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아픈 휴식(1) >
“혹시 아는 얼굴이냐?”
“아니 전혀...”
“젠장...역시 그렇지?”
이어서 그들 외에도 수많은 인원들의 시선이 유세현에게 가 꽂힌다.
그들은 하나같이 궁금해 했다.
대체 뭣 하는 자이기에, 무슨 짓을 했기에 무명인 그가 이제는 수많은 뭇 남성들의 이상형이 된 그녀를 활짝 미소 짓게 만든 것인지.
그들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바라고 바랐다.
‘제발...제발...가족이기를!’
가족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이유일지언정 그들에게는 좋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허나.
“젠장! 선배라잖아 멍청아! 선.배.”
“큭...안돼...나의 얼음마녀님이...”
동료의 말을 들은 병사가 마치 심장을 관통당한 것 마냥 마냥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답을 준 다른 한 명도 세상을 다 잃은 표정.
하지만 그런 그들의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웃는 편이 훨씬 보기 좋네. 안 그러냐?”
“그건 그렇지. 크~눈이 부신다 부셔~설마 꽃 같은 미소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들은 애초에 자신들은 가질 수 없는 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로망은 로망일 뿐인 것이다.
팬심으로 두텁게 무장한 그들은 이내 미소 지은 김주희의 표정에 만족하며 갈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하하하, 저 썩을 놈은 다음 전투에서 꼭 뒈졌으면 좋겠다 야.”
“동감이다.”
그들은 유세현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자 왼팔 때문에 주위 신경을 끄고 있던 유세현도 눈치 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쓴 미소로 바뀐다.
사실, 자신이 죽으면 김주희가 슬퍼해 주리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녀와의 유대감은 이강호 다음이었으니까.
허나, 무려 3년이다.
함께한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수많은 기억들이 그 위로 쌓이고 쌓여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을 텐데 아직까지도 그 사건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동시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선배님 여기에요.”
김주희가 멈춰선 곳은 높이 솟은 탑 위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의 앞이었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김주희가 난데없이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더니 팔을 뒤로 쭉 뻗었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손을 까딱이는 김주희.
“선배님 탑이 좀 높아요. 아직 회복도 다 안 되셨으니 업어 드릴게요.”
유세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심이 듬뿍 담긴 손짓이었다.
아까부터 줄곧 신경 쓰고 있던 루시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녀는 설마 설마하는 표정으로 유세현을 바라봤다.
본래의 성격이라면 절대 업히지 않을 터지만, 김주희는 유세현의 마음 한편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여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업힌다면 이미 김주희에게 상당히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이 무척 씁쓸할 것만 같았다.
유세현이 천천히 다가간다.
그에 비례하여 점점 커지는 루시아의 심장소리.
그의 손이 살포시 김주희의 머리위로 향했다.
“괜찮아. 이제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쳇!’
김주희는 아쉬움에 마음속으로 혀를 찼고, 루시아는 반쯤 안도했다.
이윽고 탑을 오르기 시작하는 이들.
과거 그녀에게 유혹당한 적이 있던 이용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매혹 스킬 어디 안가는 구만...’
그리고는 루시아를 향해 난데없이 조용히 속삭였다.
“쟤 정말 독한 앱니다. 아마 만만치 않으실 거예요. 전 당신을 응원합니다. 화이팅.”
* * *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방은 탑의 크기만큼이나 무척이나 넓었다.
방에는 창문이 여러 개 나 있었는데 주변을 감시하기에는 덧없이 좋은 구조였다.
이강호가 굳이 이곳을 거처로 정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창문을 열자 죽음의 강 너머에 위치해 있는 적의 군세와 그 앞에서 다리를 막고 있는 주둔군이 보인다.
유세현은 적들의 마력을 읽어볼 생각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강을 기준으로 경계가 나뉘어져 있어 읽히지 않았다.
그때 김주희가 일자 만원경처럼 생긴 아이템을 내밀었다.
