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61화 (261/612)

< 지원군(4) >

-캬아아아.

쉬익-

달려드는 알비론의 목을 검끝이 스쳐지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보였다.

타이밍이 그만큼 너무도 맞아 떨어진 탓이었다.

툭.

나뒹구는 알비론의 목.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에반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던 유세현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몇 천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한다는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자.

그의 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공방의 효율성만을 중요시하던 과거의 유세현으로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였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눈을 번뜩 빛낸 에반이 청색의 바람을 쏘아냈다.

흔들리는 대기.

촤자자작.

콰아아앙.

그가 휘두른 검을 내렸을 때, 전방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잔재밖에 없었다.

청성파의 무공, 송풍검(松風劍).

에반은 이강호의 덕택으로 9파1방 중에서도 검법으로 유명한 청성파의 무공을 익혔다고 한다.

유세현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순순한 움직임으로 보건데 에반의 스텟은 헤드리아보다 조금 아래였다.

아니, 그가 보법을 운용하는 것을 고려하자면 10~15%정도?

레피아의 추성 힘스텟이 45~50%, 헤드리아의 추정 힘스텟이 70~80% 정도인 것을 감안하자면 그래도 55~65%정도로 무척 높은 수치인 것이다.

즉, 자신의 암흑투기가 있다면...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이길 수 있다.’

살짝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가 스스로의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만큼 실력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

허나, 유세현은 어제 처음 만난 인물이니 만큼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유세현은 다시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할일에 집중했다.

어느새 알비론 한 마리가 검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팔을 들이대고 있었다.

암흑투기를 사용하지 않아 무척 빠른 만큼, 보통의 사람이라면 방어한 뒤 반격을 취했겠지만.

유세현은 더욱 달라붙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루베르크를 뻗었다.

푹.

검은 정확히 두뇌를 꿰뚫었다.

연이어서 알비론 4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놈들은 유세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부술 것은 부수고 피할 것은 피한다.

허나, 유세현의 이런 동작은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외줄타기와 다름이 없어보였다.

에반의 군에 소속되어 있는 병사 몇몇이 중얼거렸다.

“야, 저러다가 저 남자 어이없게 죽는 거 아니야? 겁나 위태위태하게 싸우네.”

“너도 그 생각 했냐?”

그러나 유세현이 에반을 지켜본 것처럼 유세현을 주시하고 있던 에반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저 모든 것은 유세현의 의도라는 것을.

꿀걱.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속도로만 보자면 스텟은 자신보다 낮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 검술.

상대방의 빈틈은 완벽하게 파고든다. 없으면 만들어 낸다.

허나, 이것뿐 만이었다면 그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냐 저 검법은...’

모든 검술에는 식(式)과 형(形)이 정해져있다.

그래야지만 검술을 펼칠 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식(式)과 형(形)이 정해져있지 않다면 현재 취하고 있는 동작을 마친 뒤에 어떤 행동을 해야 될지 스스로 끝임 없이 생각해내야 된다.

방어를 해야 될 지, 공격을 해야 될 지, 내리쳐야 될지, 사선으로 베어야 할지.

때문에 아무리 천재일지라도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0.1~1초의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은 한계를 뛰어넘은 괴물끼리의 대결에서 생사를 가르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다.

즉, 유세현의 저런 행동은 나중이 정해져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인데.

너무도 불규칙하다.

마치, 근본도 없이 감각만을 의지해 펼치는 마구잡이식 검술처럼.

이는 청성파의 검법과 아르카드 제국식 검술을 완전히 통달한 천재, 에반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쉬이익-

푹.

유세현이 검이 또다시 5마리를 베었다.

에반의 눈동자 속으로 펼쳐지는 천마의 검법.

에반은 놀라워하고 있었지만, 사실 유세현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천마의 검법이 알려주는 경로를 항상 완벽하게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왠지 모르게 천마의 잔소리가 들리는 느낌이다.

[쯧쯧, 이 재능 없는 아둔한 제자 같으니라고. 최강의 검법과 무공을 전수해줬음에도 제대로 사용하지를 못하다니...]

고개를 흔들어 천마의 걸걸한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운 유세현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검을 휘둘렀다.

그는 지금까지 직속호위병과의 전투시 천마의 검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천마의 검법은 그 특성상 항상 아슬아슬한 경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알비론과 달리 실수하는 순간 최소 치명상.

혹은, 사망.

허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것 또한 권능의 개화와 마찬가지로 스텟의 차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검법이 보여주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 * *

속전속결(速戰速決).

생존자들은 최소한의 취침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진군에 쏟아 부었다.

알베타스가 몰려오기 전 최대한 많이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이주일.

그들은 별 큰 피해 없이 망자의 땅의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산맥에 올라서 있었다.

야영을 위해 모닥불을 피우자 밝은 불빛이 경계선 마냥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다.

“자.”

어느 샌가 다가온 레피아가 유세현을 향해 스튜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이미 마른 육포를 섭취한 유세현이었지만 그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받아들었다.

스튜를 한 숟갈 입에 떠 넣은 유세현.

“맛있네요.”

“후후, 내가 독만 잘 제조하는 게 아니지.”

레피아는 은근슬쩍 유세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루시아의 시선이 미미하게 느껴졌으나, 그녀는 그냥 무시했다.

