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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338화 (338/612)

< 승자와 패자(1) >

뚝-뚝-

유세현이 쥐고 있는 루베르크의 검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바로 옆에는 카윈가 메로드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유세현의 시선은 전혀 다른 장소를 향해 있었다.

찬란한 보랏빛을 내뿜고 있는 탑 위의 수정구슬.

막지 못했다.

한 끗 차이였다고는 하나 결국 제지에 실패한 것이다.

“크으윽...네, 네놈...대체 정체가...”

푹-

무자비한 검이 카윈의 미간을 관통한다.

“크아아악!”

티탄의 커다란 체구에 비하자면 루베르크의 검신은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은 편에 속했기에 이번에도 절명하진 않았다.

허나.

푹-

푹-

푹-

검신으로 뇌를 비집으며 몇 번이고 반복해 찌르자 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상당히 높은 순도의 코인이 육체 내부로 흡수되었지만 유세현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위이잉-

탑의 외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던 붉은 선들이 공간 전체로 뻗어나가며 주위를 새빨갛게 물들인다.

유세현은 재빨리 카윈의 몸을 뒤졌다.

행여나 거신 컨트롤러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였는데, 아쉽게도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지이잉-

마법진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내부에 자리 잡고 있던 수많은 기하학적 문양들이 허공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시스템이 부팅됩니다.]

[모델명 M-001RB. 정식명칭, 엘리아크.]

쿠구구구-

트드득.

울림과 함께 마법진에서 시작된 균열이 땅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아니 땅뿐만이 아니다.

벽과 천장, 모든 것이 이등분되어 벌어지기 시작한다.

탑이 붕괴되자 지상으로 떨어진 보랏빛 수정구슬이 갈라진 틈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상상도 하지 못할 격한 흔들림 속에서 애써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김주희가 외쳤다.

“선배님!”

“출구를 찾아!”

“예!”

이제 남은 것은 플랜 B뿐이었다.

탈출, 무조건 탈출해야 된다.

타다닥-

4명은 출구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급히 돌아다녔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비치는 것이라고는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지면으로 낙하하고 있는 암석밖에 없었다.

‘젠장...이곳에 출구는 없는 건가.’

천장이 열리자 하늘에서 쏟아진 빛이 내부를 보다 더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 순간, 갈라진 땅속에서 다섯 개의 기둥이 불쑥 솟아올랐다.

시선이 쏠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상황.

기둥들은 길이가 전부 제각기 달랐는데, 유세현이 딛고 땅을 향해 갑자기 뚝 꺾였다.

“?!”

다급하게 도약하여 자리에서 벗어난 유세현.

하늘에서 기둥을 내려다 본 그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기둥처럼 보였던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연이어서 툭 튀어나오는 반대쪽 팔.

땅을 붙잡은 거신이 얼굴부터 시작하여 그 존재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일먼저 보인 것은 머리에 돋아있는 두 개의 뿔.

거신은 이마에 박혀있는 눈동자를 포함해 도합 3개의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티탄족과 크로마스의 특징을 합쳐놓은 외관이었다.

차이가 있다면...크기가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것.

허공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스템 부팅완료.]

[최고권한자를 탐색합니다.]

[최고권한자 에르켈, 확인불가. 수칙에 따라 서브권한자, 카르가스에게 권한이 임시적으로 인계 됩니다.]

[자율사고기능 가동.]

거신, 엘리아크가 눈을 번쩍 떴다.

엘리아크는 하늘을 뚫을 것 같은 몸을 곧바로 굽혀 바로 앞에 있는 유세현을 응시했다.

거대한 눈동자 속에 유세현 본인의 모습이 또렷이 비친다.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하필이면 제일먼저 눈에 띈 인물이 자신이라니!

한순간 몸을 움찔 거린 몸속의 마력은 단숨에 끌어 올렸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실력을 숨길 여유 따윈 없다.

‘천마광룡...’

그가 딱 무공을 발산하려던 순간이었다.

엘리아크가 그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굉장히 작은 생명체이시군요. 혹시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이해 할 수 있으신가요?]

“......”

가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에르켈이 남겨놓았던 편지의 내용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 맞아. 엘리아크는 인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곧바로 공격 해오지 않은 것인가?

유세현은 슬그머니 검을 내렸다.

천마광룡참을 사용해 놈을 일격에 보낼 확신이 있었다면 쏘았을 테지만 이 거신은 시나리오의 메인.

모종의 수가 존재할 확률이 무척 높았기 때문이다.

굳이 적대하지 않는데 지금 자신이 먼저 놈을 건드릴 필요는 없는 것.

“예, 이해합니다.”

차분히 대답하자 티탄과 천사들의 전투를 흘깃 살핀 엘리아크가 입술을 뗐다.

[말이 안통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뭐 한 가지만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예, 그러시죠.”

[제가 이곳에 얼마나 잠들어 있었나요?]

너무 뜬금없는 질문.

“정확히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오래 잠들어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몇 천 년 정도 말인가요?]

“그 이상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군요.]

엘리아크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대체 엘리아크는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였다.

케르트란과 맞붙고 있던 라파엘이 엘리아크의 바로 앞으로 날아와 외쳤다.

“거신! 나와 대적하고 있는 종족을 모조리 죽여라! 이건 카르가스의 직접적인 명령이다!”

그 순간 잽싸게 뒤따른 케르트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 또한 품에서 병기제어장치를 꺼낸 뒤 외쳤다.

“이 아이템을 봐라! 지금부터는 내말에 따라라!!”

유세현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엘리아크가 둘 중 누구의 말을 따르던 유세현에게는 모두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는 권한자 본인의 직접적인 명령만 수행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라파엘을 향해 사무적으로 답한 엘리아크가 연이어서 케르트란에게도 답변을 내놓았다.

