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94화 (294/612)

< 머리아픈 휴식(2) >

한편 여탕도 남탕처럼 무척 활기차기 그지없었다.

소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웃고 떠드는 여성들.

“호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언니?”

“응. 그때 태광 오빠가 얼마나 당황하던지...”

사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건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악몽의 사원에서 죽어나간 동료의 죽음을 떨쳐내고 심신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루시아의 시선이 김주희를 향한다.

김주희는 밝은 모습으로 일행을 위해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분위기가 다운될 주제를 거르는 섬세함까지.

자연스레 비교가 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과 무척이나.

또한 비교가 되는 것은 성격뿐만이 아니었다.

유세현과 같은 빛깔을 한 고운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김주희는 루시아가 보기에 완벽한 여자였다.

그녀는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보다 루시아가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이 여성을 과연 뛰어넘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루시아는 자신이 없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그보다는 성격의 문제였다.

그녀는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마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부모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었다.

또래들은 괄시하고 어른들은 혐오했다.

이 세계에 와서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는 아버지 지드먼을 따라 사람들과 적당 선을 유지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3존에서 유세현과의 합류 이후 갖은 역경을 함께 하며 동료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지만, 그때조차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친구를 사귀는 법도, 대하는 법도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루시아.

그리고 이 때문일까?

루시아는 유세현과도 공적인 일을 제외한 사적인 대화는 잘 나누지 못했다.

하고는 싶지만 너무도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마치 속이 꽉 메인 것 마냥 막힌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부럽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세현과 대화를 하는 그녀가, 오랜만에 재회한 것임에도 자신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쉽게 다가가는 그녀가.

“후우...”

기분이 다시 심란해서져 인지 몰라도 악몽의 사원에서 마음이 폭로된 것이 머릿속에 되뇌어진다.

루시아는 이 생각이 들 때마다 감정 주체가 되지 않았다.

머리는 후끈후끈 달아올랐으며,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안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좋은 감정은 가지고 있을까?

루시아는 다 제쳐두고 유세현이 부담을 갖질 않기를 바랐다.

또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밀어내지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였다.

그녀는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자리를 박찼다.

그러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유혜인이 잽싸게 반응했다.

“어? 벌써 가시게요? 이제 막 들어왔는데 조금 더 있다가 가시지...”

루시아는 유혜인에게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평소였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터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망설여진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루시아의 시야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턱 비쳤다.

호의가 담겨있는 표정.

허나, 그것이 익숙하지 않는 루시아는 되려 숨이 꽉 막혔다.

‘역시 난...’

결국 루시아는 양해를 구한 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 * *

어떻게 할 거냐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 이태광 덕분에 탕을 먼저 나선 유세현이 위층으로 올라 왔을 때는 내부에 이미 누군가가 한발 앞서 도착해있는 상태였다.

물기를 머금어 비단 같은 빛을 발하고 있는 새하얀 머리카락.

루시아를 발견한 유세현이 한순간 멈짓 멈춰 섰다.

아직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한 만큼, 1:1로 대면하는 상황은 상당한 부담이기 때문.

허나, 그때 루시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멘트를 날린다.

“빨리 나오셨네요.”

“아, 예.”

유세현은 쓴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관찰력이 무척 좋던 그다.

게다가 그는 타인의 대한 경계심이 높은 만큼, 타인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도 뻔히 보였다.

루시아가 무척이나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뭔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지...’

유세현은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자 세찬 바람이 흘러들어와 지끈거리던 머리를 가볍게 감쌌다.

뇌리 속에 탕을 떠나기 전 아린이 난데없이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루시아는 무척 명석한 아이이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던 말인데 이제는 이해가 갔다. 아니, 그동안 같이 다녔으면서 왜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적진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유세현이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있으면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예. 그렇죠.”

“그러니 그전에 확실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말에 루시아의 표정이 뻣뻣이 굳었다. 설마, 난데없이 이렇게 말을 꺼낼 줄은 미처 몰랐던 것.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목욕탕 이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뛴다.

