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세(4) >
반항하면 죽인다는 것인가?
“이런 미친! 정말로?”
“예, 사실이에요. 지금 이곳은 제국군이 완전히 점령하고 있어요. 반말을 찍찍 내뱉던 사람들도 이제는 굽실거리고 있죠.”
다른 한 명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에 조용히 있던 이용석이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어우 진짜 제국군 이 개새끼들. 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때문에 근처에 있던 일행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이용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질문에 답 해주느라 위험에 처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
그는 간단히 이야기를 늘어놨다.
제국군의 이탈.
사례는 이용석이 방금 말해준 하나 밖에 없었지만, 이곳 제국군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다른 장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이와 반대로 길드가 제국군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깨져가고 있는 균형과 신뢰.
“젠장, 예전에는 저러지 않았었는데.”
“전부 연기였었던 거죠. 빌어먹을...”
욕이란 욕은 전부 처먹고 있는 귀족은 이전까지는 꽤나 괜찮은 평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본심은 궁지에 몰렸을 때 나타나니까.
“후우, 그럼 당신...그...성함이?”
“가레크요.”
“아, 예. 가레크씨. 그럼 가레크씨가 보기에 놈의 스텟은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까?”
A랭크 초반부라면 해볼 만하다.
헨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모르겠어요. 내 수준에선 판단할 수 없는 것인지라. 다만 반항하던 A랭크 인원도 놈의 손에 죽었으니 적어도 초반부는 아닐 거예요.”
“끙...”
주위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정도의 수준이여서는 승산이 없다.
허나, 그때.
사람들의 시선 일부가 조심스럽게 한 명을 향했다.
지금까지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준 유세현.
그라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자신들도 모르게 생각한 것이다.
그가 과연 움직일까? 아니면...
이용석이 물었다.
“야 세현아 어떻게 할 거냐? 그냥은 절대 안 보내줄 것 같은데.”
“한 시간.”
“응?”
“한 시간 이후까지 답변이 없다면 다시 찾아가 끝을 보도록 하죠.”
너무도 평온한 답변이었다.
마치, 동네 마실 나간다는 느낌.
이에 헨돌을 포함한 사람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오! 이러면...”
“무리해서 싸우지 않아도 될지도...”
가레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살며시 목을 돌려 유세현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경갑이나 중갑이 아닌 뭔가 특색 있는 갑주.
허나, 그것만 빼고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자가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사람들의 안도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분이 그렇게 강합니까?”
“예. 무척이나...저분도 A랭크 초반부는 아니실 겁니다.”
“호오, 그렇다면...”
카르제마르 놈과도 정말 한판 해볼 만하다.
가레크가 이 주둔군의 지휘관에 대해 언급하자, 이에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아린이었다.
“카르제마르? 혹시 흑성, 라비스 카르제마르를 말하는 겐가?”
“...예. 그렇습니다만.”
“그럴 리가...정녕 라비스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겐가?”
아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였다.
유세현이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네. 토르튼 왕국 케렌 지역을 다스리던 유능한 젊은 영주지. 성품이 좋고 됨됨이가 착해 이런 짓을 할 인물이 결코 아닌데...”
말꼬리를 흘린 아린이 몸을 일으켰다.
“내, 직접 한번 만나보고 오겠네. 세현 자네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지만 나라면 만나 줄 것이네.”
“...흠. 알겠습니다. 단, 저도 동행하도록 하죠.”
“저도...”
쉬고 있던 루시아도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이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알겠네. 그럼 다 같이 한번 가보세나.”
자리에서 떠나가는 일행.
“아...자, 잠깐 나도!”
잠시 멍하니 있던 이용석이 아차한 표정이 되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대마법사 아린 하이워커.
알테리아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지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린의 성격상 얼굴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서일까? 그를 아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무엇인가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천막 내부로 들어가자 라비스 카르제마르가 반갑게 아린을 맞았다.
“현사(賢師)님! 무사하셨군요!”
“허허, 자네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다가와 포옹하는 라비스.
그런 그의 행동은 정감이 넘쳐 길드원들이 말한 것과는 무척 괴리감 있는 모습이었다.
“앉으시지요.”
“내, 그러도록 하겠네.”
의자에 앉아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
유세현과 루시아 그리고 이용석이 조심히 아린의 뒤에 위치했지만 라비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공백이 있는 만큼 시작부터 본론을 꺼내는 것은 미련한 일이기 때문.
아린도 그를 다시 알아볼 시간이 필요한 것.
그리고 그 결과는.
“하하하. 역시 현사님은 대단하십니다. 그런 길을 뚫고 오시다니.”
아린이 보기에 라비스는 변함이 없었다.
30분 쯤이 지나 슬슬 본론을 꺼내려던 때였다.
라비스가 말했다.
“현사님. 저희 군 쪽으로 오시지요. 팀원 분들도 전부 넘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드리고 직책도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높은 것을 부여해드리겠습니다.”
“라비스 자네...”
“현사님께서라면 분명 추후에 저보다도 더 높은 직책을 받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
아린의 입이 한순간 꾹 닫혔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비스...자네도 내가 왜 왔는지는 이미 알거라고 생각하네.”
라비스는 피식 웃었다.
“예. 물론입니다. 길드에 대한 처우 때문이겠죠.”
“역시, 알고 있었구먼. 그렇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현사님.”
라비스가 말을 끊었다.
“저는 현사님께서 어떤 말을 하시던 길드 놈들에 대한 처우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자네 같은 사람이...”
