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1) >
“죽여라! 도륙해라! 놈들의 씨를 말려라!”
“전진하라!”
“캬하하하하!”
건널다리를 건너 폭풍처럼 밀려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들.
그들이 외치는 광기어린 함성은 어찌나 쩌렁쩌렁하게 대지를 울리는지 상당히 떨어져있는 고성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퇴각! 퇴각한다!”
“진형을 유지한 채로 물러나라!”
이에 반응하듯 작전대로 죽음의 강에서 물러서는 대치군.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방어가, 아니 형세역전조차도 가능했겠지만 아쉽게도 특수한 장치로 생겨난 다리는 파괴가 불가능하기에 인간세력이 대응할 방도 같은 것은 없었다.
퓨뷰뷰븅-
콰과광!
수많은 광역스킬이 대치군들의 머리위로 쏟아진다.
허나,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만큼 경미한 부상자만 발생했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우리도 출발하자.”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은 이강호가 그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일행들은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착지하기 무섭게 지붕을 밟으며 성 후문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는데, 주위에는 그들 말고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부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
밀리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강은 연합군의 진군을 막아주고 있던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그곳이 뚫렸다.
상황은 항상 좋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반농담조로 내뱉던 ‘언제 갈지 모른다.’라는 말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점점점 멀어져가는 고성.
휘이잉-
마침내 높은 능선 위, 1차 방어선으로 올라와 밑을 내려다본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여 그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한 차례 차원이 다르게 느껴지는 막대한 물량.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미친 광견처럼 달려드는 놈들에게서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까?
“후우...그래도 오늘은 더는 공격해오지 않겠지?”
“그렇겠지.”
생존자들은 연합군이 잠시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고성도 차지한데다가 지형적으로 보나, 익숙함으로 보나 인간측에 상당히 유리한 장소이기 때문.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들도 지리를 탐사하고 접근루트를 짜야 된다.
허나, 그런 생존자들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몬스터 연합군이 그딴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인간세력을 뒤쫓아 곧장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
“젠장! 빌어먹을 또라이 같은 놈들!”
생존자들이 내뱉는 침음이 유세현의 귓속에 울렸다.
유세현은 전투를 치르기 전 조심스럽게 암흑투기를 사용해 사전 상태를 살폈다.
애써 가라앉혀놓은 마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전신으로 고통이 퍼지기 시작한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억지로 버틸 수는 있었다.
단, 그럴시 회복이 더뎌질 것이 너무도 뻔했다. 아니, 어쩌면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나중을 위해서라면 이번 전투는 마력 없이 싸워야 된다.
‘이 몸으로 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잠시 물러나있고 싶었다. 실제로 이강호도 그걸 권했고.
허나, 유세현은 그럴 수 없었다.
타인에 비해 스텟이 월등히 높은 자신이다.
불완전하기는 하나 천마의 검법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이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서, 한 팔이 없다고 해서, 컨디션이 별로라고 해서 여기서 물러서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니, 그것을 떠나 마음속에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투두두두.
적의 발소리가 산속에 요동친다.
저물었던 해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긴장감이 잔뜩 서려있었다.
발소리는 점점점 커지고 있었다.
광역스킬, 방어스킬, 그 무엇도 허투루 쓸 수 없는 노릇이기에 사람들은 타이밍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풀숲 저편에서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공격하라!”
쉬이익-
콰과과광!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무수히 많은 스킬들이 상공으로 쫙 펼쳐졌다.
* * *
첫 광역스킬은 연합군에게 꽤나 큰 피해를 입혔지만 두 번째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방어스킬로 몸을 보호하는 반면, 광역스킬을 대거 발산하여 맞불을 놓았기 때문이다.
콰과광!
공중에서 서로 맞부딪치며 요격되는 스킬들.
물론, 그런 놈들이 쉽게 맞불을 놓지 못하는 스킬들도 있었다.
그건 바로.
“난파십장(亂波十掌) 난곡천풍(亂谷天風).”
무인들의 손과 병장기에서 터져 나온 갖갖이 절기들이 연합군을 휘감는다.
“크아아악”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연합군!
“크으...빌어먹을...”
알베타스도 그러했듯, 연합군 입장에서도 무인들은 정말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다.
허나 그 외의 장소는 대개 돌파한 상황.
용맹한 오우거들이 사람들의 틈으로 뛰어들자 이어서 아라크네를 포함한 여러 종족들이 잽싸게 파고들었다.
“크하하하. 죽어라! 인간!”
마침내 이루어지는 백병전.
서로 얽히고설킨 그들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혹은 스킬을 난사하며 상대방을 죽여 나갔다.
유세현 앞에도 어느새 세 마리의 적이 자리를 잡았다.
한 놈은 오우거였고, 두 놈은 크로커다일족이었는데 이전이었다면 피라미정도로 보였을 놈들이 꽤나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유세현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권능과 스킬에 얼마나 많은 혜택을 봐왔는지.
이런 스킬하나 지니고 있지 않았을 과거의 이강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이런 느낌...아니 그 이상이었겠지.’
유세현은 차분히 자세를 다잡았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져 모든 것이 어설펐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마음가짐으로...졸개 한 마리를 처리해야 될 때도 모든 신경을 쏟아 붙는다.
‘선수필승.’
마왕성에서 루시뷀트와 마주했을 때와 같이 조용히 마음속으로 읊조린 유세현은 돌진했다.
주위에 있던 김주희, 이강호, 루시아 등 모두가 그를 흘끔 주시했다.
만에 하나 위기가 닥칠시 언제라도 한걸음에 달려가기 위함이었다.
적들은 유세현을 보며 낄낄 웃었다.
“크크크, 특수종도 아닌 놈이 혼자서 달려들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특수종은 무림인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유세현 일행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일반병사가 있는 장소였다.