마침내 뻥끗 움직이는 유세현의 입가.

그의 입을 닫혔을 때, 루시아는 당장에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집어 삼키고 있는 표정이었다.

“...김주희씨 때문인가요?”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조차도 무척이나 떨렸다.

유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유세현은 김주희에게 동료로서의 감정이 깊지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탕에서 있던 일 때문에 이제는 약간이나마 의식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연히 남을 밀쳐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유세현은 그녀에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다짐을 말했다.

루시아의 표정이 서서히 풀린다.

‘차라리 이편이...’

김주희와의 경쟁은 계속 이어질지언정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기 때문.

유세현이 손을 내밀었다.

“동료로서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루시아가 천천히 그 손을 잡을 잡았다.

“예...물론...물론이에요.”

방안으로 맴도는 훈훈한 기운.

끼익-

그때 아주 살짝 벌어져 있던 문틈이 미묘하게나마 움직였다.

문밖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

김주희.

잠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이내 몸을 반대로 돌려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깨에 앉아있던 운디네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찼다.

“야, 이년아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냐? 지금 이거 우리한테는 안 좋은 상황인거 모르겠어?”

“아니, 알지.”

“그런데 왜...”

운디네의 말에 김주희의 입가에 더욱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툭 말했다.

“선배님답잖아.”

“......”

“그리고 선배님도 이제야 나를 좀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고.”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라고 확답하지 않았잖아.”

“.......”

“안 질 거야. 나 독한 거 알지?”

“독하다 마다냐. 어휴 지금 생각하니까 연적은 무슨...쟤가 불쌍해진다야.”

운디네가 절레절레 손을 내저었다. 김주희는 그런 운디네의 몸을 손가락을 툭 쳤다.

“어쭈 이게?”

“어쭈는 무슨! 쟤가 왜 불쌍하냐? 계약자인 나를 불쌍하게 생각...”

이내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하는 둘.

둘은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으로 탕 내부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 * *

이강호가 탑으로 돌아온 시간은 인원들이 휴식을 어느 정도 취한 이후였다.

그의 옆에는 유세현도 알고 있는 인물 세 명이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아린을 보기 무섭게 후다닥 달려가 품에 안겼다.

“스승님!”

“오! 린아!”

두 사람의 재회는 유세현과 이강호가 상봉 했을 때와 같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유세현은 그것에서 제자와 스승 그 이상의 유대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벨린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북상한 레피아와 남궁시영이었다.

연합이 쳐들어오기 직전 남하하여 이번에 놈들을 처음 겪은 두 사람이 소감을 털어놨다.

“알베타스 이상인 거 같아.”

“동감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무려 6개의 종족이 연합을 맺었다.

단순히 물량만 해도 무려 6배인 것.

그렇기에 사실 단일 종족인 알베타스와 비교해서 안 될 말이었지만 그만큼 알베타스가 얼마나 끔직하고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덕분에 피해도 상당히 컸다.

그나마 무인들은 별로 죽지 않았지만, 알데우스가 이끌던 2만이 넘는 병력들 중 절반이상이 당한 것이다.

유세현이 이강호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계획대로 이행할 수 있을 거 같아?”

본래의 계획은 적을 고성 너머에 있는 협곡지대로 유인하여 이곳에 있는 병력으로 길을 만든 뒤 트롤의 왕 트루크를 잡는 것이었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 불가능할거 같아. 내가 없는 사이 전력이 생각보다도 너무 약해졌어.”

고성에 주둔해 있는 병력은 30만 명이었다.

물량으로 보면 꽤나 많은 것 같지만 대다수가 B랭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감안 했을 때 그렇게 강한 전력은 아닌 것이다.

무림인들이 더 필요하다.

허나, 마교와 사파의 인원들은 소식이 끊겼고 남아있는 정파의 인원들은 도합 5천 명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남궁시영이 무림인 쪽 입장에서 솔직한 의견을 밝혔다.

