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77화 (277/612)

< 악몽의 산맥(2) >

끼룩. 끼룩. 끼룩.

풀벌레 소리가 잔잔하게 메아리치는 새벽.

일행은 나무위에 걸터앉아 악몽의 산맥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루시아는 자기 전 자신을 향해 방어결계를 걸었다.

고유특성 아이기스의 방패.

거절이라는 특성이 담긴 이 능력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간곡하게 믿으면서.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

10분이 지나 둘을 바라본 이용석이 조심스레 말했다.

“흠...아직까지 이 두 분은 괜찮은 것 같네. 악몽을 꾸는 사람들은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거든.”

악몽을 꾸게 되는 이들은 잠이든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경련을 일으키며 잠에서 깬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하긴, 유세현이랑 같이 다닐 정도이니...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그 강한 에반 비텔스바흐도 중간지역을 당해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으니 말이다.

이용석은 그 이후 쥐 죽은 듯이 경계만 섰다.

인원이 많아 대놓고 야영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궁금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고요하기 짝이 없는 숲에서는 한 마디가 아주 멀리까지 울려 퍼지기 때문.

즉,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뭐, 이 근처에는 마물이 없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아마 유세현이 용납하지 않겠지.

때문에 이용석은 간간히 눈동자만 흘겨 루시아를 살폈다.

과거처럼 이상한 흑심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좋은 눈요기 거리가 되니까.

현재 루시아는 몸에 딱 맞는 갑주를 걸치고 있는 덕에 착한 몸매가 도드라져 이용석의 입장에서는 무척 바람직하기 그지없었다.

이용석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완벽하군. 이런 미인은 이제 정말 보기 힘든데...크~유세현 이 부러운 놈.’

지금까지 함께해오며 봐온 결과 이용석은 루시아가 유세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성격도 김주희처럼 여우형 스타일이 아니라 더 맘 든다.

물론, 연애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인지 유세현 본인은 깊은 신뢰감이라고만 생각할 뿐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뭐, 사실 이런 세계에서 사랑은 하지 않는 편이 났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

살짝 한숨을 내뱉은 이용석이 다시금 시선을 바로 했다.

* * *

날이 밝자 이용석은 곧바로 인원들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괜찮다는 것을 아는 만큼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아침, 점심, 저녁 매일 세 번씩 해야 습관이 들어 추후 확실하게 진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이상 없어요.”

“나도 괜찮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유세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장서는 이용석.

그는 길이나, 노하우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2일이 더 지난 새벽.

다시 취침에 들기 전 이용석이 말했다.

“이제 저희는 막 중간지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니 이미 알고 있으시다시피 지금부터는 마물이 습격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등장하는 마물은 고스트피셔.

유일하게 이 산맥에 존재하는 몬스터로 무작위한 형체를 지니고 있는 게 특징이다.

“100%는 아니지만 당사자가 싫어하는 형태로 나타날 확률이 무척 높으니 유의해 두시기 바랍니다.”

인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투는 그로부터 약 4시간 정도 후에 발생했다.

[크흐흐흐흐]

음산한 웃음을 내뱉고 있는 고스트피셔.

놈의 형태를 확인한 유세현은 어떤 것에서 본 따 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 새빨간 비늘과 등에 돋아있는 새까만 날개는 이전에도 한 번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적의 내부.

이교도들의 교주, 마벨이 마족화로 변신한 모습.

‘내가 무의식적으로 저놈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건가?’

유세현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누가 저놈을 만들어낸 것인가?

답은 간단했다.

[파이어 블래스트.]

아린의 손에서 발현되는 고위 마법.

콰아아앙!

지면에서 솟아오른 엄청난 열기의 불기둥이 고스트피셔와 함께 일대를 휘감았다.

[크어어어!]

순식간에 한줌에 재가 되어 사라지는 괴물.

이용석은 휘파람을 불면 감탄 했다.

‘역시 이 마법...’

언제 봐도 장난이 아니다.

이용석은 이 정도라면 아무 문제없이 신전내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허나, 유세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파이어 블래스트는 무려 5서클의 마법.

놈들은 이 정도의 화력을 퍼붓지 않아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놈들이었다.