즉, 아무리 봐도 자신들의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유세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정석대로 갔다.
우선 좌측에 위치해 있던 제일 약해보이는 크로커다일을 노렸다.
바람을 가르며 순식간에 놈의 머리로 향하는 루베르크.
비록 힘이 잘 실리지는 않았지만, 기본 스텟이 무척 높은 만큼,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무슨!”
놈이 경기를 일으켰다.
놈은 다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서걱-
싸늘한 음색과 동시에 지면으로 떨어지는 목.
유세현은 곧장 다음 타겟을 노리는 것 대신 잠시 텀을 두었다.
몸에 균형이 맞지 않아 자칫 잘못하면 스텝이 꼬여 그대로 자빠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근차근 간다.’
유세현이 다시 자세를 잡았을 때쯤에는 두 놈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있었다.
“큭...어떻게 그런 속도가...”
그도 그럴 것이 유세현의 기준치가 낮아져서 그렇지 한 놈들의 스텟은 A랭크 25%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어 어디 가서도 결코 꿀리지 않는 그런 스텟의 소유자였기 때문.
비록 얕봤다고 하나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유세현이 들고 있던 루베르크를 살핀 크로커다일족의 전사 크루겔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 장군급 인원들이 전파해준 말이 생각난 것이다.
단신으로 정예병 수만 명을 쓸어버린 인간.
이제는 연합군 내에서 시체술사라고 불리게 된 인간.
놈은 외팔이 되었고 기분 나쁘리 만큼 소름끼치는 칠흑의 검을 사용한다고 한다.
게다가 기묘하게 생긴 흑빛의 갑주까지.
정체를 알아챈 크루겔이 외쳤다.
“오테루!”
“나도 눈치 챘다!”
오우거, 오테루가 손을 치켜세웠다.
신호탄을 쏘려는 의도였지만 유세현이 그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파앗!
상공으로 퍼져나가는 붉은 빛과 함께 잘려나가는 오테루의 목.
전투 중 딴 행위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젠장...이래서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주위를 살핀 크루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치열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여타 장소와 달리 주위가 싹 정리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척 안 좋은 쪽으로.
“대체 어떻...아니...네놈들은...”
적을 알아본 티를 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유세현의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
유세현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까지 통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전쟁 상황이니 만큼 굳이 정직함을 고수할 생각은 없었다.
적은 아직 차고 넘치도록 많으니까.
죽일 수 있을 때 죽인다.
휘두른 검은 아슬아슬하게 크루겔의 목을 스쳐지나갔다. 왼팔이 있었을 때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크으! 이자식이!”
양손으로 검을 고쳐 쥔 크루겔이 반격에 나섰다.
유세현은 차분히 검격을 하나하나 받았다.
그리고 분석했다.
적이 어떤 패턴으로 공격을 해오는지. 어떤 버릇이 있는지.
5초.
10초.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이 점점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크루겔은 초조함에 휩싸여갔다.
“크윽! 광귀의 손톱!”
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스킬을 여러 난사했지만, 분석이 어느 정도 끝난 유세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크으으으! 이자식이이이!”
결국 크루겔은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최고스킬을 발동시킬 생각을 가졌다.
근처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피해를 주는 폭풍을 동반하는 일격기.
마땅한 방어스킬이나, 대응할 스킬이 없다면 치명상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유세현은 스킬을 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살아남는 건 무리일지 몰라도 적어도 같이 갈수는 있으리라.
“죽어라라아아! 망할 시체술...어?”
허나.
크루겔은 스킬을 발동할 수 없었다.
분명히 3보 이상 떨어져 있어야 될 유세현의 신형이 바로 앞에 비친다.
망막 속으로 맺히는 검.
귓가에 유세현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동작이 너무 커.”
머리부터 하반신까지 일자로 길게 붉은 실선이 그려진 크루겔의 육신은 1초도 지나지 않아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루베르크를 보던 유세현이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정도인가.’
모든 것이 삐걱 거리는 것 치고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허나,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 유세현은 감각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적을 베어나갔다.
그리고 신호탄을 본 연합군의 장군급의 인원들이 우르르 몰려 도착했을 때는...
“쳇. 빠져나갔군.”
이미 장소를 이탈한 후였다.
* * *
연합군은 그날을 기점으로 쉬지 않고 사람들을 뒤쫓았다.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원래부터 짜놓은 계획이었지만, 이강호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귀찮게 하던 적들이 다 싸잡아서 뭉쳐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다.
그렇게 발생한 5일간의 총 9번의 전투.
허나 그들은 아직까지도 인간세력을 전멸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항상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는데다가 인원들이 추가될 때쯤 미꾸라지처럼 쓱 빠져나가기 때문.
이번에도 여지없이 놓쳤다는 보고를 들은 트루크의 이마에 힘줄이 뿔룩 튀어 올랐다.
“크...인간 놈들 정말 질기기 짝이 없군...”
“참아라. 이제 정말 조금이다.”
대표들의 말에 트루크는 숨을 크게 내쉬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트루크가 전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시체술사의 상태는 어떻지?”
“여전히 힘을 발휘하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아직까지 회복이 되지 않은 건가...트레크라가 헛짓거리만 한건 아니었군.”
유세현의 능력부재는 연합군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호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허나, 이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
때문에 트루크를 달랜 대표들도 사실은 한시라도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악몽의 신전에서 돌아온 인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능력은 정말 사상최악이었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포위망을 거의 다 좁힌 상태였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켰기에 앞으로 2~3번 정도만 전투를 벌여 밀어내면 완벽하게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가능하다.
“팀을 교대하여 놈들을 쳐라.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알겠습니다.”
각 대표들의 명령에 장군들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수긍의 의미를 알렸다.
< 깨달음(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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