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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296화 (296/612)

< 깨달음(2) >

생존자의 얼굴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피폐해져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적이 몰려오니 좋은 지대를 장악해놔도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고 잠도 좀처럼 자지 못한다.

게다가 연합군은 무척 철저하여 타 지역에 있는 생존자들을 압박해 감히 합류할 생각을 못가지게 하는 반면, 자신들은 계속해서 병력들을 충당했다.

이 속도라면 이제 이틀 정도 뒤면 나막산이라는 지대에까지 다다르는데 거기에서 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하면 인간세력에게는 최악이 상황이 닥치게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기 때문!

그 뒤는 세계의 끝.

부서진 공간과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 모를 물질로 이루어진 공허의 바다만이 존재할 뿐이다.

허나, 불안감에 찌들어있는 여타 생존자들과 달리 이강호는 별로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막산에는 사실 그와 김주희, 아퀼라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가 존재하는데다가 아니라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안 좋아질수록 사람들이 작전을 따를 것이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체면불구하고 근위병을 동반하여 직접 이강호를 찾아왔다.

잠시 대화를 나눈 황제가 지그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강호경, 정말 그 수밖에 없다는 겐가?”

“예. 그게 최선입니다.”

“후우...”

한숨을 푹 내쉬는 황제는 그 누가 보기에도 한낱 중년아저씨에 불과해보였다.

“알았네. 곧 답을 주도록 하지.”

황제가 떠나자 이강호는 유세현에게 다가갔다.

사실 이강호가 걱정하는 것은 현 상황보다도 유세현의 몸 상태였다.

외관이 멀쩡해 얼마나 호전됐는지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 작전이 큰 피해 없이 순조롭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세현의 암흑투기가 꼭 필요했다.

정 안되면 두고 가야겠지만 가능하면 데려가고 싶은 것이 그의 속마음.

“세현아 몸은 좀 어떠냐?”

“흠...”

유세현은 몸 상태를 살폈다. 마력을 끌어올리면 아직도 몸이 지끈거리는 것이 완벽한 회복을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은 더 필요할 터였지만, 그는 지금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15년 지기인, 아니 이제는 17년 지기 친우인 이강호의 생각 또한.

“많이 괜찮아졌어. 슬슬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말에 이강호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담겼다.

유세현이 이강호를 잘 알듯 이강호 또한 유세현을 무척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세현의 어깨에 팔을 걸친 이강호가 영문 모를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유세현은 거짓말이 들통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잠시 흐르는 정적.

이강호가 입을 뻥긋한 순간 유세현이 지그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할 수 있다. 강호야.”

단단한 강철과도 같은, 굳건한 의지가 녹아 들어가 있는 말이었다.

이강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쩔 수 없이 유세현을 작전에서 제외할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어떠한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다.

그렇다.

이게 바로 유세현이다.

“그래. 믿는다.”

피식 웃은 이강호가 팔을 꺾어 유세현의 몸을 끌어당겼다.

* * *

또 한 차례 전투가 발생했다.

이날 사상자는 무려 3만 명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전투보다도 컸다.

결국 안 되겠다 생각한 황제를 포함한, 인원들은 이강호의 계획을 따르기로 약조를 했다.

이에 다음 방어선에 도착한 이강호는 통솔자들을 불러 작전을 자세하게 설명해나갔다.

“나막산. 급경사가 생기는 이 부분에서 돌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이보다 더좋은 예외의 경우가 생기면 제가 직접 통솔을...”

그사이 유세현은 조금이라도 몸 상태를 좋게 하기 위해 운기조식을 했다.

허나, 그는 좀처럼 마력 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늘로써 벌써 6일.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걱정했던 것보다 빠르게 외팔 전투에 익숙해진 유세현이었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더 이상 천마의 검법사용이 힘들다는 것.

천마의 검법은 천마군림보의 활용을 바탕으로 한 공중전투술부터 시작하여 무척이나 오묘한 검법이다.

때문에 이해와 예측이 불가능.

지금까지 유세현이 따라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머릿속으로 장면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여전히 양팔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져있었다.

즉, 검술이 완전히 옛날로 돌아갔다.

완성도는 더욱 낮아진 채.

신경이 안 쓰인다면 사람이 아니니라.

결국 유세현은 운기조식을 멈추고 일어나 김주희에게 대련을 부탁했다.

“봐주지 마라.”

“물론이죠. 선배!”

후웅!

검이 매끄럽게 바람을 가르며 김주희를 향해 치고 들어갔다.

김주희는 그것을 여유롭게 쳐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방.

채재쟁!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동안 김주희의 창술은 무척 높은 경지에 다다라있었다.

마치 제 2의 이강호를 보는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정말 그렇다.

어찌나 정확하고 날카로운지 문파의 수장들을 따라와 대기하고 있던 고수들도 이를 보며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에 유세현이 밀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

유세현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억지로라도 검법을 운용해봤다.

쉬이익-

챙!

삐걱거린다.

뒤틀려 닿지 않는다.

‘이게 한 팔의 한계인가.’

그때 방어만 하고 있던 김주희가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결판이 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팔이 튕겨나가고 창두가 목 끝에서 멈춘다.

김주희는 씁쓸함을 포함한 사뭇 여러 감정이 담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세현은 그런 김주희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야, 김주희.”