게다가 마력도 필요이상으로 더 많이 소모했고.

겉으로는 무척 덤덤해 보이지만 사실은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

‘괜찮을지 모르겠네...’

허나, 이를 전부 알면서도 따라오겠다고 한건 아린이었다.

그리고 살아온 세월이 있고, 그 어려운 수식을 다루는 대마법사이니 만큼 정신력도 무척 높을 것이다.

‘침투가 이루어진다 해도 버틸 수 있겠지?’

그리고 그날 밤.

아린은 유세현의 예상처럼 악몽을 꾸게 되었다.

* * *

“후우...찌뿌듯하구먼.”

“어르신, 그 외의 제가 말한 증상은 없으신 겁니까?”

“그렇다네, 용석. 뭐, 문제 있을 것 같은가?”

“아뇨, 그 정도라면 무척 괜찮은 겁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먼. 가세나.”

“예.”

다시 시작된 이동.

낮이라 그런지 고스트피셔가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적도 분포하지 않아 내딛는 발걸음은 무척 빠르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전력 질주해 달려가고 싶지만.

‘그래서는 구울의 마력이 버티지 못하니.’

적정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어둠.

고스트피셔는 여지없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유세현은 그런 고스트피셔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제보다도 구울을 좀 더 촘촘히 배치해놨었다.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그런데 구울이 반응하지 못했다.

‘왜지?’

오늘 고스트피셔의 모습은 어제와는 한결 다른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세현은 그 여자아이 또한 알고 있었다.

캐서린, 아스모데우스의 산제물이 된 아린의 어릴 적 친구.

고스트피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린...]

어제와는 다르게 아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감히 그 모습으로 내 이름을 부르다니...”

하지만 그 순간 고스트피셔가 다음 말을 이었다.

[나를 왜 버렸어? 왜 그냥 잡혀가게 놔둔 거야?]

유세현은 그 틈에 구울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허나.

반응하지 않는다.

‘인식하지 못하는 건가?’

아린이 검을 들어올렸다.

“넌...캐서린이 아니야.”

화르륵.

이번에도 타들어가는 고스트피셔.

[꺄아아악! 왜! 왜!]

화력이 막강해 순식간에 재가 되어야 정산이건만 캐서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놈은 악랄하게 버티며 비명을 토해냈다.

점차 수그러드는 불길.

아린은 등이 식은땀으로 인해 흥건히 젖어있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했다.

“후...악질적이긴 하지만 괜찮네.”

그리고 다음날에도 고스트피셔는 여지없이 나타났다.

전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아린. 나를 왜 버렸어?]

이에 이용석이 잔뜩 구겨진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유세현. 이건 뭔가 이상해. 고스트피셔는 이렇게 행동하는 놈이 아니야.”

몬스터들은 물리적으로 적을 공격한다.

그리고 고스트피셔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죽자고 달려들지 저런 식으로 상대방의 기억자체에서 나온 듯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다.

유세현이 루시아에게 말했다.

“루시아씨, 영감님께도 방어마법을 걸어줄 수 있으신가요?”

그녀 또한 순탄한 삶을 살지 못해 트라우마가 엄청날 텐데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있지 않기에 꺼낸 말이었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사실 어제부터 계속 걸어드리고는 있는데...”

“......”

별 소용이 없는 것인가?

그새 처리한 아린이 말했다.

“난 정말로 괜찮네. 신경 쓰지 말게.”

* * *

그들은 계속 앞으로 향했다.

점점 더 깊어지는 숲과 정비례해 더 많이 나타나는 고스트피셔.

유세현은 직접 나서는 일이 있더라도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스트피셔가 지니고 있는 마력이 대기의 마력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어 흐름을 읽을 수 없기 때문.

그래서 기척에 최대한 신경 쓰기도 해봤지만, 고스트피셔는 다가오는 것이 아닌, 마치 근처에서 생성되는 느낌이었다.

3마리의 고스트 피셔가 일행을 응시했다.

두 마리는 캐서린과 마족화한 마벨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마리는 짓궂게 보이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뜸 루시아를 향해 손찌검을 날리는 남자아이.

[이 마녀! 너 같은 게 있어서 우리 영지가 이렇게 된 거라고 우리 엄마아빠가 그랬어! 너 같은 건 사라져야...]