“이걸 쓰시면 잘 보일 거예요. 선배.”
“어, 고맙다.”
김주희가 마력을 채워 건네는 세심함을 보였기에 유세현은 굳이 마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눈에 갖다 대는 것으로도 강 너머를 볼 수 있었다.
놈들의 물량은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나게 많아 언제 다리를 건너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강호는 머지않아 적이 쳐들어올 것을 예측한 상태였다.
“선배님 그만 보시고 휴식 하시는 게...”
“아, 그래.”
“여기서 한층 아래에 목욕탕이 있는데 그곳에 따뜻한 물 만들어놨어요. 가서 좀 쉬다 오세요.”
이에 환색한건 유세현이 아닌 이태광이었다.
“호오, 목욕탕이 있나?”
몇 달 내내 지독한 고통만 겪었기에 따뜻한 물에서 피로를 풀고 싶은 것.
“예.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이 남탕이에요. 여탕은 왼쪽이고요.”
“오케이. 고마워 주희씨~”
“다른 분들도 씻고 싶으면 지금 씻으세요. 강호 선배님께서 돌아오시면 회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가고 싶어도 못 갈 거예요.”
“흠...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전부 씻는 게 좋겠는데? 어차피 얼마 있지도 못할 테고.”
“그도 그러네요. 그럼 그냥 지금 전부 가서 씻도록 하죠.”
이태광의 주도하에 인원들이 움직였다.
제일 앞에서 나아가던 유혜인이 갈라지기 전 유세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따 봐 오빠.”
유세현은 왠지 모르게 장난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남매란 존재니까.
“어야. 냉탕에서 수영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민폐다.”
“하이고! 그건 오빠나 하는 거고!”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기분 좋게 이야기를 마친 유세현이 탕에 들어가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데 문득 루시아와 시선이 교차했다.
유세현은 어색하게나마 살짝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루시아는 그것을 똑같이 받아주었다.
이후 성별에 맞춰 양쪽으로 갈라지는 인원들.
하지만 그중에서는 성별과는 정반대의 탕으로 향하려는 인원이 한 명, 아니 두 명 존재했다.
“야, 아퀼라...운디네...너 지금 어디 가냐? 내 너희 둘 다 이럴 줄 알았어.”
물론, 빛보다 빠른 김주희의 스냅에 잡혔지만 말이다.
아퀼라는 가슴을 내밀며 무척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나에게는 마왕님을 보필해야 될 의무가 있다. 그러니 마왕님을 따라서 당연히 이곳으로 들어가는 게 맞...”
“...기는 개뿔! 되먹지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라.”
“그럴 수는 없지.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어휴! 가봤자 어차피 100% 퇴짜 먹어!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 있고 간사하게 행동하는 애가...너를 위해서 해주는 말이야. 너 그러다가 선배한테 눈치 없다고 찍힌다? 그러고 싶어?”
“......”
강렬한 일침.
아퀼라는 결국 여탕으로 방향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아퀼라가 사라지자 김주희의 눈이 이번에는 운디네를 향했다.
김주희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호호호...디네야 오랜만에 역소환 당하고 싶니? 계약 위반인거 알지?”
이에 운디네가 시선을 회피하며 변명했다.
“아니, 난 단지 가서 회복마법을 사용해주려고...”
“호호호, 거짓말도 그럴싸해야 통하는 거란다. 얌전히 따라와라...시야에서 사라지면 역소환이다. 알았지?”
“...쳇!”
운디네도 결국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모두 들어가자 그곳에 남은 인원은 김주희 뿐이었다.
남탕 쪽으로 슬그머니 향하는 시선.
‘정령화 해도...당연히 걸리겠지?’
김주희가 입맛을 쩝 다셨다.
* * *
탕의 물은 딱 적당하여 딱 좋은 정도였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걸걸한 목소리.
“으어어어~”
이태광이 발산한 소음이었다.
그는 양팔을 쫙 편 채 탕에 누워있었는데 현대의 목욕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들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물론, 몸은 많이 달랐지만.