“예...예?”

“많이 세졌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은 김주희가 얼른 표정을 바꿔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호호호! 그런가요? 제가 노오오력을 좀 많이 하긴 했죠! 이젠 못 당하시겠죠?”

창대를 물린 김주희가 손을 뻗었다.

유세현은 피식 웃음을 토해내며 그 손을 붙잡았다.

“진짜...”

이제는 못 당할 것 같다.

그 말은 차마 전부 내뱉진 못했다.

유세현은 휴식을 취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외팔로서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그때 귓가로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현공?”

익숙하지는 않지만 오래전 어디선가 들어본 법한 그런 음성이었다.

유세현이 고개를 들자 인물의 얼굴보다도 어느 신체부위가 먼저 눈에 띄었다.

무복이 펄럭여 무척이나 허전해 보이는 오른팔.

“아...”

유세현은 그 남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남궁제.

‘왜 이자가 있단 걸 생각을 못 한거지?’

유세현은 스스로 아둔함에 혀를 찼다.

그는 외팔, 그것도 주로 사용했었던 우수가 아닌 좌수로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가.

조언을 구한다면?

‘훨씬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유세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제가 극진히 목례를 취했다.

“진즉 인사를 하러 찾아왔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네.”

이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제는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맹주와 더불어 황제조차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강호의 동료라고는 하나 이런 대접을 해줄 리는 없는 것.

“흠...대체 뭐하는 자이기에...”

사람들은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영이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 상황은 그에게 있어선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허허허, 당연한 일이라니...그 누가 남의 여식을 구하기 위해 마교로 쳐들어간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 말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마교가 어디인가?

미친놈들의 집결체.

적에게도 치명적이지만 아군도 물어버리는 광견.

금시초문이 이야기이기에 본래라면 믿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남궁제의 행동을 봐선 결코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애초에 남궁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고 보니 천마가 재림했다는 소문이 잠깐 떠돌긴 했었는데...”

“허허, 천마는 토사구팽당하지 않았던가. 비급이 있다고 해도 튜토리얼, 그것도 제일 깊은 지역에 있을 텐데 어떻게...”

그들은 스스로가 들은 소문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제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유세현은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천하제일검, 검제님께 구하고 싶은 조언이 있습니다.”

“허허, 천하제일검이라니. 오른팔을 잃은 지가 언제인데 그렇게 부르는 겐가.”

그렇게 말하는 검제도 기분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 한 번 말해보게나.”

검제가 흔쾌히 승낙했다.

이에, 한손검법에 대한 것에 묻자, 검제는 대련을 펼쳐볼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밀렸고, 유세현은 최후의 보루로 천마의 검법을 억지로 운용했다.

남궁제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검법을 익혔군...그것도 보통검법이 아닌 상당한 수준의 상승검법을...’

몇 번 검을 맞댄 그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팔을 잃은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군.”

“예.”

“우선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자네가 독학으로 만든 실전 검법은 꽤나 괜찮네...허나, 그렇기에 너무 안정적이고 일반적이며 흔하지. 전부 예측이 가능하다는 뜻이네. 양팔이 있을 때는 몰라도 그래서는 동급의 스텟을 지니고

있는 적을 쓰러트리기는 힘들 걸세.”

유세현도 이미 알고 있던 바였기에 크게 심란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네가 운용한 검법에 관한 것이네만. 배운 대로 똑같이 따라하려고 한 모양인데. 그래서는 중심이 틀어져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지.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제가 난데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법은 무작정 따라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네.”

찌르고 베고.

물 흐르듯 연결되는 검법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검법은 검을 느끼는 것이네. 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이 거기에 따라가지.”

남궁제의 검법은 계속되었다.

무인들은 경탄으로 하며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직계 자손을 위해서도 아닌, 한 사람 때문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이런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검을 느끼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검이 되어야 되네.”

마침내 그가 멈춰 섰다.

“검과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 이것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네. 신검합일(身劍合一).”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알겠다.

허나, 유세현은 범인이었다.

천재성을 가지고 어릴 때부터 검을 쥔 무인들과는 달리 25살 까지 검을 쥐어본 적도 없었고,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진 무공(武功)의 무(武)자도 몰랐다.

이해가 갈 리가 없지 않는 가!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은 목숨을 걸고 천마의 검법을 펼친 결단력과 어떻게든 따라가려고 한 노력밖에 없다.

그는 이런 것보다도 남궁제가 사용하는 검법의 비급을 얻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허나.

“내가 세현공에게 검법을 전수해주어도 상황은 똑같을 걸세. 나는 검법을 익힌 게 아니라 스스로 검이 되어 검법에 맞춘 것이니 말일세.”

마음을 읽은 듯한 남궁제의 말.

그가 마지막 조언을 했다.

“세현공이라면 깨울 칠 수 있을 거라 믿네. 그러니 세현공도 스스로를, 그리고 전주해 사부를, 검법을 믿게. 내 장담컨대 그 검법은 상당한 수준의 상승검법이네.”

이내 남궁제는 저편으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은 씁쓸함이 섞인 실소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검법을 전수해준 스승 천마, 독고천.

그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지 예상이 간다.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느낌.

그리고 그날 밤.

잠깐 꾸벅 존 유세현은 꿈속에서 천마를 만날 수 있었다.

< 깨달음(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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