한 인물이었다.
비보를 만들어낼 힘을 지니지 못해, 역사서에 저술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케르트란의 귀에까지 닿을 정도로 말이다.
“죽어라! 쓰레기들아!”
타르탄의 신의 철퇴 앞에서 힘없이 분쇄되어 쓰러지는 3명의 크로마스.
케르트란은 혼란을 틈타 동력부로 잠입할 생각을 가졌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길은 한 개였지만 사실 이곳에는 동력부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통로가 한 개 더 존재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순식간에 셋을 쓰러트린 그가 슬쩍 눈치를 살핀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으로 황금빛의 날개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날아들었다.
“...오르엠.”
케르트란이 중얼거리자 오르엠의 옆에 있던 우리엘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네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존함이 아니다. 말을 높여라.”
케르트란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에게 있어서 천족은 강한 힘을 제외하고도 하나같이 쳐 죽이고 싶은 재수 없는 놈들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 지랄을 떨다니!
“분수도 모른 채 대들다가 날개가 찢긴 똥파리가 말이 많구나!”
“뭐라고? 네가 감히!!”
우리엘이 달려드는 걸 오르엠이 오른팔을 들어 막았다.
“우리엘, 지금의 너의 상태로는 1:1로 놈을 이길 수 없다. 너는 가서 미카엘을 도와주거라. 이놈은 내가 직접 상대하도록 하지.”
우리엘은 치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허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우리엘이 저편으로 날아갔다.
케르트란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하필이면 제일 상대하기 싫은 놈을 상대해야 되다니.
‘어떻게든 놈을 나에게서 떨어트려야 된다.’
후웅-
모래폭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오르엠의 눈이 찡긋 거린 순간.
“죽어라 황금똥파리!”
케르트란의 거대망치에서 터져 나온 일격이 주위로 뻗어나갔다.
* * *
쿠웅-
케르트란의 거구가 벽에 처박혔다. 케르트란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푸념을 터트렸다.
“젠장...비보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제 3유적, 언더월드의 배경은 티탄족의 과거세계다. 그렇기에 대체적으로 티탄족에게는 모든 것이 유리했다.
같은 티탄족에게 공격을 받지 않는데다가 군에 합류하여 수월하게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점도 분명 존재했다.
이 세계에서는 케르트란이 지니고 있는 신의 철퇴와 태양의 왕관을 착용할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 시대가 맞물려 아이템이 중복해서 존재하는데, 과거가 우선시되기 때문이었다.
아무쪼록 비보 없이도 강한 그였지만, 오르엠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케르트란님!”
그를 구출하기 위해 주위에 있던 10명의 부하들이 달려들었다.
오르엠이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그 어떤 것보다 찬란한 황금빛의 광명이 스쳐지나간다.
촤자작-
“크아아악!”
전부 강자들이었지만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중상을 입고 허우적거리는 티탄들.
오르엠의 무력은 가히 신이라 불리 울 수 있는 무력이었다.
“케르트란. 비보를 사용하지 못하니 생각보다 별거 아니로구나. 종족의 왕이라 일컫기엔 많이 부족한 실력이다.”
오르엠이 거만하게 말했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었다.
“크크크! 그렇게 생각하나?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로 널 상대하는 건 나로서도 무척 버겁군.”
“......”
“하지만 너도 착각하면 안 되지 오르엠. 비록 내가 티탄의 왕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아니다. 현재의 왕은...”
슈우욱-
콰아아아앙-
상상할 수 없는 폭음에 오르엠의 고개가 근원지를 향해 자동으로 돌아갔다.
이내 움찔거리는 눈가.
“크으으...알그하브...”
그곳에는 카르가스가 엉망진창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케르트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크크크,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군. 애초에 네가 상대해야 됐었던 자는 내가 아니다.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나? 자칭 신?”
< 깨어난 거신(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