서걱.

루시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아이를 베었다.

이어서 정리되는 고스트피셔.

아린이 퀭한 눈을 비볐다.

그는 계속되는 심리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그 위험하다는 환각 증세는 없는 상황.

이용석이 말했다.

“내일이면 신전에 도착할 겁니다. 그러면 이 빌어먹을 산맥의 영향은 더 이상 받지 않으니 조금만 더 참으세요.”

그 말마 따라 다음날 자신감 있게 나아가던 이용석의 발이 멈춰 섰다.

토석이 주위를 에워싸고, 군데군데 돌벽이 세워져 있는 장소였다.

딱 봐도 뭔가가 있을 느낌.

허나, 내부는 빈 공터만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으로 물드는 이용석의 얼굴.

“뭐, 뭐야?”

“왜 그러는가?”

“어, 어...그, 그게...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이용석이 황급히 앞으로 뛰어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확인하려는 듯.

유세현은 그런 모습을 보며 단번에 눈치 챘다.

이용석이 현재 위치해 있는 장소가 최종 목적지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여, 여기에 원래 신전의 입구가 있어야 되는데...”

유세현은 지도를 펼쳤다.

이용석에게 길안내를 맡기긴 했지만, 길을 확인하지 않으면서 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레피아가 설명해준 지형지물이나 위치상으로 보건데 이 장소가 틀림없었다.

‘역시...뭔가 일이 일어난 건가?’

떠오르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신전 내부에 숨겨져 있던 던전.

‘설마 제한 인원이 가득 찬 건가? 그래서? 아니야 그럴 가능성은 낮다.’

대다수의 던전은 제한인원이 꽉 찬다고 해도 거절할 뿐 입구를 없애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100%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해볼 것은 전부 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주위에 적은 없으니 다들 흩어져서 찾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만에 하나 고스트피셔가 나타나면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일단은 스킬로 신호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네.”

“알겠어요.”

“어야.”

일행은 흩어져서 흔적 찾기에 돌입했다.

천마군림보를 이용해 솟아 올라있는 벽에 장치가 있나 눌러보기도 하고, 땅을 살펴보기도 했다.

허나.

‘젠장...’

발견되지 않는다.

마력도 전부 균일할 뿐 뭉쳐있거나 특수한 성향을 띄는 것은 없었다.

‘들어가야 되는데...’

그 안에 동생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할 겐가. 세현.”

“...일단 하루 머물면서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시뻘건 대낮부터 새벽까지 샅샅이 뒤졌음에도 발견되는 것은 없었다.

‘이곳은 포기해야 되는 건가.’

혹은 다른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찾아봐야 되는 것인가. 하지만 단서도 없이 이 넓은 산맥을 언제 다 뒤진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세현의 앞에 나타난 고스트피셔.

놈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혜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 살 수 있었는데.]

유세현은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드래곤의 일반적인 정신계마법도 소용이 없었던 그다. 당연히 이런 것에 무너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내 동생은 아직 살아있어.’

그러자 고스트피셔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맺혔다.

[후후후. 과연 그럴까?]

파앗.

별안간 눈부신 광명이 돌벽으로 부터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휑하던 공터에 고대 신화에나 나올듯한 웅장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 앞에 나타난 고스트피셔를 베어 넘기려던 이용석이 깜짝 놀라 손을 치켜세웠다.

“야! 야! 세현아! 저거야 저거!”

유세현이 휘두른 검이 도달하기 전 유혜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스트피셔가 말했다.

[내부로 들어가고 싶어?]

쉬익-

후웅.

순식간에 멈춰서는 검.

[들어가고 싶다면 보내줄게. 단, 너희는 후발주자기 때문에 그냥 들어갈 수는 없어.]

일반적인 고스트피셔와 달리 의지가 담겨져 있는 목소리였다.

“...조건이 있나?”

[후훗. 잘 아네. 뭐,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원들의 주위로 많게는 5마리, 적게는 1마리의 고스트피셔들이 나타나 달라붙었다.

고스트피셔가 더욱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들과 함께 나아가면 돼. 내부에서 벗어날 때까지.]

< 악몽의 산맥(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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