“아마 그 누구도 이 작전에 참가하려 하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인원들을 잃으면 세력으로서의 영향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이니...”

이벨린과 레피아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한 마디씩 했다.

“폐하께서도 이 작전은 탐탁지 않아하는 눈치였어요.”

“길드 쪽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돼.”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패의 리스크가 너무도 크니까. 자칫 잘못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으니까.

허나, 놈을 죽이지 않는 한 어차피 인간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어있었다.

물론, 유세현만 없었더라면 말이다.

결론을 내린 이강호가 말했다.

“세현이가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움직이도록 하죠.”

* * *

이강호가 여태까지 꿍쳐두고 있던 아이템을 대거 풀었다.

“루시아씨는 방패를 상용하신다고 하셨죠?”

“예.”

“그럼 이걸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전부 유니크 등급 이상의 아이템으로 다른 생존자들이 봤다면, 아니 유니크 아이템 자체가 별로 없던 아린이나 루시아로서도 입이 떡 벌어질만한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유세현은 그사이 평소와 똑같이 웅크린 자세로 심법을 운용했다.

남궁시영이 이것을 정말 신기한 듯 쳐다봤다.

‘가부좌가 아니라니...’

이강호도 김주희도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심법을 운용하는 무인은 없다.

무인들에게는 가부좌야말로 정석이고,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때문에 남궁시영은 실례인걸 알면서도 숙련도가 몇 %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만약 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숙련도가 낮다면 가부좌로 자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무공이 빠르게 진전될 수도 있기 때문.

허나, 우습게도 유세현의 종합 숙련도는 무려 55%였다.

일반적인 인원들의 숙련도가 30~40%정도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자면 정말 엄청난 것이다.

물론 유세현은 만족하지 않는 것은 눈치였지만...

아무쪼록 이전 마교의 일도 그렇고 바람의 길을 혼자 뚫은 것으로 보나, 이 인원으로 유혜인을 구출한 것으로 보나 그는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아쉬운 게 있다면 유세현의 잘려나간 팔.

“후우...”

마침내 유세현이 눈을 떴다.

무려 5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기혈 하나 하나에 집중해 운용해서 그런지 아까 전 보다도 마력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이 느껴진다.

유세현은 김주희에게 검을 휘두를 만한 장소가 있는지 물었다.

“괜찮은 공터가 있긴 한데...검술 수련 하시려고요? 몸 다 나을 때까지 안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혹시 모르니깐. 몸에 지장이가도록 무리는 안 할 테니까 걱정마라.”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안내해드릴게요.”

“아...저도.”

루시아가 잽싸게 따라 붙었다.

김주희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둘만 갔으면 좀더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탑을 나선 그들의 머리위로 해가 져가고 있었다.

* * *

김주희가 투구를 걸친 덕에 이전처럼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꽤나 많이 몰려든 상태였다.

이번에는 루시아 덕분이었다.

알테리아 대륙인들은 피하는 반면, 현대인들은 작업을 걸어온 것.

“아가씨! 언제 갈지도 모르는 세상인데 괜찮으면 오늘밤 어때?”

물론,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루시아에게는 당연히 고역인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그녀까지 잘 쓰지 않던 투구를 착용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공터에 도착한 유세현은 평소처럼 검을 휘둘렀다.

결과는...

‘역시 심각하다.’

톱니 빠진 기계인형처럼 핀트가 전부 어긋나 무엇 하나 잘 맞지 않는다.

천마가 팔을 잃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천마의 검법조차도 소용없었다.

유세현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며 새로운 균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반복했다.

김주희는 이것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강했던 선배가 고작 팔 하나 때문에 이 정도로 약해지다니.

유세현이 한참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을 동안 루시아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까지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 마냥 모종의 힘이 내부에 있다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쉬익-

휘두른 궤적을 따라 날아가는 심마.

김주희도 위협을 느낄 정도의 스킬이었다.

물론, 그것보다도.

‘나도 특수특성이 있었으면...’

질투가 앞섰지만 말이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본격적으로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 머리아픈 휴식(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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