“현사님 제 누이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이네. 라비아를 어찌 잊었겠는가? 그녀는 괜찮은가?”
아린의 말에 라비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씁쓸하면서도 애잔한 느낌.
그가 허탈감 섞인 실소를 내뱉었다.
“하하, 세 달 전까지는 괜찮았었습니다.”
“......”
아린은 차마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과거형.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대규모 작전 이후 놈들의 반격이 있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퍼붓는 듯한 강력한 공세였죠. 허나, 그럼에도 저희는 잘 대응하며 퇴각했습니다. 길드놈들이 제멋대로 하다가 일을 그르치기 전까지
는...”
엄청난 격전 이후 퇴각하던 그들은 우연히 신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나, 당연히 상황이 상황인 만큼, 버려야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이끌린 것인지, 아니면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 관념 때문인지 몰라도 길드중 일부가 명령을 무시하고 내부로 진입.
라비스는 뒤쫓아 말리고 싶었지만 인원 제한이 걸려있어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이어진 적의 공격.
4만 명에 달하는 제국군이 2만 명으로 줄어드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몇몇 길드의 도주.
좌변을 맡고 있던 라비스 쪽은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었다.
허나, 우변을 맡고 있었던 라비아는...
“더 웃긴 건 뭔지 아십니까? 던전에 들어갔었던 놈들과 도주한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천막 내부를 울렸다.
다시금 고요해진 장내.
아린이 입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유세현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영감님.”
“......”
아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라비스가 고개만 살짝 들어 그를 응시했다.
유세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만 여기서 내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별다른 행패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유세현. 이 길드의 길드장입니다.”
라비스의 눈매가 좁혀졌다.
아린 하이워커가 아닌, 이 남자가 길드장이라고?
들어본 적은 있는 이름이었다.
그것도 바로 조금 전에.
“시체를 조종한다는 자로군요.”
“예.”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꽤나 정중한 말투.
유세현이 툭 말했다.
“그럼 힘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다른 놈들처럼 덤벼 보시겠다는 건가요?”
“보내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당신.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죠?”
“예.”
“그만두시죠. 현사님의 지인을 헤치고 싶진 않으니.”
진심 어린 충고였지만 유세현이 들을 리가 없었다.
“후회하지 마시기 마랍니다. 전 절대 봐주는 일이 없으니.”
라비스가 자리에서 일어서 검을 뽑았다.
아린은 황급히 말리려했다.
유세현이 아닌 라비스를 위해서. 그가 유세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유세현 또한 상대를 절대 봐주지 않으니까.
“라비스! 기다리게! 우리가 떠나려는 이유를 들으며 자네도 납득...”
허나, 그 말은 라비스에게 닿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럼...”
쉬익-
유세현이 한 박자 더 빠르게 치고 들어갔기 때문.
그 경이로운 속도에 라비스의 눈이 한순간 보름달처럼 커졌다.
콰앙!
검신이 맞붙기 무섭게 풍압에 의해 천막이 요동쳤다.
“이게 무슨!”
깜짝 놀란 경계병이 내부로 뛰쳐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천막의 출구를 통해 내부에서 사람이 날아와 그를 덮쳤다.
“윽!”
황급히 자세를 다잡은 경계병.
그는 당연히 날아온 이가 라비스에게 덤빈 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
경계병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면을 구른 이가 라비스였기 때문.
‘라비스님이 밀렸다고?’
슈욱-
그 순간 천막내부에서 또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비스는 황급히 검을 들어 유세현의 일격을 받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
라비스는 혀를 찼다.
스텟이 아무리 높아봤자 30~35%정도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나와 스텟이 거의 비슷하다!’
거기다가.
채재재쟁!
치고 들어오는 것이 날카롭고, 예리하면서도 무척 무겁다.
그리고 저 기묘한 움직임.
도저히 예상이 불가능하다.
스킬하나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 밀린다.
‘어떻게 이런 검술이...’
전투가 시작된 지 아직 채 1분 지나지 않았건만, 라비스는 이대로 있다가는 100% 당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
생각과 동시에 그의 검이 칠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루베르크의 검신처럼.
흑성(黑星).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새까만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 불리게 된 이명.
채 0.1초도 지나지 않아 칠흑으로 물든 검신에서 발톱처럼 생긴 10개의 흑빛의 검기가 발생했다.
그 모습을 본 경계병은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걸 바로 꺼내야 될 정도로 그렇게 힘든 상대란 말인가?
상하좌우. 사방을 통해 유세현을 향해 뻗어나가는 검기.
이 스킬은 쳐내도 부서지기 전까지 부메랑처럼 계속 적에게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무척 강력하기 그지없는 스킬이었다.
그는 틈이 생기면 그때 확실한 유효타를 가할 생각을 가졌다.
허나, 그 순간.
순식간에 분열된 라 아닐더가 흑색의 검기를 쳐내기 시작했다.
라비스는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이 스킬은 카르제마르 가(家)의 장남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비술이다.
때문에 그는 아직 자신 이외에는 이 스킬을 사용하는 이를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나타나다니?
게다가 이 압박.
라비스는 깨달았다.
현재의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눈앞에 있는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놈이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챙!
휙휙휙-
턱.
튕겨나가 지면에 박히는 검.
라비스를 목을 향해 치고 들어간 유세현의 검이 정확히 1cm를 남기고 멈춰 섰다.
< 난세(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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