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병기(3) >
여태까지 줄곧 실력을 숨긴 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작은 생명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니, 한 명 있긴 있다.
스토크.
일행을 상대해본 적이 있는 그만큼은 이강호의 이상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고 그를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나서다니...뭐가 있군.’
스토크는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이강호를 따라 앞으로 나섰다.
눈동자만 살짝 움직여 스토크를 살핀 이강호가 실소를 내뱉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그는 이내 스토크에게서 신경을 껐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은 눈치 챘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치지지직-
어느새 알테라그와 미카엘, 두 사람의 한 방 승부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절풍이 성약의 불꽃을 휘감는다.
설마 순수한 화력 싸움에서 밀릴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미카엘의 미간이 꿈틀 거렸다.
평소 기품을 중시하는 천사들의 턱도 추하게 떡 벌어졌다.
미카엘의 바로 뒤에 있던 최상급 천사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미, 미카엘님을 도와라!”
“......”
“어, 어서!”
“예...예!”
수많은 스킬이 발현된다.
티탄들도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폐하를 지켜라!”
콰아아앙-
무분별한 스킬난사에 의해 일대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공간이 무너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
알테라그가 철퇴를 높이 쳐들고 외쳤다.
“놈들을 처단하라!”
스스슥-
빠악-
난전이 시작되었다.
이강호는 그 틈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는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를 본 스토크는 잔뜩 당황하여 경악을 토해냈다.
“무슨!”
저곳은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천사들과 티탄들도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는 장소였다.
‘설마 화기가 수그러든 건가?’
스토크는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과 달리 불꽃은 그대로였다.
‘젠장...화기를 완화시켜주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나 보군.’
그리 생각하며 불길 속을 바라본 스토크는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치이이익-
숯검댕이처럼 변한 남자가 그 속에 있었다.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진액과 녹아내려 흘러내리는 살.
그리고 드러난 새하얀 뼈까지.
그 모든 것이 뚜렷이 보인다.
“미, 미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강호는 절뚝거리는 몸을 기어코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의문이 스토크의 머릿속을 강타한다.
그중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거지?’
그때였다.
휘익-
티탄의 일격을 맞고 날아온 천사가 불길이 치솟는 통로 속에 처박혔다.
0.01초.
“끄아아아!”
천사의 전신이 녹아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천사는 고통에 몸을 뒹굴었다.
당장 죽어야 정상인데도 죽지 않는다.
그 순간 스토크는 깨달았다.
이 화염은 대상자에게 죽음을 선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끄아아아 누가! 누가 좀!!”
불과 30m도 되지 않는 거리건만 천사는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출구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고통이 장난 아니라는 뜻이었다.
꿀꺽-
스토크의 목 너머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곳을 지나간다면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허나, 그는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알고 있으니 정신력으로 버티면 되지 않느냐?
그건 육체적 한계를 맞지 않아본 사람의 개소리에 불과하다.
신경 세포가 타들어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야 어찌어찌 가능하겠지만, 이 불길은 예사 불길이 아니다.
끝없이 비명을 지르던 천사는 어느새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 또한 저렇게 되는 것이다.
콰앙-
이번에는 티탄이 불지옥에 빠졌다.
놈은 천사보다 체구가 커 고작 10m정도만 땅을 기면 출구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결과는 우습게도 천사와 똑같았다.
고작 10m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스토크는 대충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길은 올곧게 쭉 뻗어 있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수 km는 될 것 같은 느낌.
도전할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는다.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길을 나아갈 생각을 한 것일까.
“젠장...”
입술을 곱씹은 스토크가 이내 불지옥에서 등을 돌렸다.
* * *
오장육부가 착즙기에 쥐어 짜이는 느낌이었다.
피부는 분쇄기에 갈리는 듯한 감각.
발이 무겁다.
뼈로만 걷고 있는 것 같다.
폐에 화기가 차올라 호흡곤란까지 왔지만, 이강호는 나아가는 발걸음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 보내준 과거, 감내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기만하고 욕보이는 것이었다.
화르륵-
나아 갈수록 그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불길은 더욱 강해졌지만 이강호는 굳건했다.
마침내 길고 긴 통로의 끝이 보였다.
쉬이익-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주홍빛의 불꽃이었다.
‘이건!’
아이템명: 아그니의 불꽃.
등급: 레전더리 [SSS Rank]
상세정보: 불의 신 아그니가 이 세계에 남겨놓은 단 하나의 불꽃입니다. 가슴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화염계열 스킬의 위력이 15% 상승합니다.
특정 장소의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1회 얻습니다.
‘알테라그의 추측이 맞았군.’
힘겹게 다가간 이강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꽃에 손을 갖다 대자, 따스하면서도 포근한 감각이 은은하게 퍼지며 닿은 손끝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신에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슈우욱-
가슴속으로 흡수되는 불꽃.
이강호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심장의 박동과 함께 그 속에서 퍼져 나오는 화기가 세포를 타고 뚜렷이 느껴진다.
