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53화 (253/612)

< 전멸(5) >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인가.

마음은 고마웠다.

허나, 정말 마음 만이다.

지금 그녀가 가세해봤자 별 의미가 없으니까.

그림자는 바닥을 타고 이동해 순식간에 카르베스의 등 뒤로 돌아갔다.

놈의 목을 노려볼 모양.

‘위험하다!’

유세현은 카르베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게 하기 위해 황급히 검을 내질렀다.

오감이 예민해져 있는 놈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면 몰라도 전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움직이는 그림자에 대해서 눈치 채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레피아도 이를 모르진 않을 터인데.

체력적 한계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아니면 고유특성에 대한 자부심 때문일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사실 레피아도 느낌이 별로 좋지 않기는 했다.

그러나 유세현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생각나는 건 이 정도 밖에 없었다.

스스스.

레피아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목을 향해 날아가는 단검.

그 순간 카르베스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

푸푹!

“크윽.”

가시처럼 날카로이 선 4쌍의 날개 중 2쌍의 날개가 레피아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젠장!’

유세현은 라 아닐더를 이용해 측면에서 날개를 노렸다. 라 아닐더의 위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카르베스는 황급히 날개를 회수했다.

솨아아-

곧장 뻗어나가는 부패의 어둠.

가까스로 찰나의 틈을 만든 유세현은 레피아의 몸을 낚아채 물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잽싸게 상처부위를 살폈다.

복부, 허벅지, 팔.

“커...컥.”

상처는 심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레피아가 잘 대응을 한 덕에 급소는 전부 빗겨간 상태였다.

이걸로 죽지는 않겠지.

레피아가 중얼거렸다.

“미, 미안. 내가 그 새끼들을 막지 못해서...”

콰아앙!

그때 강물이 갈라지며 카스베스가 날아올랐다.

암흑투기가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언제 봐도 믿을 수 없는 비행속도였다.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

“허억 허억...레피아씨 잠영술 사용할 수 있으시죠?”

“어...한 번 정도라면 어찌어찌...”

“그럼 레피아씨는 지금 바로 도망치세요.”

“...너는 어쩌고...”

그렇게 말한 레피아였지만, 사실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유세현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툭 말할 뿐이다.

“제 팀원...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수면 위를 걷고 있던 유세현은 강 속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밑바닥을 향해 레피아를 던졌다.

지면에 녹아들듯 자취를 감추는 그녀.

유세현은 멈추지 않고 물살에 몸을 맡기며 질주했다. 상공보다는 이쪽이 놈에게 더 부담이 갈 것이기 때문.

허나, 그것도 잠시.

콰아아앙!

공간을 뒤흔드는 강렬한 파동이 그가 위치해 있는 장소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 * *

“허억...허억...”

가까스로 강에서 빠져나온 부녀.

강에도, 숲에도, 온통 알비론 천지였기에 마력과 체력이 다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숨기는 것뿐이었다.

지드먼은 제발 들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애타게 외치며 어떻게 해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허나, 몇 십 번을 생각해도, 상상해도 탈출하는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상황은 암담했다.

지드먼은 슬쩍 고개만 돌려 루시아를 바라봤다.

무척 수척해져 있는 안색.

안 그래도 계속 고생만 해온 아이인데.

그는 신이 원망스러웠다.

왜 아르카드 대륙에서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인지.

그것도 모자라서 왜 이런 세계로 불러들인 것인지.

낌새를 느낀 것인지 다수의 알비론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드먼은 없는 힘까지 다해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루시아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두근. 두근.

망가지기라도 한듯 빠르게 뛰는 심장.

마침내 놈들과의 거리가 20m안팎으로 가까워 졌을 때였다.

부글부글.

퍼엉!

강에서 물보라가 솟구치더니 두 개의 물체가 솟아올랐다.

유세현과 카르베스.

알비론의 시선이 유세현에게 쏠리자 지드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은 웬만한 생명체는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치열한 접점을 펼치고 있었다.

아니, 유세현이 밀리고 있다.

허나.

이번에도 찌른 창이 여지없이 빗나가자 카르베스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다.

카르베스는 아까부터 승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유세현이라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묘한 이동스킬 때문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속도를 유지한 채로 방향을 틀 수 있다니.

이건 천공의 지배자.

가루다족의 왕인 자신도 할 수 없는...

카르베스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가루다족의 왕이라니?

쉬이익-

거기까지 생각한 카르베스는 아차 싶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유세현의 검이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

카르베스는 잽싸게 스킬을 사용했다.

[회전하는 바람.]

후웅!

쾅!

발현되기 무섭게 지면으로 처박히는 유세현의 몸.

잽싸게 자세를 다잡아 주변 알비론을 처리한 유세현이 혀를 찼다.

‘젠장...’

50초.

아니, 40초.

딱 그 정도의 시간만 벌 수 있으면 온 힘을 다한 천마군림보로 알베타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데.

시간을 벌 수 있을만한 꺼리가 없다.

시간을 벌기위해서는 광역스킬을 사용해야 되는데 마력을 더 이상 소비하면 안 되었기 때문.

냉정한 판단력이 현실을 말해준다.

