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병기(4) >
“죄송합니다. 티탄의 진군을 늦추지 못했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미카엘이 고개 숙여 사죄를 표하자 나머지 천사들이 이를 따라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앞에는 금빛의 장발이 돋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름조차도 감히 함부로 일컬을 수 없는 인물.
천족의 신, 오르엠.
그는 겉으로는 굉장히 겸허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가마솥에 담긴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놈 때문인가?”
“예.”
미카엘이 답하자 현 마음을 대변하듯 오르엠의 눈가가 씰룩였다.
그도 그걸 것이 본래라면 쉽게 쉽게 진행 되었을 일이었다.
마족과 드래곤이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이상 지금쯤 모든 게 끝나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타르탄이라는 티탄과 케르트란의 병력들이 방해를 해왔지만, 그럼에도 중간까지는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갑자기 놈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티탄족의 역대 왕이라고 불리던 자, 알그하브.
알그하브는 정말 말 그대로 뜬금없이 나타났다.
타르탄에게 폐위되었을 왕이 왜 나타난 것이지 황급히 조사를 했지만 이유도 영문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쪼록 놈은 최전방에서 전장을 휩쓸었다.
일반적인 크로마스나 천사들은 놈이 철퇴를 휘두르면 픽픽 쓰러져나가며 도무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번은 사대천사 우리엘과 접전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엘은 4쌍의 날개 중 2쌍의 날개가 찢겨졌다.
현 사대천사 중 가장 실력이 출중하고 강한 화력을 지닌 미카엘이라면 승리하진 못해도 버틸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카엘조차도 상대가 안 되다니...’
으드득-
‘뭐 그딴 티탄이 다 있는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한다.
그러나 오르엠은 절대 자신이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신이란 만물이 우러러보는 존재.
그는 하등생물을 직접 처리하는 건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오르엠이 직접 나서야된다는 건 총력전을 벌여야 된다는 뜻인데 자칫 돌이길 수 없는 막심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천사들을 보충 할 수 있었던 알테리아 대륙 시절이었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게다가 이제 모든 천사가 오르엠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창조자가 세계 곳곳에 남겨 놓은 메시지를 읽고 떠난 천사도, 오르엠의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겨 반기를 든 천사도 존재한다.
반기를 든 천사의 대표적인 예는 과거의 사대천사, 루시펠이었다.
‘그깟 중급 천사 한 명 때문에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오르엠이 지긋이 혀를 찬 뒤 이내 시선을 돌려 우리엘의 전령, 베라엘을 바라봤다.
“작업은 얼마나 진척이 되었지?”
“이제 약 50% 정도 진행됐습니다. 거신의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봉인은 해제했고 이젠 동체의 주기관의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하려는 중입니다.”
“50%라고?”
오르엠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날이 섰다.
계획대로라면 최소 65%까지는 도달해 있어야 될 작업이었다.
“그...그게 예상했던 것보다 준비 작업이 더 복잡한 모양입니다.”
베라엘이 얼른 변명했다.
작업은 크로마스가 하는데 욕은 자신이 얻어 처먹어서 그런지 새삼 억울한 어조였는데 겉으로 표가 나지는 않았다.
오르엠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최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신에게도 악재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놈들이 크로마스의 병력을 뚫고 이곳에 다다르는 것이 빠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고대병기를 깨우는 것이 빠를 것인가.
이제는 오르엠도 예상이 불가능 했다.
* * *
“크으으! 죽어라!”
크로마스의 양쪽 뿔에서 뿜어져 나온 수많은 화염이 알테라그가 위치한 장소를 휩쓸었다.
“큭! 처리했나?”
놈들은 내심 기대한 표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알테라그는 그 작은 생채기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적장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큭! 아무리 강하다지만 어떻게 이럴 수...”
놈은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했다.
퍼억-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 부서진다.
일행과 스토르 벤 일부가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코인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카윈이 입맛을 쩝 다셨다.
본디 코인이란 건 스텟이 높고 낮고를 떠나 있으면 그냥 먹고 싶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저놈들 힘 스텟 만큼은 상당히 높아졌겠는데?’
이전에 일로 유세현과 제법 친해진 카윈이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갔다.
“상당히 잘 싸우는군.”
물론, 내뱉은 말 자체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카윈의 종합적인 스텟은 평범한 최상급 천사를 살짝 웃돌 정도로 정말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미카엘에게는 빌빌 거렸지만, 그가 보기에 일행은 아직도 여러 가지로 많이 허접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대체 어떻게 알그하브를 구한거지?’
정말 어떻게 구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케르트란의 말처럼 정말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문득 그렇게 생각한 카윈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설마...’
미카엘이 등장했을 때 일행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미카엘이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눈에 띄었다면 허무하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이들은 케르트란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위험한 놈이라는 뜻이 된다.
이전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이번엔 정신 차리고 제대로 관찰을 해볼 터인데...알그하브와 강한 휘하 병력 때문에 기회가 오지 않는다.
“훗. 너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유세현이 겸손하게 답했다.
허나 내뱉은 말과 달리 표정은 전혀 겸손하지 않았다. 되려 살짝 거만했다.
노림수였다.
이렇게 말과 상반되는 몸짓을 은연중에 보여주면 100이면 99는 마음속으로 상대를 비웃는다.
쥐뿔도 없는 게 허세 부린다고 말이다.
그리고 카윈도 이쪽 방면에서는 99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흐음...역시 그럴 리는 없나...’