유세현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탕에 푹 담갔다.
동생도 구해낸 마당에 전투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걱정도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제외하고도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다.
어떤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에 흰 머리카락.
그리고 붉은 눈동자.
루시아 아인셰르.
신전에 있을 때는 유혜인을 구하는 것에 전부를 건덕에 루시아의 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떻게 처신을 해야 될까?
유세현은 루시아가 싫은 건 결코 아니었다. 아니 되려 그 또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는 그녀와, 아니 그 누구와도 사귈 수 없었다.
사랑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판도라 내부에서 인간세력이 일정 궤도에 올랐을 때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자가 도망치자고 한다면?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면?
이강호를 위해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를 위해 멈춰 서게 될 것인가.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게다가 마지막 승리자는 한 명이다.
유세현은 이 승리를 이강호에게 안겨 줄 생각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이고, 동생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었겠지’
승리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이강호를 믿는다.
슈우우우-
그때 내부에 있던 어둠의 마력이 갑작스럽게 들끓었다.
회복되는 내내 가끔 발생하던 현상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유세현의 생각을 반발하는 시위 같았다.
아무튼 간 이대로 루시아와 계속 함께하는 것은 그녀를 마음을 이용해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유세현은 모른 척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먹을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때문에 원래라면 딱 잘라야 된다.
허나, 향후를 보았을 때 그녀의 힘은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떡해야 되지?’
아무리 생각해도, 몇 번을 생각해도 좋은 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스르륵-
그때 잔잔한 물결파가 퍼지며 누군가가 유세현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린이었다.
“고민이 많은 표정이구먼.”
“......”
유세현이 침묵하자, 아린은 마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것 마냥 말을 이었다.
“분명 그 아이 때문이겠지. 마음을 알아버려 난처한 거 아닌가?”
“......”
유세현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권능이 없기에 통찰은 하지 못할 터인데.
‘연륜의 힘인가.’
유세현은 이렇게 된 거 조언도 구할 겸 솔직히 답했다.
“예, 맞습니다. 영감님.”
이에 누워있던 이태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뭔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유세현은 그 순간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질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호오...루시아라면 그 백발 여자 맞지?”
“예.”
“그 여자가 동생을 좋아하는 거고.”
“예.”
“오오오~그래서? 동생 마음은 어떤데?”
유세현은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태광 같이 단순한 자라면...
나쁘지는 않게 생각한다고 말하자 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그럼 사귀면 되겠네. 뭐가 걱정인데?”
유세현이 살며시 관자놀이를 짚자, 장원석과 이용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태광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이었다.
잘못짚은 이용석이 한마디를 넌지시 던졌다.
“에이~그야 당연히 주희 때문에 그렇죠. 형님.”
“...예?”
이에 유세현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 왜 지금 난데없이 김주희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표정을 본 이용석이 정말 몰랐냐는 듯 물었다.
“야, 걔 딱 봐도 너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 구만...아까 김주희에 대한 거 길 걸으면서 대충 들었지? 걔가 왜 그런 상태였겠냐? 난 네가 당연히 눈치 깠을 줄 알았는데...아, 맞아. 너 몸 상태가 상태가 안 좋았지? 미안하다.”
“......”
유세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과대 형이 말씀한 건 어디까지나 추측...”
“아니 이건 누가 봐도 무조건인데? 안 그러냐 원석아?”
“예 형. 저도 형 말에 동감합니다.”
“어르신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마지막으로 이태광까지 동의함으로써 의견은 만장일치였다.
그리고 본디 사람의 마음이란 본인보다도 제 3자가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거 때문에 고민이었던 게 아닌 겐가?”
“......”
지금 보니 자신이 착각한 것일 뿐 아린도 논점이 완전히 틀렸다.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 아니 머리만 더 아파진 유세현의 몸이 그대로 탕 속으로 가라앉았다.
< 머리아픈 휴식(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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