[당신 또한 권한이 없습니다. 들고 계신 제어장치를 동력부에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뭐라고? 지금 이 장소가 동력부 아닌가!”

[봉인이 해제된 것을 기점으로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현 동력부 위치는 제 가슴에 박혀있는 구슬입니다.]

둘 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라파엘이 다시 한 번 외쳤다.

“그럼 지금 당장 네 주인 카르가스에게 가서 임무를 전해 받아라! 바로 이 앞에 있다!”

엘리아크의 시선이 반으로 갈라진 저편으로 향했다.

딱 봐도 가기 싫은 표정이었는데 엘리아크는 이내 발걸음을 뗐다.

쿵! 쿵! 쿵!

딱 10보.

엘리아크가 카르가스가 있는 장소에 도달하기까지 걸은 횟수였다.

오르엠의 입꼬리가 귀에 가 걸리는 반면, 알테라그는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거신을 바라봤다.

이 무슨 위용이란 말인가.

“카르가스! 명령을 내려라!! 놈은 네 명령에만 따른다!”

라파엘의 외침에 비틀거리며 일어선 카르가스가 눈을 번뜩였다.

“거신! 나에게 대항하는 모든 적을 멸절시켜라!!”

[서브권한자 카르가스, 본인확인완료. 명령을 이행합니다.]

엘리아크의 눈에서 뻗어 나온 빛이 일대를 스캔했다.

피아를 식별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크로마스가 김주희를 적대하고 있었기에 일행은 적으로 구분이 되었다.

엘리아크가 손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그 끝으로 모이는 어마어마한 마력.

[섬멸 프로그램 가동. 자율사고기능 정지.]

그 말을 끝으로 수십 갈래로 갈라진 마력의 폭탄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콰과과광!

“크아악!”

많은 병력을 동시에 노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명중률!

루시아가 다급히 방벽을 쳤다.

펑!

쿠구궁!

“크윽!”

“루시아씨!”

“괘, 괜찮아요!”

위력 또한 분산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쩌적-

쩌저적-

폭발 때문일까? 아니면 거신과 주인이 만났기 때문일까?

하늘에 균열이 생겼다.

이내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파편조각.

엘리아크가 다시 한 번 마력 폭탄을 쏘아낸 순간이었다.

콰앙!

쨍그랑!

공간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며 붕괴되었다.

환경이 바뀐다.

주위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던 햇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며 짙은 어둠이 그들의 눈앞에 드리웠다.

잽싸게 주위를 살핀 유세현은 이동된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언더월드, 던전의 입구였던 호수.

‘돌아왔다!’

“선배님!”

“숲으로 뛰어!”

일행은 온힘을 다해 거목을 향해 달려 나갔다. 유세현은 이대로 이곳을 이탈할 생각이었다.

허나.

팅!

질주하던 유세현의 몸은 얼마안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가로막혀 뒤로 튕겨져 나갔다.

“큭!”

돌파하기위해 다급히 무기를 휘둘렀지만 장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결판이 날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선배님!”

“큭!”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이제 살아남을 방도는 하나뿐이었다.

‘이 싸움을 이겨야 된다.’

그것도 자신들이 메인이 되어야했다.

케르트란이 이겨도, 오르엠이 이겨서도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유세현은 순수한 힘으로는 놈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놈들이 치고 박고 싸우다가 힘이 다하면 이야기야 다르겠지만...

‘거신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러 가지 계책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제라도 구울을 일으켜야 될까?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천족은 마족의 대적자다.

신성력은 구울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재로 되돌린다.

적이 자신을 건들 수 없는, 확실한 상황일 때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되려 눈에 띄어 목숨만 위태해지겠지.

결국 시도해볼 법한 것은 모두의 무공과 자신의 천마광룡참을 이용해 필살의 일격을 노려보는 것인데...이것은 거신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역시 이기기 위해서는 거신을 탈취해야 된다.

위기에 직면한 유세현의 사고가 더욱 빠르게 회전한다.

내면에 가라앉을수록 외부 시간의 흐름은 점차 느려졌다.

유세현은 짧은 시간동안 몇 번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거신을 어떻게 해야 탈취할 수 있을지.

‘케르트란이 탈취 아이템을 지니고 있지만...지금 당장 그걸 빼앗는 건 사실상 무리다.’

하지만 그것이외에 다른 방도가 있을까?

없다.

도무지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유세현은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자신이 얻은 아이템도 거신을 탈취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참 좋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가 얻은 것은 별 쓸모도 없는 기억 왜곡 장치였다.

그건 대체 어디다가 사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

‘...어?’

거기까지 생각한 유세현은 머리를 망치로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현재 그의 뇌리 속에는 지금까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편지의 내용이 불현듯 떠오른 상태였다.

‘맞아...에르켈이란 자는 거신을 분명 자식처럼 생각했었어...’

편지에 적혀 있던 엘리아크에 대한 에르켈의 애정.

그리고 깨어난 엘리아크의 영문 모를 질문.

엘리아크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왜 궁금해 했던 것일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자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일까?

하나가 이해되자 이해되지 않았던 나머지가 모두 다 이해가 되었다.

유세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내뱉었다.

정답은 바로 가까이에 있었는데. 출구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강호는 거성을 빠져나온 뒤 반성을 했었다.

너무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었다고.

이번에는 유세현이 반성할 차례였다.

그는 정신 차리자는 의미에서 스스로의 뺨을 힘껏 쳤다.

욱신거리지만 개운한 느낌.

“서, 선배님?”

깜짝 놀라 소리친 김주희였지만 유세현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의 안색은 빠르게 밝아져갔다.

그녀의 눈앞에는 언제나 듬직했던 평상시의 유세현이 있었다.

< 승자와 패자(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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