‘이 상태로는 힘들겠군...’

어이없이 닥쳐온 죽음의 위기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전부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면 충분히 알베타스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팀원들을, 아니 이제는 동료들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가능성은 충분이 있었으니까.

제국군 놈들이 마음대로 이탈하지만 않았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테지.

‘내 불찰이다.’

알라함이 알베타스의 노림수를 알아채는 것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래서 진군속도가 늦춰지고, 결국에는 이런 결과를 맞게 되었다.

‘아직 죽을 수는 없는데...’

유세현은 호흡을 다듬었다.

그래, 아직 죽을 수 없다.

동생을 만나고, 이강호를 만나고, 김주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진원진기를 사용해서라도 빠져나간다.’

유세현이 그렇게 결심한 무렵, 지드먼은 바로 앞에 있는 유세현을 보며 어떻게 해야 될 지 생각하고 있었다.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한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자면 아무리 유세현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그러면 모른척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

안 된다.

시간문제일 뿐 결국에는 알비론에게 발각될 터이니까.

그는 다시 한 번 루시아를 바라봤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딸.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탈출시켜야 되었다.

그는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유세현. 유세현.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

카르베스를 응시하던 유세현이 깜짝 놀라 눈동자만 힐끔 돌려 풀숲을 살폈다.

‘지드먼! 루시아!’

휩쓸려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것인가.

아니 그보다 아무리 움직임이 없었다지만, 불과 몇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다니.

유세현은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 부녀를 구해줄 능력 따위는 없는 것.

유세현의 시선이 다시 카르베스를 향했다.

마족화의 제한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놈은 내려다보기만 할 뿐 접근해오지 않았다.

아마 움직이면 반응해오겠지.

유세현은 자세를 유지한 그대로 입만 살짝 뻥끗였다.

“빠져나가지 못하신 겁니까?”

“그렇다네. 그보다 자네는 어떤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유세현은 가슴이 아렸다.

모 아니면 도.

동료 아니면 남.

대인관계의 극단성을 달리는 그다.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같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혼자라면...”

“역시...”

지드먼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가? 내가 만약 그 시간을 끌어줄 수 있다면 루시아도 함께 데려가 줄 수 있겠나?”

“아버...읍읍!!”

루시아가 당황해 외치려는 것을 지드먼이 황급히 틀어막았다.

카르베스가 눈치 채면 안 되었기 때문.

유세현이 조심히 답했다.

“40초. 가능하시겠습니까?”

무슨 수로.

어떻게.

그런 건 묻지 않았다.

지드먼은 성격상 이런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를 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지드먼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40초라면 가능하네. 날 놈을 향해 던져주게. 그리고 반대로 도망가게.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 되고.”

“읍읍...아버지!”

루시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르베스는 그제야 유세현의 근처에 다른 인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것이 스킬이라도 쓰려나 싶었는데...

‘대화를 하고 있던 거였나?’

꿍꿍이가 있다고 판단한 카르베스는 순식간에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드먼이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날 던지게!”

“아버지!”

유세현의 손이 지드먼의 부서진 갑주로 향했다.

교차하는 지드먼과 루시아의 시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시간은 마치 멈추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서로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루시아의 얼굴은 무척 슬픈 표정이었다.

지드먼은 괜찮다는 듯 웃어주었다.

그리고 지긋이 읊조렸다.

“살거라.”

쉬이익-

지드먼의 몸이 상상도 못할 속도로 카르베스를 향했다.

유세현은 곧바로 루시아를 들쳐 맨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무려 6%의, 잔존 모든 마력을 일제히 쏟아 부운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파아앙!

그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르기 그지없었다.

[크...저게...]

지드먼을 확인한 카르베스는 살짝 경로를 틀었다.

잡졸 같은 인간 한 마리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함.

놈이 이렇게 오는 것은 분명 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하지 않고 피해버리면 그만이지 않는가.

허나, 그때였다.

지드먼이 씨익 웃었다.

“언젠간 쓸 날이 오게 될 줄 알았지.”

과거 1존을 거닐던 시절.

지드먼의 팀이 포함되어 있는 연합은 우연히 던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우하게 된 최악의 보스.

함께 들어간 수많은 팀들 중 던전 공략이 끝난 뒤 무사히 빠져 나온 팀은 후방에 강제로 배치되어 있던 지드먼의 팀과 다른 한 팀 밖에 없었다.

보스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건 놈의 특수 스킬.

놈은 스스로의 몸을 제물삼아...

“뒤져라! 괴물아!”

파앗!

지드먼의 몸에서 눈을 멀게 만드는 광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내 눈이!]

안 그래도 시력이 보통의 종족보다 뛰어난 카르베스에게는 그야말로 최악.

허나, 지드먼이 사용한 스킬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쩌적.

쩌저적.

지드먼의 피부가 갈라지며 울그락불그락 용솟음쳤다.

그는 끝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루시아가 태어난 후 부터 지금가지 긴 싸움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딸이 무사하기를...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기를...

콰아아아앙!

그의 염원을 담은 버섯모양의 새까만 뭉게구름이 하늘높이 피어올랐다.

< 전멸(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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