시험 삼아 스킬을 운용하자 붉은빛과 주홍빛이 반반 섞인 불꽃이 그의 검지손가락 위로 나타났다.
이강호의 입이 씰룩였다.
불꽃을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미카엘이 얻어야 될 힘을 가로챘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강호는 그답지 않게 당장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바보같이 정말 실천하지는 않았다.
‘돌아가 볼까.’
이강호가 몸을 돌린 순간 그의 앞으로 해의 문양이 박혀져 있는 문, 탈출구가 나타났다.
“응? 이게 왜...설마?”
쿠구구구!
거친 전투에도 견고함을 자랑하며 끄떡도 하지 않던 일대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 * *
“큭! 갑자기 이게 뭔...”
유세현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갑자기 땅이 푹 꺼졌다.
덕분에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카엘과 알테라그를 포함하여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휘말렸다.
“아퀼라!”
“예!”
다급히 날개를 펼친 아퀼라가 루시아를, 천마군림보를 사용한 유세현이 김주희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들은 그 즉시 위로 올라가려 했다.
허나.
“군주시어! 저번과 똑같은 공간인 것 같습니다!”
“칫.”
함정에 걸렸을 때처럼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영문 모를 장소로 이동되었던 이전과 달리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산이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섬이었다.
“알테라그에게 붙어!!”
“예!”
그들은 가장 외곽방향으로 떨어졌는데 지면에 거의 다다르자 속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내 사뿐히 착지하는 병력들.
곧바로 대치가 재개되었다.
티탄들은 천사를 포함해 주위 경계에도 무척 신경 썼지만, 천사는 조금 달랐다.
“미카엘님...여기는...”
“...퇴각한다.”
미카엘의 명령에 천사들이 슬며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유세현은 이대로 놈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1도 없었다. 알테라그를 이용해 여기서 제거한다.
“알테라그! 놈이 도망...”
“알고 있다.”
쉬익-
알테라그도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빛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콰앙!
간신히 몸을 돌려 철퇴를 방어해낸 미카엘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내 입술을 곱씹은 그가 품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유세현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카드.
천족이 언더월드에서 사용하기 위해 이종족들을 학살해 가며 얻은 아이템.
‘이런! 설마?’
“아깝지만...어쩔 수 없지...”
파앗-
카드에서 맹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이 완전히 수그러들었을 때는 천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 * *
이곳이 과연 어디일까?
그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졌다.
알테라그의 부하들은 그간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얼마안가 이 장소에 대한 답을 내렸다.
“이곳은 저희가 향하려 했던 최종목적지, 고대병기가 묻혀있는 장소가 틀림없습니다. 산 최정상에 핵심 기관으로 진입할 수 있는 동굴이 있을 겁니다.”
“흠...운 좋게 걸려든 건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원래부터 거의 근처에 다다라 있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껴들어 좀 더 빠르게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 변수라 함은?”
“폐하와 놈이 벌인 전투가 아닐까 합니다.”
“흠...확실히...그럼 타르탄과 그 외의 병력들이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이라 예상이 되는가.”
“일주일이면 될 겁니다.”
“일주일이라...”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알테라그가 말했다.
“먼저 출발하도록 하지.”
“폐하!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놈들의 표정을 보았다면 자네도 알거라고 생각한다. 놈들은 이 장소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우리는 앞지르는 것에 실패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응해야 되지 않겠나? 신중하게 움직이
면 된다. 병력들을 정렬시켜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약 100명에 달하는 병력들이 줄지어 이동을 개시했다.
유세현은 뒤따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래 자신들은 원하는 것, 불꽃을 발견하게 되면 슬쩍 내뺄 생각이었다. 또한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이탈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길을 찾는 데는 무척 오래 걸렸지만, 길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이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티탄을 따라 출구가 있는 장소까지 끝가지 나아가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이제라도 이탈하여 새로운 출구를 찾아보는 것.
어딘가에 짱박혀 던전이 클리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세 번째 방법도 존재하긴 했지만, 과거 공간이 완전 붕괴된 사례가 있었다는 걸 고려했을 때 상당히 위험한 도박수였다.
“넌,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김주희에게 묻자 심히 고려한 그녀가 입 열어 말했다.
“흐음, 마음 같아서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지만...솔직히 말하자면 격리된 이상 이곳에 다른 탈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선배. 그리고 행여나 있다고 해도 시간 안에 찾아낼 수 있을지...강호선배와의 합
류까지 고려했을 때 아무리 봐도 불가능할 것 같아요.”
“루시아씨는?”
“저도 주희씨 생각과 같아요.”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두 번째보다는 첫 번째 쪽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던 이유는.
‘너무 위험하다.’
천족의 왕, 오르엠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거의 99.99%의 확률로 만날 것이다.
지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케르트란과 스토르 벤 종족을 제외한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것.
아퀼라의 대답까지 합쳐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
저벅 저벅.
그들은 숲 속을 계속 나아갔다.
폭풍의 중심지임을 알리듯 무척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 고대병기(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