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몽의 산맥(1) >
“후욱...후욱...후욱...”
석고상처럼 굳은 라비스의 몸.
그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유세현이 살짝만 손목을 놀리는 순간 목이 달아날 것이기에.
라비스는 체념했다.
‘끝났구나.’
바로 베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내뱉을 말이 있어서 이거나, 지금 이 상황을 조금 더 즐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눈동자만 살짝 돌려 아린을 쳐다봤다.
무척 애석한 표정.
병사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라비스님께서 이렇게 쉽게...”
그 누구도 구할 생각 따위는 갖지 못했다.
의지를 박탈하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
그들은 강한 A랭크 몬스터 연합과도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이정도로 두렵지는 않았었다.
그때였다.
유세현의 팔이 살짝 움직였다. 라비스는 끝을 깨닫고 눈을 감았다.
후웅!
귓가에 울려 퍼지는 바람소리.
허나, 라비스는 그 어떠한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리 깔끔히 목을 쳐줬다고 하더라도 따끔한 느낌은 있을 텐데.
이상함을 느낀 그가 눈을 떴다.
유세현이 검집에 칼을 꽂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
유세현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뒤돌아서 나아갈 뿐.
그때 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라비스를 향해 말했다.
“정말 운이 좋았네.”
“......”
아린이 유세현을 뒤 따르기 전 마지막으로 라비스의 귀에다 대고 무엇인가를 조용히 속삭였다.
라비스는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세현이 이곳을 떠나려고 한 이유가...
‘동생을 구하러가기 위해서라고?’
아린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라비스. 어떻게 처신할지는 여전히 자네 마음이겠지만. 나는 자네가 이곳에서 한번 죽은 셈 치고 앞으로는 잘 지휘하기를 바라네.”
“......”
“그럼, 잘 지내게나.”
이윽고 아린도 그의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결과가 어떻게 날까 지켜보기 위해 뒤늦게 따라온 길드세력.
그들은 행여나 눈에 띠여 찍힐까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전투를 지켜봤다.
그리고 유세현이 승리하자 판도라를 버텨온 베테랑답지 않게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주먹을 불끈 쥔 가레크가 외쳤다.
“좋아! 이제 전세는 역전 됐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휘권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선봉에 서게 되는 일도 더는 없겠지.
사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가레크의 길드 또한 도주한 길드였다.
“저분 정말 대단하신데요?”
“하하, 제가 말했잖습니까.”
헨돌도 모든 상황이 좋게 좋게 풀릴 것이라 예상했다
허나.
라비스를 살려준 뒤 그냥 떠나려고 하는 유세현.
당혹스럽지 않다면 사람이 아니리라.
뒤처리도 하지 않고 이렇게 떠나버리면 상황은 지금과 별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헨돌을 포함한 여러 인원들이 한걸음에 뛰어와 외쳤다.
“저, 저 세현씨! 라비스를 살려주셨다면 적어도 상황수습은 하고 가주셔야 저희가...”
그러나 유세현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만을 했다.
그의 손짓 단 한 번에 죽은 듯이 웅크린 채 에너지를 보존하고 있던 구울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저...세현씨?”
“......”
여전히 묵묵부답.
헨돌과 여타 길드원들은 그때 완벽하게 깨달았다.
이 남자는 전혀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 없음을.
그가 라비스를 쓰러트리러 간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닌, 본인이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는 걸.
그래, 이 남자는 애초에 자신들을 구해준다고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처리하겠다고 했을 뿐.
‘젠장...’
겉치레 적으로 맺어진 친분.
자신들은 이 남자에게 있어서 비지니스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협력은 가능하지만 도움은 결코 주지 않는 관계인 것.
그리고 길드 인원들도 여태까지 유세현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게리오그 산맥으로 향하는 것을 도와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큭...”
방도가 떠오르지 않은 헨돌이 입술을 악문 순간이었다.
가레크가 터벅터벅 걸어 유세현의 앞에가 섰다.
“당신, 아무리 강하다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요? 그래도 같은 길드세력인데 떠날 땐 떠나더라도 상황을 처리해주고 가셔야죠?”
본래라면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없었겠지만, 라비스를 살려주는 자비심을 보고 자신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때 이용석이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이래서 사람 말은 한쪽만 들어서는 안 된다니까.”
“...무슨.”
헨돌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용석이 가레크의 앞에가 섰다.
“당신, 이름이 가레크라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보다도 왜 초면에 반말을 찍찍...”
“아, 그건 됐고. 가레크, 당신 이곳 제군군과 처음부터 같이한 원년길드지?”
“그렇다면?”
가레크의 말투도 성깔을 보여주겠다는 듯 곧장 반말로 바뀌었다. 허나, 이용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
아니, 되려 곧바로 이어진 그의 한 마디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레크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갔다.
“들어보니깐 도주에 멋대로 던전 공략까지...길드쪽이 엄청 개짓거리 많이 했던데.”
“......”
“그래서 말인데 하나만 물어볼게. 당신 이 둘 중에 하나라도 한 거 있나?”
가레크의 입이 한순간 꾹 닫혔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찰나, 아차한 그가 변명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이용석이 실소를 내뱉었다.
“하...뭔가 했긴 했나보네. 그런데 지금 했으면서 그딴 소릴 내뱉은 거냐?”
“아, 아니 그때는 어쩔 수가...”
“뭐? 어쩔 수? 말 꼬라지를 보아하니 튄 거구만? 하하하, 이 새끼가...너 지금 여기서 뒤지고 싶냐?”
가레크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모욕적인 언사를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내뱉다니.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앞에서.