* * *
쾅!
콰과광!
크로마스와 자질구레한 전투가 연달아 발생했다.
그중에는 히트 앤 런, 치고 빠지기를 하는 놈들도 있었다.
너무 대놓고 의중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일행들은 그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시간을 끌고 있군.”
알테라그의 말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속도를 좀 올려야겠다.”
“폐하!”
호위 기사가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적을 격파한 일행이 숲을 빠져나가자 벼랑 끝을 이어주고 있는 5개의 돌다리가 나타났다.
이곳을 건너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알테라그가 당연하다는 듯 선두에 섰다.
다리는 티탄의 몸무게를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렇게 알테라그가 완전히 건너고, 후발주자로 출발한 유세현 일행이 중간쯤 다다른 찰나였다.
콰아앙-
난데없이 발밑에서 울려 퍼지는 폭음!
트드득-
쿠구구구!
견고하던 돌벽이 무너지며 다리가 붕괴된다.
방금 전의 소음은 지지대 역할을 하던 기둥이 산산 조각나는 소리였다.
“크윽!”
아래로 떨어지는 일행.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크로마스를 본 카윈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놈들은 엄청 강하지는 않았지만 수가 많았다.
유세현의 힘 스텟이 많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다른 부과 스텟이 많이 부족한 이상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완벽하게 확신을 내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라!”
군세를 이끌고 있는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크로마스들이 일제히 낙하한 티탄과 유세현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도합 총 5마리의 적을 처리한 카윈이 슬쩍 유세현 일행이 있는 장소를 살폈다.
정말 고전하고 있는 모습.
그들은 뒤도 생각하지도 않고 사정없이 스킬을 퍼붓고 있었다.
“김주희 뒤!”
“으윽!”
“세현씨!”
말에서는 절박함까지 엿보인다.
이전 유세현에게 목숨을 빚진 카윈이지만 그는 일행을 구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죽어주면 베스트니까.
“폭풍의 검!”
루베르크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이 검이 되어 날아가 루시아의 뒤에 있던 적을 관통했다.
유니크 C랭크의 스킬로 천마혈사장이나 천마광룡참에 비해 훨씬 좋지 않아 사용하지 않고 있던 스킬을 운용한 것이었다.
이어서 이강호도 스킬을 발현했다.
“대지분쇄!”
물론 절대 장기 스킬은 아니었다.
화염이 특기인 자가 땅에 관한 마법을 사용하고, 물이 특기인 자가 번개를 날린다.
그렇게 얼마를 버텼을까.
그들에게도 기어코 위기가 찾아왔다.
카윈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죽어라!’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웅-
쾅!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알테라그가 주위를 순식간에 정리한 것.
“괜찮나 유세현.”
“괜찮다.”
“흠...시체술도 그렇고 이전에 비해 많이 약해졌군.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알테라그의 말에 유세현의 시선이 슬쩍 카윈에게 향했다.
사실 일행은 카윈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일부러 이 함정에 걸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으면 그간 쌓아놓은 친분이고 자시고 놈을 처리해야만 한다.
“......”
다행이도 카윈은 혹시라도 유세현이 도움을 청해 올까봐 상당히 멀리 자리 잡고 있었다.
유세현이 간략히 설명했다.
“너희들이 날파리라고 부르는 천족 때문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사용할 테니 그동안은 우리의 능력에 대해선 함구해줬으면 좋겠군.”
“그런 거라면 알았다.”
알테라그의 빠른 수긍.
위로 올라가자 신하들이 알테라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폐하! 이 병력만으로 이 이상 나아가는 건 무리입니다! 자칫 모든 게 어긋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느껴지시더라도 이쯤에서 대장군과 병력을 기다리셔야 됩니다!”
“...나도 더 이상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네. 이쯤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알테라그의 말마 따라 경계 및 휴식이 이루어졌다.
카윈은 그때 거의 반쯤 확신을 내린 상태였다.
‘정말로 별거 없는 놈들이다.’
다만 아직도 저런 실력으로 어떻게 알테라그를 도운 것인지, 그것이 걸렸다.
그때 유세현이 카윈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나?”
카윈은 마음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감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괜찮다. 너희들은?”
“알테라그 덕분에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성에서 그를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되는군.”
유세현이 살며시 운을 떼자 카윈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이렇게 되면 좀 더 상세히 물어봐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이야기라면 우리 티탄족 사이에서는 무척 유명하지. 하지만 그저 소인족이 왕을 구한 정도만 알지 정확한 내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괜찮다면 그 당시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줄 수 있겠나? 내심 궁금해 하는 티탄들이 무척 많다.”
“흐음...”
유세현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뭐, 그다지 떠들만한 일은 아니지만...마땅히 할 것도 없으니...”
유세현은 그 말과는 달리 정말 실컷 떠들었다.
성에 도착 한 것.
감옥에서 알테라그와 조우한 것.
그는 생동감을 위하여 성의 구조 등등 디테일 있게 주위환경까지 묘사했는데 그 와중 공략에 사용한 구울과 키메라는 은근슬쩍 동료로 둔갑시켜 말했다.
마지막으로 스토크와의 전투도중 타르탄이 등장해 함께 싸운 것, 알테라그가 힘을 되찾은 것까지 말하자 카윈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군...그렇게 된 거였어.’
카윈을 완전히 속인 순간이었다.
< 고대병기(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