애초에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에반에게 들은 이태광의 팀에 대한 이야기.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전 에반과 나누었던 대화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되었다.

“전멸? 태광오빠 팀이?”

“예...정말 안타깝지만...”

“어쩌다가! 왜!”

“...제가 아까 전 큰 작전이 행해졌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 말했지. 잘 성공해서 올 수 있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성공한 작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레피아씨. 게리오그 산맥에 대해 기억하시죠?”

“......”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레피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게리오그 산맥. 다른 이름으로는 악몽의 산맥.

이 산은 침입한 생명체의 트라우마를 강제로 일깨운다.

도입부에는 단순히 악몽을 꾸는 정도로 끝나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환영이 보이게 되고 결국에는 정신분열까지 이르게 만든다.

그래서 과거에는 굉장히 엄선한 절차를 거쳐 들어갈 인원을 선별했었다.

“설마 그런 장소에 태광오빠 팀을 들여보냈다는 건 아니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야, 에반...너...”

“제가 보낸 건 아닙니다. 보낼 권한도 없고요. 그리고 권유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태광씨께서 스스로 들어가시겠다고 말하셨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하겠다고 나서는 인원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맡은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셨기에 처음에는 태광씨 팀이 무사한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약속 장소에서 기한이 5일이 넘게 지나도록 기다렸음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매섭게 날이 선 레피아의 눈초리가 번뜩 빛났다.

“그 말은 정확히 따지자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는 거네?”

“그렇죠.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수색대는? 수색대를 파견한다면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레피아씨.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수색대를 파견할 수 있을 정도까지의 여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들어갈 인원도 없고요.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레피아는 심각한 표정 그대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툭 말했다.

“어떤 임무였어?”

“그건...레피아씨께서 생각하고 계신 바로 그것이 맞습니다.”

악몽의 산맥.

이곳에 들어가는 이유는 둘 중에 하나다.

하나는 산맥을 넘어,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둘째는 산맥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신전의 특수장치를 가동시키기 위해.

장치를 가동시키면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있는 길목이 만들어진다.

임무성공이라는 말과, 이태광의 팀만 들어간 걸로 보았을 때 둘 중에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까지도 없는 것.

레피아는 상념에서 깨어나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는 유세현을 힐끔 살폈다.

아직 이태광이나 그의 여동생이 죽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허나, 그녀는 이것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냥 에반이 말하게 뒀어야 했는데.’

실책.

오지랖이 불러온 아주 큰 실책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말을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유세현,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예? 어떤...”

유세현이 별 대수롭지 않은 것 마냥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고, 루시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레피아를 응시했다.

레피아는 우선 진지하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건넸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던 유세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윽고 시작된 이야기.

“......”

깊은 적막감이 감돈다.

유세현의 전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루시아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굳어있었고, 레피아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

주위에 있던 아린, 케드리나, 검은꽃들이 안절부절못한 눈빛으로 유세현을 응시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서도 유세현이 단칼에 레피아의 목을 쳐버릴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냉정한 상황 판단은 현재의 그를 있게 해준 무기.

유세현은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 어차피 그때 바로 올라갔다고 해도 너무 늦었었어.’

그 사건이 터진 시기는 에반이 길목을 뚫기도 전.

경계지역에서 이곳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순수한 시간만 해도 한 달이다.

즉, 이미 에반이 도착한 순간부터 유세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지금은 길목의 일부도 다시 막혔다고 한다.

한마디로 북상하기 위해서는 뚫거나 조심조심 몸을 사려 넘어가야 된다는 것인데,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것이기에, 둥지에 처음 도착한 그 순간부터 바로 북쪽을 향해 움직였다고 해도 때를 맞춰 도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후우...”

때문에 이제 그는 믿어야했다.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작전은 성공했다고 하니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이었다.

레피아가 말했다.

“미안.”

“아뇨, 지금이라도 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지금이라도...”

“아뇨, 일단은 태광형님과 혜인이를 믿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한다.

유세현의 시선이 배신자들이 위치해 있을 저 아래로 향했다.

* * *

알베타스의 병사를 물리친 인간세력은 그대로 배신자들의 진지를 휩쓸었다.

경악하는 배신자들.

이전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에반과 무림인들은, 적으로 돌변한 지금에 와서는 거대한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젠장! 젠장! 에반 비텔스바흐라니!”

“무, 무인들도 있어!”

“막아! 스킬을 날려!”

“너,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너무 강...커헉!”

배신자들은 살기위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A랭크 혹은 B랭크 최상의 힘을 지니고 정예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 했다.

“사, 살려줘! 감염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거야 어쩔 수 없이 한 거라...끄아악!”

몇몇은 살려 달라 애원하며 항복을 해왔지만, 감염충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피부로 촉수가 튀어나오면서 기괴한 모습으로 변모.

사람들은 해독약으로 일부를 구할 수 있음에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여 나갔다.

배신도 그렇지만, 새내기들을 속여 알베타스에게 고스란히 바쳤다는 점에서 살려주기에는 죄악이 너무도 컸기 때문.

그들은 망자의 땅을 시작으로 단번에 무너진 도시까지 진격했다.

겉으로만 보자면 승승장구.

허나, 그런 그들을 저 높은 하늘에서 주시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 지원군(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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