허나, 가레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어진 이용석의 말 때문.
“너, 우리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된 줄 알아? 제국군이 약속을 깨고 아주 멋지게 튀어준 덕분이지.”
“......”
“그리고 이것도 알아? 그 덕에 저언~부 뒤질 뻔 했다는 거?”
주위 분위기를 살핀 가레크는 완전히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 이쪽은 반대로 제국군이 도주를 했다니.
이건 어떠한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용석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가 보기에 네놈은 이런 대우를 받아도 싸. 불쌍한 건 아무 짓도 안했는데 재수 없게 휘말린 여타길드지. 넌 목이 안 잘린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야 돼. 그래서 말인데 너희 길드 선발대에 서겠다고 자원
은 했냐? 안했지?”
그 후 이용석은 그야말로 가레크를 탈탈 털었다.
출발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이용석이 마무리멘트를 날렸다.
“야...누군가에게 책임 운운하기 전에 네 맡은바 역할이나 잘 해라. 알았냐? 그리고 헨돌.”
“아, 아 예. 길드장님.”
“누가 길드장이야?”
“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잘못 말한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저기 제국군 지휘관, 심성은 꽤 착한 거 같은데 가서 자초지종 잘 말해봐. 이전에는 듣지 않았겠지만 지금이라면 들어줄 가능성이 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 지내라.”
이용석은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는 몇 보를 걸어 나가다가 무엇인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가레크에게 다가갔다.
가레크의 몸이 본능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야.”
“예...”
“그러고 보니까 세현이한테 사죄 안 해?”
“아...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생각 없이...”
가레크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유세현은 살며시 이용석을 바라봤다.
‘잘했지?’라는 표정을 지은 채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유세현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굳이 상황을 정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귀찮아서 무시하려했던 유세현이었지만 결코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신호를 보내기 무섭게 앞으로 나아가는 구울.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유세현은 북동쪽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지역이 나뉘어있어 역시나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본래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간단히 정보를 제공받을 생각이었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기에 불가능.
‘뭐, 어차피 그렇게 많이 도움 되지도 않았겠지만.’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눈앞에 비치는 초대형 나무들.
과연 몇 백 미터나 솟아올라 있는 것일까?
끝이 보이지 않아 짐작도 되지 않는다.
허나, 큰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풀숲, 덩쿨 등 이 산에 있는 모든 것이 그가 거쳐 왔던 일반적인 산에 비해 몇 십 배는 커다랗기 그지없었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오는 거인나라의 숲에 들어온 느낌.
그래서 붙여지게 된 명칭.
[거인의 숲.]
들어가기 전 이용석이 모두에게 말했다.
“이 산맥만 넘으면 바로 게리오그 산맥입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설명도 덧붙였다.
“뭐, 직접 보셨으니 다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 산맥에 서식하고 있는 곤충의 크기는 사람만 합니다. 그리고 들어가시면 이 곤충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특히나 조심해야 됩니다.”
곤충의 스텟은 B랭크 중반부로 일행이라면 충분히 가지고 놀면서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문제는 그들의 강함 같은 것이 아니다.
“잠자리 같은 건 상관이 없지만 개미처럼 우르르 개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놈들이 있어요. 물론, 지금의 우리라면 쉽게 처리하겠죠.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곤충의 괴성 때문에 몬스터 연합에게 위치를 발각 당하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의 곤충들은 포식자보다도 침입자들에게 더욱 격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
아린이 말했다.
“흠, 지금까지 만난 정도의 수준이라면 굳이 피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뭐,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목적지에 가까워진 이상 움직임은 들키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유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 유세현의 목적은 사원에 들어가 유혜인을 찾는 것.
행여나 재수 없으면 그가 한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되려 운 좋게 살아남았을 동생의 숨통을 죄는 되는 것이 될 수 있는 법인만큼, 진군을 늦추지 않는 선에서 될 수 있는 한 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허...미안허이. 너무 당연한 것인데 내 생각이 너무 짧았구먼.”
아린의 사과와 함께 일행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스르륵.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지나가는 리자드맨 부대.
온몸을 진흙으로 뒤덮었기에 다행이도 그들은 일행을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다.
유세현은 이틀간 이번 일을 제외하고도 무려 7번이나 적과 조우했다.
산맥을 지키는 적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이었다.
마치, 바리게이트를 마주하는 느낌.
허나 그 강철 같은 벽에도 빈틈은 존재했다. 아니, 직접 만들었다.
곤충의 특성과 리자드맨, 하피의 구울을 이용해서!
“이런! 말벌들이 여기까진 왜!”
“젠장! 근처에 또 새로운 벌집이 생긴 건가?”
구울이 근처에 와서 죽자 동족이 당했다 생각한 몬스터 연합은 벌들과의 교전을 실시했다.
유세현은 그것을 틈 타 잽싸게 지나쳤다.
그렇게 며칠.
유세현의 눈앞으로 거대한 강이 펼쳐졌다.
철교처럼 놓아져 있는 산맥.
유세현은 물속을 들여다봤다.
푸른빛도 핏빛도 아닌, 그저 새까만 것이 깊은 늪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가 시험 삼아 돌을 집어 반 정도 물속에 담그자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형체.
이는 현재 눈앞에 있는 산맥이 악몽의 산맥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거대했던 숲에 비해 겉으로는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 숲.
“들어가죠.”
유세현과 이용석이 거침없이 내부로 발을 내딛는 반면, 루시아와 아린은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야 뒤를 따를 수 있었다.
< 악몽의 산맥(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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